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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 Sep 13. 2024

전세 사기를 당한 그녀에게 전하고 싶은 위로의 말

- 위로의 말들을 연습 중입니다

연일 '빌라왕'의 뉴스와 '전세 사기로 고민하던 젊은이가 자살했다' 등 전세 사기와 관련된 기사들이 보도되던 어느 날, K가 상담을 왔다. 



K: 제가 지방에서 올라와서 계속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취직해서 모은 돈이랑 전세자금대출을 합쳐서 빌라 전세를 얻었거든요...

이변: 저도 부산에서 올라와서 자취하면서 고생 많이 했는데, 고생 많았겠어요

K: 기숙사 살다가 나와 사니까 엄청 좋았는데 몇달 전에 집주인이 전세 사기로 구속됐어요... 뉴스에서 XX 빌라왕 보셨어요? 그 사람이 저희 집주인이에요... 전세 만기가 됐는데 보증금을 못 받고 있어서 소송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이변: 정말요? 못받으신 보증금이 얼마인가요? 

K: 3억이요...

이변: 네? 그 동네 전세가 그 정도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 보증금이 왜 이렇게 비쌌어요? 

K: 2년 전에 전세 대란이라 전세가 없어서 겨우 구한 거거든요. 전세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들어간건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20대 초반의 사회 초년생에게 3억이라니 절망감이 어느 정도일지,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가늠도 되지 않아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변: 전세기간 만기가 되었는데 집주인이 전세 보증금을 돌려 주지 않는다면, 집주인에게 "임대차보증금 반환청구 소송"을 할 수 있고, 또 당연히 승소할 수 있어요. 

다만, 소송에서 승소하더라도 집주인에게 돈이 없다면 그 집에 대해 경매신청을 해서 낙찰대금을 통해 보증금을 돌려 받아야 해요. 이 경우 시간이 많이 걸릴 수 있고, 또 낙찰대금이 보증금보다 적으면 보증금 전부를 돌려받을 수는 없어요

K: 네, 이 집에서 계속 버티면서 기다려 봐야죠... 소송을 빨리 진행해 주세요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자마자 사회의 쓴 맛을 본 K에게 '세상에 나쁜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살다보면 다 지나간다'는 손쉬운 위로를 건네고 소송을 진행하게 되었다. 


되도록 K에게 판결문을 빨리 안겨주고 싶어, 상담이 끝나자마자 소장을 작성하고, 제발 판사가 빨리 판결을 내려 주길 기도하면서 소장을 접수했다. 


다행히 몇 개월 만에 K의 승소로 사건이 마무리되고 판결문을 K에게 전달하는 날. 

K는 나에게 '도와줘서 진심으로 고맙고, 본인이 변호사님의 액땜을 대신 해 준 것으로 칠테니 평안한 일들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건넸다. 


판결문으로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고, 보증금을 받기 위한 긴 여정의 첫 발을 뗀 K가 위트있게 건네는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이럴 때 평범한 변호사는 도대체 어떤 말을 건네야 할까.


'좋은 일만 있을 거에요?', 이 말은 귀에 안 들어올 것 같고,

'액땜했다 생각하고 잊으세요?', 액땜치고 너무 손해가 큰 것 아닌가 싶고, 

'기도할게요?', 종교도 없는데 거짓말 같고, 

'투자하는 것마다 대박나세요?', 너무 세속적인가...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면, K의 마음을 다정히 다독이며 용기를 줄 수 있을까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나는 아주 심심한 말을 건넸다. 


"어떤 위로의 말을 해도 부족할 것 같네요. 진심으로 앞날을 응원할게요"



사진: Unsplash의Guille Álvarez



사실 K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이러했다. 


20대때, 한강변의 어느 공원에 놀러간 날이 있었어요. 

공원에서 나와 지하철역으로 가는데, 마침 '빌라 분양'이라는 광고판이 보이더라구요.

전날 뉴스에서 한강변이 천지개벽한다는 걸 본지라 '운명이다' 라는 생각에 부동산에 들어갔죠. 

부동산에 들어가니, 마지막 남은 집인데 계약만 하면 대박이라고 그래서 홀라당 계약을 하고 나왔죠. 


알고보니 그게 '지분 쪼개기'라는 거더라구요. 

3억을 주고 오래된 단독주택을 사서 부수고, 빌라 건물을 지어 1억 씩 여러 명에게 분양을 하면 돈을 많이 벌겠죠? 

대신 그 동네는 오래된 주택들이 사라지고 새 건물들이 생기면서 재개발을 할 수 없게 되고, 땅 주인도 많이 늘어나면서 개발이 점점 어려워지는데 이런 걸 '지분 쪼개기'라고 부르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죠. 


그 빌라는 팔리지도 않고, 가격은 떨어지고 제 마음 속의 짐이었어요. 

몇 년만에 겨우겨우 싸게 팔아서 정리를 했죠. 



그렇다면 저는 지금 그 빌라 때문에 거지가 되었을까요? 


그 빌라 덕분에 저는 묻지마 투자가 뭔지 알게 되어서 재테크를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 되었구요, 

그 빌라 덕분에 저는 남의 말에 휘둘려서 투자를 하지는 않게 되었어요, 

그 빌라 덕분에 어렴풋이 재개발을 알게 되어 재개발과 재건축에 투자해 꽤 돈을 벌었어요. 

그 빌라 때문에 손해를 보았지만, 그 손해보다 큰 이익을 번 사람이 되었죠. 



분명 전세 사기를 겪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거에요. 

저도 그때 그 빌라를 사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겠죠. 

그래도 인생은 계속되니까요, 

몇 년 뒤엔 그 일이 비극적인 일생일대의 사건이 아니라 저처럼 그냥 이런 해프닝도 있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거에요. 


지나간 날들로 인해 K가 좌절하기 보다는 성장하길 기도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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