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위의 작품으로 엿보는, 영화라는 예술의 매력

2021년 4월 29일의 글

by 육육삼의 삼삼칠

어떤 영화가 좋은 '영화'일까?


다분히 꼰대적인 발언을 하자면, 나는 영화의 러닝타임이 시종 화려한 CG와 내내 눈을 뗄 수 없는 기술의 성찬으로만 이루어진 영화는 좋은 영화가 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영화 스스로 자신의 특수효과의 화려함을 과시하려 하거나, 크게 영화의 기술적인 파트로 묶일 수 있는 편집, 연기, 촬영 등의 요소만을 내세우며 되려 양두구육과 자가당착에 빠진 많은 영화들을 보면서, 과연 이들을 두고 좋은 영화 혹은 훌륭한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질문을 살짝 틀어, 영화적인 것이란 무엇일까?


영화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은 무엇일까. 나는 이미지와 이미지의 충돌로서 생겨나는 정서, 혹은 하나의 이미지 안에서 생겨나는 '리듬과 생동감'이라고 생각한다. 영화가 내러티브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면 영화는 결국 문학의 아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예술로서의 가치를 가지기 위해선, 내러티브에만 집착하는 태도는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영화를 뜻하는 Movie(Moving Picture의 준말), 혹은 Motion Picture라는 단어의 정의가 그러하듯 영화는 운동하는 세상의 이미지를 포착하고, 혹은 가공과 편집을 거침으로 탄생한 이미지들의 총합으로 생겨나는 정서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매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는 내가 타르코프스키와 테렌스 맬릭,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오즈 야스지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오늘 이야기에 중점이 될 왕가위라는 감독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왕가위라는 거장을 향해 무한한 애정과 추앙을 바치는 글이기에, 광신도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종 편향된 시선을 굽히지 않을 작정이다. 많은 이들이 이 글을 읽고 나와 온전히 같은 생각을 가지길 기대하진 않지만 그저 한 명의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봐 주고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번쯤 가져 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는 만족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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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정서와 태도는 수 십 년 전과 현재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는 영화와 같은 예술을 향유하는 태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시대적 이념의 한계로 인한 차이는 존재하겠지만 (이를테면 초기 서부극에서 백인과 원주민을 선악의 이분법으로 정의한 것은, 현재의 시선에선 일반적이지 않으며 당연히 문제시될 테니까.) 이를 차치한다면, 나는 인간의 보편성을 제법 신뢰한다. 인간은 누구나 멜랑콜리해질 때가 있고 누구에게나 고독한 감정이 있으며, 누구나 힙해질 때가 있고 키치해질 때가 있지 않던가.


위와 같은 여담을 한 이유는, 이제는 하나의 사조와 문화로 기억되는 홍콩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홍콩 영화에 대해 "유치하다", "오글거린다"라는 평들을 하곤 한다. 그런데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고 싶은데, '힙'하고 '쿨함'이 미덕으로 인정받는 동시에 한편으론 이러한 태도를 취하기를 강요받기도 하는 작금의 흐름 속에서 많은 이들이 자신의 감정과, 이를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 꽤 솔직하지 못한 것은 아쉽게만 느껴진다.


내가 홍콩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인간이 겪는 사랑, 후회, 우정, 허무 같은 감정들을 때론 사실적이고 때론 은유적으로 표현해 낸 시대의 영화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상술했듯이 이러한 감정들이 단지 특정 시기에만 공감하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들이 아닌, 시대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공감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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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게 이야기하자면 나는 영화의 장르는 크게 판타지와 다큐멘터리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비현실적인 외모의 주인공들이 운명적인 사랑을 하며, 지구의 영역을 아득히 초월한 세계에서 전 우주의 운명을 두고 대결을 펼치며, 모든 것이 호쾌하게 폭발하는 동시에 절대적으로 안전한 주인공의 액션이 즐비한, 영화라는 장르의 큰 축 중 하나는 분명 판타지다. 다른 한 편에선 인위적인 설정과 조작을 최대한으로 배제하여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거나, 제법 진중한 태도로 관념과 가치를 탐구하며 삶에 대한 성찰을 유도하는 '다큐멘터리적' 영화들이 있다.


왕가위는 가장 판타지적인 작법을 통해 다큐멘터리적 주제를 전달하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를 보다 보면 그 숨 막히는 영상미와 연출에 다분히 비현실적인 느낌을 받으면서도, 영화의 중심에는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들 혹은 아름다웠던 공간과 순간에 대한 인간적인 그리움의 정서들이 가득 담겨 있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두고는 "스토리가 빈약하다."라는 비판이 주를 이룬다. 왕가위의 팬으로서 변호를 하자면 왕가위는 스토리를 못 만드는 게 아니라 안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왕가위는 관객이 영화의 내러티브에 시종 끌려다니는 소극적인 감상을 하게끔 유도하는 감독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건과 수많은 설정들을 기억하고 쫓기에 바쁜 관객에게, 영화의 정서를 음미하고 능동적인 감상을 즐길 여유는 없을 것이다. 왕가위가 진정 원하는 것은 서사가 아닌 서정이다.


