지하아이돌과 관객
"아이돌은 역시 미소가 제일 중요하죠!"
모 서브컬쳐 애니에서 아이돌을 지망하는 주인공이 내뱉은 대사였다. 춤이나 노래는 부족하지만 진실된 마음과 미소로 사람들을 끌어당겨 점점 성장하는 스토리의 애니.
진부하다. 아직도 이런게 먹힌다고 생각하는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오늘의 목적지인 라이브 하우스로 걸어갔다. 일본에 온 김에 밴드 문화를 체험하고 싶어서 친구와 함께, 근처에서 공연을 한다는 라이브 하우스를 찾아낸 것이 벌써 5분전.
한번에 1000명이 건널 수 있다는 시부야의 커다란 사거리 횡단보도를 건너, 계속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화려한 고층건물들이 즐비하던 거리에서, 직장인들이 퇴근하고 맥주를 마실법한 풍경으로, 이제는 술집조차 드물어지고 사무실이 있을법한 오피스텔 거리까지. 구글 지도가 안내해주는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긴지 어언 20분,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며 휴대폰이 짧은 진동음을 울렸다.
"La.mama". 필기체로 적힌 빨간색의 글씨가 오피스텔 건물의 바로 옆 구석에서 깜빡거린다. 실용적인 것을 추구하여 특색이라곤 없는 네모난 오피스텔과, 본인의 존재를 표출하고 싶어 안달난 듯한 반짝이는 간판이라니... '저 둘이 한눈에 들어오니 뭔가 신기하네'라는 감상을 가진채 표를 사기 위해 1층의 점원에게 다가갔다.
"누구 보러 오셨어요?"
표를 구매하자마자 점원이 우리에게 던진 질문이다. 한국에 사는 밴드맨에게 듣기론 여기서 우리가 대답한 출연진에게만 지금 낸 표값이 정산된다고 했던가- 제일 재밌어보였던 4번 밴드의 이름을 말할까 했지만, 그 밴드의 이름을 일본어로 발음할 줄 몰랐기에 딱히 누굴 보러온 것은 아니라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이런 경우가 흔하지 않은 것인지, 점원은 "에.."라며 일본인 특유의 감탄사를 내뱉고선 우리에게 지하로 들어가면 된다고 안내해주었다.
계단을 내려가서, 방음이 잘 될법한 두꺼운 문을 힘껏 밀어내자, 서른명 남짓 들어갈법한 푸른 빛이 감도는 공연장이 우리를 반겼다. 공연장 내부는 뭔가 의외인 점들이 많았는데, 분명히 지하의 밀폐된 공간인데도 쿱쿱한 냄새없이 공기가 깨끗했고, 최소 50대로 보이는 일본의 아저씨들이 하트모양 응원봉을 들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들이 그랬다.
'무대의 젊은 여자애들 상대로 파파카츠 같은걸 하려는 아저씨들'
5개 공연중 2개가 끝날때까지 그 아저씨들을 보면서 내가 가졌던 생각이었다. 앞머리가 벗겨진 아저씨들이 허리에는 하트 응원봉을 차고, 카메라로 밴드 내의 여성맴버만을 클로즈업해서 찍는 모습이 점점 그 생각을 사실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공연은 재밌게 즐기고 있었지만, 어느새 내 안에서 변태 아저씨가 되어버린 관객들이랑 같은 공간에 있다고 생각하니 즐거움 사이에 약간의 불쾌감이 공존하는 듯 했다.
세번째 공연은 응원봉의 주인, 지하아이돌이 무대로 나섰다. 좋게 말해서 호감형으로 생긴 여성진 7명. 그 중 2명은 150정도의 키에 몸무게가 언뜻봐도 80kg은 되어보였다.
이런게 아이돌이라고?
"일반인 치고는' 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야할만큼, 절대 가수는 되지 못할 노래실력. 거기에 춤은 한국 고등학교 댄스부가 더 잘춘다 싶을 정도로 박자가 살짝씩 어긋나는 느낌이다.
그런데.. 뭔가 멋있었다.
무대에서 아이돌이 응원봉을 내밀자, 관객도 응원봉을 내밀며 호응한다. 아까 허리춤에 응원봉을 매고있던 아저씨들이다.
뒤에서 앞으로 달려나오는 안무를 추며 손을 뻗는 아이돌과, 똑같이 뒤에서 앞으로 카메라를 움직이며 열심히 촬영하는 관객. 아까 여성맴버를 클로즈업해서 찍고있던 아저씨다.
6명의 멤버가 무릎을 꿇고 한사람을 돋보이게 하는 안무에선, 앞에 있던 팬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뻗어 주목하는 제스처를 보여준다. 뭔가 뭉클해지는 광경이다.
모든것이 오해였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부끄러움과 함께 무대를 즐겼다. 무대와 나를 분리하던, 너무나도 얇지만 동시에 그만큼 단단한 벽이 이제서야 허물어진 것 같은 기분. 덕분에 이어지는 4번째 밴드의 공연도 몇배는 더 즐겁게 즐긴 듯 했다.
마지막 공연은, 2인조의 지하 아이돌. 위키에는 2014년에 데뷔한 그룹이라고 한다. 11년이나 활동을 한만큼 팬도 꽤 있는 것인지, 어느샌가 들어온 사람들에 공연장이 북적북적 해졌다.
곧이어 시작하는 공연. 뜨거워지는 공기에, 나도 이번에는 쓸데없는 생각 없이 공연을 즐겼다. 박자에 맞춰 팔을 흔들고, 호응을 유도하면 있는 힘껏 따라외친다. 그런 내 모습이 닿았는지, 내 쪽을 바라보던 아이돌이, 활짝 웃으며 나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워보인다. 너무나도 순수한 아이처럼 보이는 그 미소에 넋이 나가 버린 느낌이었다. 분명 30대일텐데도 얼마 전에 봤던 12살짜리 사촌동생보다도 순수함을 간직한 미소.
그 미소에 직격당한채, 무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노래 가사 한소절에 귀에 꽃혔다. "얏파 아이도루와 타노시다카라!" 직역하자면 "역시 아이돌은 즐거우니까~" 정도의 문장이다.
그걸 노래하는 그녀의 모습은, 아까의 미소처럼 아이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많은 일을 겪었음에도 그래도 이게 너무 좋아서 미쳐버릴 것 같다는 느낌. 환상이 깨지고 현실을 마주했음에도 이 활동을 순수하게 사랑하고 좋아하는 모습. 그게 그 여행에서 봤던 무엇보다 아름다워서 한국에 돌아와 이 글을 적는 지금까지도, 그때 지어주었던 미소만큼은 눈에 아른거리는 기분이다.
"아이돌은 역시 미소가 제일 중요하죠!"
이제는 이 말에 공감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