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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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의 글방

태풍이 지나가는 길에 서있다. 요란스럽던 태풍의 흔적들이 사방에 가득하다. 떨어진 간판들, 풍선처럼 긴 끈을 달고 날아다니는 현수막, 부러진 고목들의 아우성이 도로에 낭자하다. 날카롭게 드러난 나무들의 커다란 살점들이 나를 찌를 듯 겨냥하고 있다. 빗물에 엉킨 나뭇잎들이 사방에 흩어져 짓밟혔다.

지난 밤, 작은 점하나로 만들어진 바람이 거대한 회오리가 되어 세상을 흔들어댄 흔적들이다. 어둠은 작은 바람 하나를 낚아 채어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분신을 만들어 세상을 흔든다. 회오리가 된 태풍은 밤의 기운으로 충만해진다. 세상에 갇힌 모든 것들을 끝내 버릴 듯 울부짖는다.


우리 삶의 한 귀퉁이에서도 시시때때로 태풍은 불어댄다. 인생의 길목에서 불어대는 태풍을 한번쯤 겪어보지 못한 이는 없을 것이다. 언제 어느 때 불어 닥칠지 모를 태풍이다. 요즘은 과학이 발달해 예측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태풍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준비한다 해도 피해 갈 수는 없다.

실오라기 같은 바람 한줄기가 바다의 더운 기운과 차가운 기운의 에너지를 받아 태풍이 된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의 일상에서도 태풍은 언제나 때를 노리고 있다. 스쳐가는 작은 우울한 기운들을 심연 깊숙한 곳에 축적하며 거대한 회오리를 준비 하고 있다. 살랑거리는 작은 바람의 부드러운 애무에 속아 감지하지 못 할 뿐이다. 지금은 작은 바람으로 돌아간 나의 유년에 휘몰아쳤던 거대한 회오리를 찾아 떠나본다.


단칸방의 백열등 전구를 흔들던 작은 바람이 보인다. 희미한 불빛아래 술 취해 누워 있는 아버지를 스치던 바람을 만났다. 아버지가 영원히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람에게 나는 소곤거렸는지도 모른다. 하루도 술을 입에서 떼지 않았던 어둠의 그림자가 흔들리는 백열등 희미한 불빛아래 흐늘거렸다.

처자식을 두고도 입에 풀칠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아버지를 나는 용서할 수 없었다. 걸스카우트를 하고 싶어도,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도 나는 말을 삼켰다. 흰 쌀밥에 계란을 얹은 친구 도시락을 바라보며 슬그머니 보리밥 도시락을 숨기며 아버지를 원망했다.

밤새 태풍만큼이나 쿵쾅거렸던 작은 단칸방. 술 취한 아버지는 일에 지친 엄마에게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걸어 시작된 태풍은 밤새 집안의 물건들을 부서지게 했다. 미명 속에 엄마의 흐느낌으로 태풍은 지나가고 있었다. 거대한 태풍이 휘몰아치는 밤들은 끈질기게 오랫동안 우리 집에 불어 닥쳤다.


태풍이 지나간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언덕을 향해 달렸다. 온몸을 애무하는 바람 은 부드럽고 시원했다. 회오리를 떠나보내고 남은 바람은 부드럽게 나를 감싸주었다. 누런 벼가 익은 들판이 보이는 언덕은 간밤의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딴청을 부리며 평온히 하늘거렸다.

회오리는 밤의 악몽을 감싸 안고 항상 먼 곳으로 떠난다. 어둡고 요란스러웠던 기억을 잊고 바람과 함께 떠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큰 바위 언덕에서 두 팔을 벌리고 눈을 감았다. 세상을 자유로이 다닐 수 있었던 바람을 동경한 내 모습이 보인다.


바람은 알았을까. 술에 취해 널부러져 있던 아버지가 차라리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내 마음을. 아버지는 결국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하늘로 가버렸다. 마음의 소망이 현실이 되어 아버지의 죽음은 갑자기 찾아왔다. 두 개의 화초를 두고 원망의 말과 사랑의 말을 할 때 원망의 말을 한 화초가 죽었다는 실험이 있다. 내 원망이 죽음의 에너지가 되어 아버지를 덮었던 것일까. 나 때문이라는 죄의식...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감당하기에는 벅찬 두려움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


태풍이 지나간 아침, 바람의 언덕 큰 바위에 서 있는 나에게 바람은 속삭였다. 괜찮다. 이곳은 세상의 시작일 뿐 끝이 아니라 얘기하는 듯했다. 죽음의 몫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라고.

바람은 사막의 모래 회오리를 일으킨 얘기를 들려주었다. 수많은 이들이 죽어간 머나먼 땅의 이야기였다. 신들의 전쟁 속에서 모래 회오리 기둥으로 모래언덕 무덤을 만들고 왔다고 했다. 기나긴 역사의 전쟁 속에서 사막을 떠돌다 죽어간 이들을 수 없이 묻고 이곳에도 찾아 왔다고. 그렇게 시간은 돌고 돌며 인생의 수레바퀴 속어딘가에서 멈출 것이라 말했다. 나의 원망과 회한도 돌고 돌아 내 마음 속 무덤 어딘가에 자리 잡고 고요히 가라앉을 것이라고 위로했다.

태풍이 지나간 뒤에 찾아오는 평화는 신이 의도한 행복일까. 태풍은 여명이 비치면 힘을 잃고 평온하고 부드러워진다. 다시 바람이 되어 세상을 달래준다. 지구의 숨겨진 구석구석을 다니며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다. 독이 가득한 양귀비에게도 생명을 준다.

큰 바람이 지나간 나의 집에도 평화로 가장된 고요가 찾아왔다. 바람 한 점 없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나날들은 적막했다. 무기력해진 하루 속에 알맹이 없는 대화만 오고 갔다. 미워하고 원망할 대상의 부재는 평화가 아닌 쓸쓸함이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남은 가족들이 항로를 잃은 배처럼 일상을 표류하고 있었지만 평화였다.


지금 아버지의 언덕에서 바람을 만난다. 오래된 호수를 빙 둘러싼 아늑한 언덕에 아버지는 자리 잡았다. 인간의 삶에서 누려보지 못했던 따뜻한 햇살아래 누워있다. 희미한 백열등 불빛의 쾌쾌한 냄새가 가득하던 단칸방은 잊었겠지. 누런 사막의 모래 언덕 무덤 속에 묻혀 있는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시간도 돌고 돌아 아버지의 시간 위에 서 있다. 가슴에 맺힌 서러움도 원망도 바람을 따라 떠나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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