나는 왕가위의 영화는 '멜로 영화'가 아닌 '사랑 영화'처럼 보인다. 왕가위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구구절절 풀어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생략과 암시, 때로는 불친절한 흐름을 통해 사랑의 감정을 오롯이 응시한다. 왕가위는 다큐멘터리가 그러하듯, 기록의 영화를 만들어낸다. 그의 영화에선 현재보다 과거가 중요한 듯 느껴지며, 홍콩의 가장 찬란했던 시절과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절을 프레임 속에 봉인하는 방법으로 영화를 만들어냈다. 이에 대해선 밑에서 조금 더 이야기해 보자.



영화라는 종합 예술에서 왕가위의 작품 세계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다, 시간과 공간. 왕가위는 흘러가 버린 시간 속의 침전된 감정을 응시하며 스쳐가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눈부시게 포착하여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는 방법을 스크린 안에 구현한 감독이다.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 과거이며 지나간 순간은 이미 과거에 머무르기에 왕가위는 순간의 강렬한 감정을 늘리고 확장시켰으며, 그렇기에 우리는 그가 사로잡은 시간 속으로 언제든 되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왕가위는 세상에서 공간을 가장 잘 이용하는 감독 중 한 명이다. 놀라운 것은 왕가위의 영화를 보면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공간은 사실상 또 한 명의 인물처럼 기능한다는 것이다. <아비정전>에서는 1960년대 홍콩의 좁고 습습한 공간을 빛과 그림자의 미장센으로 채색하며 고립된 인물의 내면을 그려냈다. <중경삼림>에서의 벙찌는 대사들은 그저 양조위의 내면을 은유하는 집에서의 감정일 뿐이다. <동사서독>에선 고비사막으로 건너가 황량하고 망망한 대지를 프레임 안에 가득 담았으며, <춘광사설>과 <화양연화>에선 지극히 '시네마틱'한 압축의 공간 속에 인물들을 가두고 끊임없이 그들을 접촉시켰다.


추가적으로, 왕가위는 선곡 센스가 가장 뛰어난 감독 중 한 명이다. 비단 오리지널 스코어가 아니더라도, 전혀 다른 스타일의 음악을 그의 영화에 끌어들여 독창적인 재해석을 보여주며 관객에게 강력한 각인을 시킨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왕가위의 영화를 본 뒤 "내용은 기억이 하나도 안 나지만 음악은 계속 귀에 맴돈다."라는 식의 후기가 차고 넘친다. <아비정전>에서의 'Always in my heart'나 'Maria Elena', <중경삼림>에서의 'California Dreaming'과 '몽중인', <춘광사설>에서의 'Finale'와 'Happy together', <화양연화>에서의 'Yumeji's Theme'와 'Quizas, quizas, quizas' 같은. 왕가위는 음악만으로도 분위기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센스가 탁월하다.


영화라는 종합 예술에서, 그가 가져온 음악과 그가 선택한 공간은 왕가위라는 거장의 우주에서 재탄생한다. 시간, 공간, 음악이 모여 만드는 왕가위의 정서는 그렇기에 유독 특별하고 독창적이다.



최근 크리스토퍼 놀란의 <테넷>으로 인해, "이해하지 말고 느껴라."라는 문장이 유행했었다. 이 구절을 왕가위의 영화에게도 적용시키고 싶다. 왕가위는 자신의 영화를 의도적으로 어렵게 만들지 않는다. 그는 플롯과 전개를 의도적으로 꼬아놓기를 즐기지 않으며, 엇갈리는 해석을 관객에게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의 영화에서 느닷없이 장국영이 맘보춤을 추면 그저 홀린 듯 즐기면 되고, 난데없이 이과수 폭포가 등장하면 눈앞의 압도적인 이미지를 받아들이면 된다. 우리는 영화가 흘러가는 대로 받아들이며 아련하고 강렬한 감정에 오롯이 몰입하면 된다. 해석은 평단의 몫이다. 혹은 왕가위와 사랑에 빠지게 될 당신의 몫이다.


<택시 드라이버>의 촬영 감독인 마이클 채프먼은, 영화는 가까운 과거의 고고학이며 이를 그려내는 것이 바로 영화가 하는 일이라고 이야기했다. 러시아의 전설적인 거장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의 저서 [봉인된 시간]에서 영화라는 것은 시간을 봉인하는 예술이라 이야기한 적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모든 영화는 관객이 보고 있는 이미지를 확장하는 그 영화의 세계, 논리 그리고 촉감이 있어야 한다."라고 이야기했다.


왕가위의 영화가 하는 일 역시 그러하다. 왕가위는 그의 영화에서 홍콩의 가장 찬란했던 시절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홍콩의 화양연화를 가장 영화적으로 스크린에 전시하고 보존한 감독이었다. 나를 포함해 그의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이 가 본 적 없었던 도시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또한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었던 시간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느꼈다는 감상은 단지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