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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보 Jul 21. 2024

해외가 처음인 서른이 딸의 일본효도여행 2편

푹푹 찌는 일본, 여름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들어선 김해 국제공항, 첫 시작부터 에피소드 하나를 만들었다. 국제선 출발 게이트를 통과하자마자 갑자기 010으로 시작하는 낯선 번호로 내게 전화가 걸려왔다. 문제가 발생했다는 직감에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수화기 너머의 남자가 딱딱하게 말했다.


“수하물 검사실로 오세요.”


정말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국제선 출발 게이트에 들어서자마자 받은 전화였기에 직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옆문으로 빠져나와 곧장 수하물 검사실로 달려갔다. 분명 걸릴 게 없는데 왜지? 머릿속으로 수십 번 물음표를 그렸다. 한 명만 들어갈 수 있다는 말에 가족 대표로 내가 들어가게 되었다. 직원의 지시에 따라 캐리어를 풀자 익숙한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가 자주 가지고 다니시던 커다란 흰색 보조 배터리였다. 그걸 빼고 나니 직원은 이제 됐다며 가도 된다고 했다. 한 손에 무거운 녀석을 든 채 털레털레 밖으로 나왔다. 문제는 금방 해결되었지만 꽤나 놀랐던지라 안도와 동시에 짜증이 나려 했다. 돌아오자마자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의 아버지의 팔뚝을 내려치며 말했다.


“보조배터리는 기내에 들고 타야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팽팽 조이던 긴장감에서 풀려나니 이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울상을 지었다 웃었다 엉덩이에 뿔이 나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여행이 익숙지 않아 생긴 해프닝이었기에 우리는 그것조차 즐겁다는 듯 웃어넘길 수 있었다.


롯코산 케이블카에서 "우리들 가끔 똥을 할 거야. 미안해"라고 말하는 새들

1시간이 조금 넘는 짧은 비행 후 간사이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 패키지 팀의 첫날을 책임져주신 일본의 버스기사님은 인자한 인상의 할아버지셨다. 그분은 우리가 버스에 타고 내릴 때마다 늘 분주하게 발 받침대를 꺼내서는 내려주셨다. 귀찮을 법도 한 일임에도 늘 웃는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일행 중 나이 지긋한 할머니 두 분이 계셨는데 그 배려를 항상 미안한 얼굴로 고마워했다. 그런 훈훈함이 하루종일 은은한 향수처럼 곁을 맴돌아 기분이 좋았다.


고베의 기타노 이진칸 거리는 외국인 거리라고 불리는 곳인데 100년 된 건물에 스타벅스가 있고 서양식 건물이 유명한 곳이었다. 쓰레기라고는 보이지 않는 거리, 통일된 색감으로 안점감 있고 미적인 건물들이 인상 깊었다. 그래서인지 거리를 걷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 어머니도 이 거리가 마음에 드신 듯 연신 감탄하셨다. 유명한 포토스팟인 스타벅스 앞에서 사진도 찍고 직접 아메리카노를 사 마셔 보기도 했다. 메뉴에서 익숙한 아메리카노를 찾다가 알게 된 사실, 여기에선 카페 아메리카노라 한다는 것이다. 곧 내 차례가 다가왔고 어찌어찌 잘 주문해 먹어 다행이었다. 줄 서서 기다리는 동안 어찌나 초조했던지, 휴. 그래도 이 커피 한 잔에 더위가 싹가시는 기분이었다.


엄마 맛있지?

하루를 함께한 버스 기사님이 마지막 날까지 쭉 같이 해주셨다면 좋았을 테지만 아쉽게도 첫날까지 만이었다. 돌아가신 친할아버지와 닮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할아버지를 떠오르게 하는 좋은 분이셨다. 숙소 근처에 우리들의 짐을 정성스레 내려주실 때 얼른 다가가 말했다.


“아리가또 고자이마스!(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감사합니다.’를 힘줘서 말하는 게 최선이었다. 조금 더 길게 감사함을 표현할 수 없어 아쉬웠지만, 그런 우리의 마음을 아신 걸까? 기사님께서는 활짝 웃으며 인사해 주셨다. 속으로 그의 행운과 행복을 빌었다. 숙소에 돌아와 짐을 푼 뒤, 스케줄에서 자유의 몸이 된 우리 가족은 곧장 도톤보리 거리로 나왔다. 다행히 숙소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라 부모님도 힘들다는 말없이 잘 따라와 주셨다. 기다란 운하의 끝에서 중심으로 천천히 걸었다. 인파가 점점 늘어나 북적북적해진 것이 드디어 도톤보리 중심에 왔다는 것이 실감 났다.


가장 먼저 구글 지도로 찾은 글리코상 전광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큰 과제를 하나 끝낸 기분이었다. 우리는 세상에 갓 태어난 아이처럼 고개를 든 채 시끌벅적한 가게와 전광판,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구경하느라 바빴다. 사람이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조금이라도 한 눈 팔면 서로를 놓칠까 조금만 멀어져도 이름을 불렀다. 이렇게 말하면 죄송하지만, 어린아이를 찾듯 나를 부르던 어머니에 조금 웃음이 나버렸다. 그치만 저 이제 서른이라고요!


