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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디 Oct 21. 2021

2. 여드름 짜기는 왜 천시(賤視)되는가

뽀대, 생산성, 고통, 천시, 그리고 성공률.

여러모로 살펴봐도 여드름 압출은 의사들에게 천대, 외면받기 딱 좋은 시술이다. 서구권(소위 선진국)에서도 많이 하지 않고, 학술적인 느낌도 없고, 뽀대도 나지 않고, 시간도 많이 잡아먹는 데다, 수가도 받기 힘들다.


개원 초기 믿고 따르던 선배 형이 해준 조언이 생각난다. "여드름 치료는 노동 집약적인 산업이야.  너의 노동이든, 관리사의 노동이든. 노동 집약적 산업은 미래가 없다. 여드름보다는 탄력, 노화 쪽을 해야 돼."  개원 초기, 10년 전에 이런 말을 들을 정도였다면?? 지금은 안 봐도 비디오다. 굳이 최저 시급, 인건비 상승률을 논하지 않더라도 시간과 노동력을 천으로 하는 '여드름 짜기'라는 시술이를 수행해야 하는 의사들에게 전혀 매력적일 수 없다.


나는 환자들에게 “피부과에서 하는 시술 중 가장 아픈 치료가 여드름 짜기예요"라 설명하곤 하는데 이 '고통'이란 부분 역시 여드름 짜기를 꺼리게 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의사가 되어 알게 된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환자의 고통에 둔감해질 때 그 시술에 대한 숙련도가 현저하게 높아진다는 것이다. 처음 의사가 되어 인턴을 돌 때 처음 배운 L-tube(콧줄) 넣기, 배뇨관(소변줄) 넣기, 손목 동맥 채혈 같은 시술들을 시도하던 초창기, 환자들은 매번 자지러지듯 고통스러워했다. 나의 손은 그 고통을 따라 주저하고 망설였는데 , 그러한 환자 고통에 대한 공감은 오히려 망설임 섞인 어설픈 손놀림으로 환자를 더욱더 고통스럽게 했다. 하지만 환자에 대한 긍휼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초인적인 스케줄로 돌아가는 인턴 시절의('라떼' 인턴이야기는 밤을 새워서라도 할 수 있지만  ㅋ) 부족한 시간, 부족한 잠, 무서운 불호령들은 환자의 고통에 공감할 시간을 반강제로 빼앗아갔다. 환자의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매정하지만 주저함 없고 단호한 손놀림은 오히려 빠른 성공으로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보여주었다. 이런 경험 이후, 나는 새로운  시술을 익히게 될 때마다 환자의 고통에 둔감해지려 노력해왔다.(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술을 완벽하게 익힌 후에는 그 고통에 다시 공감하고 긍휼의 마음을 가진 자리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것이지만..)


하지만 아무리 환자의 고통에 무심한 냉혈한 의사가 되어 보려고 심장을 10년 이상 단련해왔다 해도 환자가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의사에게 큰 부담이다. 환자에게 수면 마취를 잘 권하지는 않지만 고통스러운 시술을 할 때 환자가 먼저, 스스로 수면 마취를 원할 때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 숨을 쉬게 되는 것은 의사 면허를 딴지 21년 차인 의사에게조차 환자의 고통은 여전히 큰 부담이란 것을 증명한다.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했지만 그리 대단치도 않은(?) 여드름 짜는 일 따위로 환자의 고통스러운 표정과 마주하고 신음소리, 원망을 들어야 하느니 안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여드름 압출이 천시받고 있다는 사실은 비단 의사들의 태도뿐 아니라 환자들의 태도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프롤로그에 여드름 짜기는 인류의 역사와 그 시작을 함께 했을 것이라 이야기했지만 이는 단지 과장된 농담이 아닐 것이다. 성인 치고 손으로 얼굴의 여드름 한 번 안 짜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드름과 발생 원리는 비슷하지만 그 누구도 '다래끼'를 스스로 시술해 보려 시도하지는 않는다. 그 누구도 치통이 있을 때 발치를 스스로 해보려 시도하지는 않는다. 그만큼 여드름 짜기는 누구나 시도하는, 사소하고 일상적이며 천시(여기서의 천시라는 표현은 전문적인 기술로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의미이다)되는 의료  행위이다. 그 어떤 의사도 환자들 조차 천시하는 의료 행위를 좋아할 리 없다.


여드름 짜기가 의사들에게 천시받는 이유를 여러 가지로 이야기해 봤지만 사실 가장 깊숙이 숨어있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완벽하게 해낼 자신이 없어서'가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랬다.


완벽한 여드름 짜기. 완벽하게 면포, 농, 손상된 조직들이 배출되고 살아있는 조직에는 아무런 손상을 주지 않는 완벽한 '여드름 짜기'! 성공한다면 적어도 그 여드름 병변은 바로 가라앉기 시작하여 자국이나 흉터 없이 사라질 것이다. 다시 곪아 오르거나 (2-3주가 지나도 없어지지 않는) 여드름 자국을 만드는 일이 절대 없을 완벽한 '여드름 짜기'! 그리고 시술 시간도 빠르고 환자도 덜 고통스러워 하기까지 한, 상상 속에나 존재할 그 완벽한 '여드름 짜기'를 할 수만 있다면... 위에 열거한 그 어떤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드름을 짤 것이다.


왜? 어떤 여드름은 반드시 짜야만 낫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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