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교사 선생님의 입장에서 무기력한 아이들을 대하는 방법
교실에 들어와 학생들을 바라보면 작은 사회를 보고 있는 듯하다. 떠들고 있는 아이, 악기를 불고 있는 아이, 조용히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아이. 가지각종의 아이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와중에 조용히 책상에 머리를 박고,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 아이가 있다. 학교에 왔지만 학교 일과 중 80을 책상을 바라보는데 쓰고 있다. 무기력한 아이, 요새 선생님들의 고민거리 중 하나다.
모둠 활동을 해도, 체육 활동을 해도 도저히 반응이 없다. 참여한다고 해도, 하는 시늉만 하고 다시 책상에 머리를 박는다. 처음에는 걱정돼서 교무실로 불러 무슨 일이 있냐 물어본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별일 없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타이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어느 순간 화가 나기 시작한다. 열심히 준비해 온 수업을 보지도 읽지도 않고 그저 자버린다. 쉬는 시간이 되면 잠깐 일어나서 떠들다가 수업 시간이 시작되면 귀신같이 다시 자버린다. 그래서 한 번 화를 냈더니, 이후에는 상담을 해도 아무 말도 없다. ‘내가 잘못했나?’라는 자괴감이 들기도 하고, 답답해 미쳐버릴 것만 같다. 차라리 화를 내고 감정을 표현하면 뭐라도 할 것 같은데 상담실에 와도 “네..”밖에 말을 하지 않는다. 결국 선생님도 무기력해져 간다.
무기력한 학생들에게 알맞은 대처를 하기 위해선 먼저 무기력한 학생의 입장을 이해해야 한다. 왜 그 아이가 풀이 죽어 있는지 알아야, 선생님은 분노 없이 공감하는 마음으로 학생에게 다가설 수 있다. 그리고 공감하는 마음으로 다가서야 학생의 마음을 열고 재도약하게 만들 수 있다.
먼저 사회적인 원인을 살펴보자. 대한민국은 정말 무기력이 발생하기 쉬운 환경이다. 획일적인 성공 기준, 지나친 경쟁과 서열화, 조건적 평가적 양육 및 훈육 문화, 극핵가족. 어렸을 때는 태권도, 발레, 악기 등 다양한 것들을 할 수 있다가, 중학교만 들어가도 전부 국영수 위주로 시스템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공부로 경쟁이 붙는다. 학원을 가면 이 정도면 어느 대학 갈 수 있다. 저기 대학 갈 수 있다. 아직 고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학생의 운명을 제멋대로 제단하고 있다. 그리고 학부모가 아이에게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아도 아이는 안다. 특목고 예비반이니 학교 시험이니, 의대반이니 이미 서열화가 시작 됐다는 것을 말이다.
이런 와중에 집도 편안한 안식처가 돼주지 못한다. 중학생만 돼도 음악 해보겠다고 얘길 하면 공부나 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시험을 못 보는 날에는 아주 어정쩡한 분위기가 집안을 감돈다. 공부를 잘해도 문제다. 공부를 잘해야만 칭찬,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관점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 공부는 엄청난 압박이자 스트레스가 된다. 집안은 회사처럼 ‘공부’라는 업무를 달성해야만 사랑을 주는 공간으로 아이들에게 인식된다.
그나마 과거에는 두 부모에게 채우지 못한 사랑을 할머니, 할아버지 또는 동네 어르신들에게서 채웠다. 하지만, 극핵가족으로 사회가 바뀌면서 아이들은 충분할 정도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나게 된다. 엄마나 아빠에게 뭔가를 같이 하자고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대화가 맴돈다.
민서(아이): 엄마 나랑 놀자
엄마: 엄마 오늘 미팅이 있어서 힘들어.
민서: 저번에 같이 전시회 가자고 약속했잖아.
엄마: 미안해 그래도 오늘 미팅은 중요한 미팅이어서 안 돼. 민서 아빠 혹시 오늘 전시회 갈 수 있어?
