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병과 나

그래도 좋아질 거예요

그러니까 환자분도 나을 겁니다

by 보보
25.04.02

뇌전증 진단을 받은 2016년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검사와 진료를 받고 있다. 통상적인 진료로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런데 지난겨울 병원에 갔던 날 일기가 노트 한 장을 다 채우고도 넘는 게 특이해 다시 읽고 무릎을 쳤다. 이걸 왜 잊고 있었지?


24년 10월 28일 월요일이었다. 3개월에서 6개월에 한 번 하던 진료 간격은 점점 늘어나 이제는 1년에 한 번 하고 있다. 특별한 건 없고 의사 선생님께 눈도장을 찍고 매일 먹을 약을 지어올 뿐이다 보니 병원 가는 날이라 하면 이제는 나들이 가는 기분이다. 바로 며칠 전에 월급도 탔겠다, 요놈의 돈을 어떻게 쓸까 하는 생각만 가득했다.


진료실에 들어서자 익숙한 중년을 넘어가는 의사 선생님이 우리를 맞이해 주신다. 1년 만에 뵙는 선생님의 모습은 왜인지 야위어 보였다. 간단한 인사와 함께 늘 하던 말을 똑같이 내뱉었다. 그런데 진료실에 같이 들어온 어머니가 참지 못하고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 살이 많이 빠지셨네요.”

“아, 쓸개에 있던 담석을 제거하는 수술을 했더니 4kg이 빠지더군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선생님에게도 많은 일이 있었다. 병이라는 건 그런 녀석이다. 언제 어떻게 우리 일상에 등장할지 예측할 수가 없다. 선생님은 덧붙여 말씀하셨다.


“저도 사람이니까요. 사람 인생이 사는 게 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도 좋아질 거예요.”


그 말에 긍정하듯 우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환자분도 나을 겁니다.”

“네….”


대화를 놔두던 순간 진료실 공간만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병원을 나서고 세 마리에 2천 원짜리 붕어빵을 사 먹으면서도 그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반쪽이 되어버린 선생님에게 날카로움은 없었다, 오히려 더 부드럽고 평온해 보였다. 병을 치료하는 의사이지만 수술을 받은 그는 앞으로 더 좋아질 것이라 확신했다. 그건 의사로서 하는 말이라기보다 먼저 어른 된 사람으로서 하는 말로 들렸다.


책 <모든 삶은 흐른다>에서 읽은 한 문장이 떠올랐다. ‘평온함은 나약함이 아닌 자신감이다’이 선생님의 모습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나를 흔드는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내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주변만 둘러봐도 알 수 있다. 조급한 마음에 말이 빨라지고 소리치고 실수하는 모습 말이다. 그 속에서 평온함을 유지하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는 조용히 남을 배려하고 있다. 그래서 알아차리기 어렵지만 눈치채고 나면 그의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평온한 마음을 가지려 무언가를 더할 필요는 없다. 버리면 된다. 빨리, 완벽하고 완전하게, 남들과 똑같아야 한다는 욕심과 걱정, 그런 것들이 무겁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가볍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인생은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 일종의 마라톤이니까. 선생님도 담석을 제거하며 마음에서 무언가를 함께 덜어낸 것이다. 덜어낸 마음에는 여유 공간이라는 게 생기는 데 거기에 미래를 그린다. 미래를 그릴 수 있는 삶은 건강하다.


처음 뇌전증을 진단받고 다시 건강해졌다고 느꼈던 순간이 그러했다. 건강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그 외의 것들을 내려둔 순간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새 희망이 차오르듯 미래를 다시 기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눈앞이 캄캄했다. 그런데 막상 내려놓고 보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하다. 내가 욕심내던 것들이 실은 그다지 내게 필요한 게 아니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사람 생각이 어떻게 한순간에 이렇게 달라질 수 있나 싶다가도 사람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않나 싶다.


햇수로 9년이 되어 가지만 아직 완치되지 않았다. 그 중간에는 약을 잠깐 끊었다가 재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조급한 마음은 들지 않는다. 나의 나음을 확신해 준 선생님의 말처럼 삶을 더 긍정할 뿐이다. 봄이 되면 볼품없어 보이던 마른 가지에도 새순이 돋아나고 마침내 아름다운 벚꽃을 피워낸다. 아주 잠깐 세상을 분홍빛으로 물들이고는 금방 다음을 기약하며 퇴장한다. 만남은 짧고 기다림은 길디 길다. 하지만 이 기다림의 시간은 기대의 설렘이 될 수도 있다. 나는 더 긴 설렘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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