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 서사를 써가는 우리들에게 싯다르타가.
한 연애 유튜버의 방송을 본 적이 있다. 한 시청자가 그에게 물었다.
“20대 초반에 연애를 잘하고 싶은데, 어떤 조언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자 유튜버는 이렇게 답했다.
“지금은 말로 조언을 듣기보다는 밖에 나가 부딪혀보는 게 답이다. 그러니까 그냥 많이 연애해 봐라.”
왜 유튜버는 이런 식으로 말했을까? 평소 다양한 사례를 들어 마치 정답이 있는 것처럼 척척 조언을 내놓던 그는, 이 질문에 대해서만큼은 단순히 “경험해 보라”고 했다. 나는 그 이유가 우리의 삶이 가진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의 삶은 단편적인 지식의 형태라기보다 연속적인 이야기의 형태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모든 서사는 영웅이 마왕을 물리치고 평화를 되찾는 이야기의 변형이다. 싯다르타의 서사도 다르지 않다. 총명한 싯다르타는 집을 떠나 다양한 고통을 겪으며 성장해 나간다. 처음에는 단식을 통해 고통을 경험하고, 이후에는 돈을 만나 쾌락을 배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아이를 통해 집착을 배우고, 결국 이를 극복하게 된다. 그는 처음부터 총명하여 세상에서 배울 대상은 자기 자신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부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러 고난을 겪고 이를 극복해 나간 뒤에야 부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부처로 추앙받는 고타마 싯다르타의 삶조차 이토록 다사다난했는데, 과연 우리의 삶은 어떨까? 나는 전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우리는 싯다르타만큼 총명하지 않기에, 더 많은 고난을 겪을지도 모른다.
현대는 신이 죽은 시대다. 여기서 신이란 예수, 부처, 무함마드 같은 특정 인물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신이란 기존에 존재하던 믿음, 말씀, 혹은 절대적인 가치를 의미한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는 선언을 통해 절대적 가치의 상실을 지적하며, 인간이 이제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종교와 전통이 개인의 삶에 의미를 제공했다. 신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 안정적이었고, 이를 의심할 필요조차 없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발달, 신분제의 폐지, 그리고 교회의 권위 하락 등 사회적 변화는 신의 자리를 황금으로 대체했다.
과거에는 황금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것이 개인의 탓이 아니었다. 신이 그렇게 정해주셨기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신분 상승의 가능성을 열어주었을 뿐 아니라, 그 책임 또한 개인에게 떠넘겼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은 더 이상 운명이 아니라 개인의 탓이 되었다. 그리고 이 책임은 끊임없이 개인을 불안하게 만들며 속삭인다.
“네가 가난한 것은 네 잘못이다. 그러니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서구 중심의 현대 사회는 기독교의 천부인권, 사랑, 믿음이라는 토대 위에 세워졌다. 그러나 지금 그 토대가 무너진 상황에서 현대 사회는 정신적으로 매우 위태로워 보인다. 개인은 자본주의에서 기인한 불안, 실존적 질문, 개인적 고난 등 다양한 시련에 전방위로 노출 돼 있다. 이런 사회에서 개인이 온전함을 유지하려면, 비어 있는 토대를 스스로 채워나가야 한다.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등 실존적 질문들을 스스로 해결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런 지혜는 단순히 책이나 지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 경험을 쌓는 과정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영웅적 서사의 과정을 겪게 된다.
영웅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실수를 하게 된다. 싯다르타조차 그렇게 많은 실패를 겪었는데, 평범한 우리들은 얼마나 많은 실패를 겪을지 상상조차 어렵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고난을 겪고도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과정이 의미 없는 일일까? 해피 엔딩으로 끝나지 않는 이야기는 정말로 의미 없는 이야기인가? 단조로 구성된 음악은 활로 연주할 가치가 없는 노래인가?
단조로운 음악은 때로는 비극적이고 슬프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심오한 아름다움과 울림이 있다.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 이야기가 때로는 실패와 고난으로 채워지더라도, 그것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실패와 고난을 무서워하지 말자. 부러지는 게 무서워, 활을 떠나지 못하는 화살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