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두 사실은 자연히 맞물려 언젠가 '전문 서적'을 한 번 출간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한 병원의 원장, 두 어린아이의 아버지, 그리고 한 여인의남편이라는, 여러 책임을 가진 이름으로 살아가는 일상 속에 '글쓰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만약 나의 제한된 시간 속에서, 단지 몇 개만의 제대로 된 글을 쓸 수 있다면, 그것이 오직 전문가 집단에만 읽히는 책이고 싶지는 않았다. 널리 읽힐 수 있는 책. 하지만 지식 선점자의 위치에서 단지 전문 지식을 적당히 쉽게 풀어내어 보여주기 식은 아닌 책. (세상에는 이미 각 분야의 지식 선점자들이 넘쳐나고 이런 종류의 책들도 넘쳐난다.)
어렵다.. 욕심일까..
내가 속한 전문가 집단(피부과 전문의)들에게도 무릎을 탁 치게 하는 영감을 줄 수 있는 전문성을 지닌 내용이면서도 일반인들 역시 즐겁고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주제가 나에게 있을까. 사실 이런 고민도 하기 전에 이미 책을 써보고 싶은 주제가 있었다.
'여드름 짜기'.
내가 다소 비정상적으로(다른 피부과 전문의들에 비해) 집착하고 있던 주제였고 한 번쯤은 세상에, 피부과 학계에 내놓고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였다. 단지 이 주제가 위에서 설명한 조건에 부합하는 주제인지를 다시금 돌아보았을 뿐이다.
다행이다.
(물론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겠지만) 위 조건에 더할 나위 없이 들어맞을 수 있을 것도 같다. 여드름 짜기란 지극히 일상적이며 사소하다. 손톱과 여드름을 가진 사람 치고 여드름 짜기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저자의 두 손모가지를 건다고 하여도 소중한 두 손을 잃을 걱정은 하지 않을 것 같다. 의료적 시술 중에서 이토록 아무런 두려움 없이, 서슴지 않고, 비 의료인에 의해 시도되고 또 많이 행해지는 시술이 또 있을까? 심지어는 자신의 여드름을 짜는데 자기만의 노하우를 만들어 자신이 가장 전문가라(적어도 자신의 피부에 있어서는) 혼자 자부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는데도 기꺼이 손모가지를 걸 수 있다. 이것은 자꾸 손모가지를 거는 나의 배포 두둑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만큼 여드름 짜기는 비전문적일 수 있는 대중적인 주제라는 말이다.
피부과 전문의들에게 여드름 짜기는 매우 중요하면서도 무척 천시를 받는, 모순을 가진 시술이다. 환자들의 치료 결과와 명확히 연결되지만 피부과 전문의들 아무도 깊게 공부하거나 심지어 직접 시술하려고 조차 하지 않는.... 그렇기에 피부과 전문의들에게도 논쟁과 이야깃거리가 되는 전문적인 주제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여드름(을? 의?) 짜기의 예술’이란 뭔가 어법에도 맞지 않는 이 제목을 고집한 것은 여드름이라는 핵심 키워드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또한 '예술'이란 단어도 꼭 사용하고 싶었던 나의 욕심 때문이다. 사실 ‘예술’이란 단어보다는 이전에 재미있게 보았던 한 영화(포드 v 페라리. 뒤에 한 번 더 소개할 일이 있을 것이다)에서 나온 대사인 ‘perfect lap’ 이 내가 붙이고 싶은 진짜 제목이었긴 하다. 하지만 도저히 이 의미를 전달하긴 어려워 내 기준에 가장 가까운 ‘예술’이란 단어로 대치하였다. 결국 하잘것없어 보이는 여드름을 짜는 과정에서 조차 완벽히 이를 수행할, 그리고 추구할 목표 단 하나, 궁극의 포인트, 결국은 '예술'이라 부를 수 있는 경지가 있다는 것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 책은 비교적 의학 전문 서적의 관점에서 쓰일 것이다. 분명 이 책을 읽을 어떤 피부과 전문의들은 이 책에서 어떤 공감과 영감을 얻고, 한 번 같은 방향을 추구해 보자는 생각을 갖게 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나도 이미 알고 있다. 전문 의학 서적이라 칭하기엔 주제가 한없이 가볍다. 아무리 ‘압출'(extraction)이라는 전문 용어 비슷한 것을 가져다 붙여도, 결국 이것은 인류의 시작(손톱과 여드름 둘을 모두 가지고 있던 선조 그 누군가. 아마도 아담으로부터 3대 이내의 누군가일 거라는데 내 손목을.... 아니 그만하자.)부터 지금까지 너나 나나 일상에서 수시로 해왔던, 바로 그 ‘여드름 짜기‘일 뿐이다. 어쩌면 이도 저도 아닌 책이 될 가능성도 있겠지만 일단은 대중들이 이 친숙한 소재를 통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시작을 한다. 요즘 말로 ‘알쓸신잡’을 즐길 수 있다면 충분하다.
그리고 사소한 데 목숨을 거는, 사소한 데에 짐짓 얼굴 굳히고 진지하게 설명하고 앉아있는 어떤, 이상한 피부과 전문의를 보는 재미를 느낀다면 내가 이 책에서 노리는 바다. 최종적으론이 책을 읽은 (피부과 전문의가 아닌) 누군가에게 "아.. 여드름 짜기가 이런 거창한 것이었다니.. 함부로 여드름을 짜는 건 무모한 것이었군..."이란 생각이 든다면 그곳이 내가 이 책을 통해 가길 바란 그 어딘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