운하를 따라 걷던 중 바람에 실려 오는 짭짤한 바다내음이 아버지의 고향인 거제를 떠오르게 했다. 낯선 곳에서 느끼는 익숙한 향기는 많은 인파에 바짝 쫄아 정신없던 우리 가족의 마음을 풀어주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패밀리마트에 들러 미리 조사해 둔 대로 유명한 수플레 푸딩 두 개와 과일젤리, 과자 몇 가지를 구매했다. 또 숙소 바로 근처의 로손 편의점에서는 일본에 오면 꼭 먹어야 한다며 난리가 났던 오하요 브륄레를 샀다.


젊은이들 사이에 유명한 이것들이 부모님 입맛에도 맞을까? 조금 걱정되기도 했지만 수플레 푸딩을 드시던 어머니의 말에 걱정이 싹 사라졌다.



“이거 뭐야? 너무 맛있는데.”

“맛있지? 이게 수플레가 올라간 수플레 푸딩이래.”

“한국에도 안 파나?”

“안 팔지.”

“왜 안 판데.”

우리 가족의 원픽 '수플레 푸딩'

한국에서도 불티나게 팔릴 만한 디저트들인데 아쉬울 만도 했다. 브륄레의 캐러멜 부분을 숟가락으로 부셔 드시던 아버지도 달고나 과자 같은 맛이 난다며 마음에 들어 했다. 이 글을 쓰며 첫날 내가 쓴 짤막한 메모의 문장들을 다시 읽어 봤는데 모두 ‘좋았다’로 끝나 있더라. 그렇게 좋았니? 사실 이렇게 마냥 좋을 수 있었던 것도 다 부모님 덕분이다. 사람들이 여름의 일본은 가는 게 아니라 한다는 걸 뒤늦게 알았었다. 그럼에도 어머니와 아버지는 습하고 더운 날씨에 미간이 찌푸려질지언정 목소리 한 번 높이지 않고, 더워도 좋다고 해주셨다. 여행을 망치지 않기 위한 노력은 나 혼자가 아닌 모두가 하고 있었다.


둘째 날, 비가 온다던 일기예보와 달리, 뜨거운 햇볕이 우리를 반겼다. 조식을 먹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지만 우리 가족은 굉장히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다. 보통 생각하는 큰 뷔페의 화려함은 없었지만 일본 가정식 느낌의 깔끔한 음식들의 맛은 최고였다. 오늘 먹은 아침밥이 일본에서 먹은 첫 끼니보다도 맛있었다고 부모님도 말씀하셨다. 마지막엔 블랙커피까지 시원하게-실제로는 뜨거운- 뱃속에 담으며 배를 두드렸다. 사실 어머니는 남이 차려주는 아침이라 더 좋으셨을지도.

요리를 만들어 주시는 조리사 분들이 수시로 음식을 체크하고 새로 바꿔 주시는 모습에서 높은 직업의식이 느껴졌다. 음식을 반납하는 것까지 일일이 도와주시기까지 친절과 정성이 대단했다. 어떻게든 인사를 드리고 싶어 내가 아는 ‘맛있다’를 말했다.


“오이시이데스!(おいしいです)”


그러자 흰 모자를 쓴 조리사 분께서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감사합니다.)”


내가 외국인이다 보니 짧은 대화였지만 맛있게 먹었다는 생각을 전달할 수 있어 뿌듯했다. 어머니도 내게 ‘잘 먹었습니다.’를 일본어로 뭐라 하냐며 적극적으로 물어보고 연습하셨지만 직접 해보지는 못하셨다. 소통에 적극적이란 걸 알았더라면 미리 조금이라도 알려드릴 걸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동시에 그만큼 다음을 더 잘 준비한다면 더 즐거우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일정대로 후시이미나리 신사와 청수사를 구경하고 자유시간은 유명한 니넨자카, 산넨자카 거리를 구경했다. 일본 현지의 당고가 궁금했던 차에 니넨자카 스타벅스 맞은편에 맛있는 당고집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자유시간의 끝이 임박했던지라 거의 달리듯 걸었다. 어찌어찌 눈에 익은 스타벅스 로고가 새겨진 간판을 발견했고, 그 맞은편에 있던 ‘월하미인’을 찾을 수 있었다. 소스의 윤기로 반짝이는 희고 둥그런 찰떡 세 개가 꼬챙이에 꽂혀 나왔다. 나 한 알, 어머니 한 알, 아버지 한 알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당고에 발린 투명한 갈색 소스가 달짝지근한 것이 조청이 떠오른다는 어머니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낯선 일본에서 느끼는 익숙함들이 퍽 재미있다.






1편에서는 첫 해외여행을 준비하며 느낀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2편은 온전히 여행을 즐겼던 소소한 이야기들을 담았습니다.

다음 편이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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