아빠: 오늘 계약처랑 약속 있는데.
민서: 나랑 놀자!!!
엄마: 씁! 누가 그렇게 떼쓰래
이런 식으로 몇 번 반복하다 보면 아이는 더 이상 자기 힘으로 관계를 향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엄마나 아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된다.
무기력의 원인은 다양하다. 위 예시처럼 무기력은 자기 뜻대로 무엇을 할 수 없을 때 나타나기도 하고, 너무 할 일이 많을 때, 실패의 두려움 등 다양한 원인에 의해 발생한다. 그리고 보통 무기력이란 긴 시간에 걸쳐 쌓인 게 터진 만성적인 증상이다. 요즘 아이들은 초등 4학년만 돼도 학원을 3~4개씩 다닌다. 이렇게 할 일이 많다 보면 체력이 바닥나고 더 이상 할 일들을 쳐다도 보기 싫어진다. 업무가 너무 많을 때 오히려 하기 싫은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업무가 많은 삶을 어렸을 때부터 몇 년 동안 지속하다 보면 만성적인 무기력에 걸리기도 한다.
또한 어떤 일을 할 때 결과에 대해 평가하는 행동은 아이의 무기력을 높인다. 결과에 대해 평가를 받은 학생들은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을 꺼린다. 왜냐하면 새로운 것을 잘할 것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몇 명의 아이들은 꾸준히 좋은 결과를 낸다. 하지면 결국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아이도 있다. 칭찬도 결과에 대한 평가가 될 수 있다. 피아노를 좋아하는 학생에게 “너 정말 피아노 잘 친다.”는 칭찬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는 결과에 대한 평가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너 정말 피아노를 좋아하는구나!”, “열심히 치네?”와 같은 말을 해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이에 대한 사회적, 개인적 이해가 되기 시작하면 아이를 다룰 때 더 이상 화가 나지 않는다. 이제야 아이에게 다가갈 준비가 된 것이다.
무기력한 학생들에게 다가갈 때는 절대로 윽박지르거나 화를 내며 다가가면 안 된다. 이미 그런 대접에 익숙해진 학생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잘해줘야 한다. 그러면 학생은 당황하게 된다. 역설적인 태도를 통해 아이들이 당황스럽게 만들어 빈틈이 생기도록 해야 한다. “최대한 역설적으로 접근해서 혼내는 대신 관심을 갖고 존중해 주며 무언가를 함께 해보자고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당장은 어리둥절 하지만 계속해서 “요즘 계속 힘든가 보다.”,”고민이 있으면 선생님에게 말해 볼래?”와 같은 말을 듣다 보면 조금씩 마음이 열릴 수 있다. 덤으로 초콜릿 한두 개를 주면 좋을 수 있다. 아이들도 사람이라 자기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에겐 조금씩 마음을 연다.
아이의 존재를 환대하고, 격려하며 재활훈련의 각을 보아라. 학교에서는 환경 당번이라든지, 기상 알리미 등의 일을 주면 좋다. 한 선생님은 오늘의 미세먼지를 표기하는 당번을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자그마한 일도 아이에게 성취감을 맛보게 할 수 있다. 무기력한 아이들이 공동체의 참여하며 ‘책임’이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공동체에 기여하고 있다는 느낌은 조금씩 아이들의 심장을 깨우는 역할을 하게 된다.
1년 동안 환대와 격려를 해도 아이가 바뀌지 않을 수 있다. 뭐 어쩔 수 없다. 1년 동안 최선을 다했다면 선생님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것이다. 10년 동안 쌓인 무기력이 하루아침에 해결될 것이란 것도 웃긴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잘못된 접근으로 아이 마음의 빗장을 더 굳세게 닫게 하는 것보다는 나은 일일 것이다.
오늘은 무기력한 아이가 왜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아보았다. 해결책이 부실하다고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어떻게 보면 저 정도의 존중도 사회가 제공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그마한 사랑과 존중이다. 부디 존재로서 사랑받는 아이가 많은 세상이 펼쳐질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