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엔틴 타란티노: Alternative Cinema

2023년 5월 31일의 글

by 육육삼의 삼삼칠

※글에는 타란티노의 작품들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린 메인스트림을 지양했어요. 여러분이 기억해야 할 한 가지는, 너바나는 메인스트림에 다가가지 않았고, 메인스트림이 너바나에게 다가왔다는 겁니다."

(2014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식. 너바나의 기타리스트 크리스 노보셀릭)


분명한 마니아층을 얻었지만 상업적 성공은 미미했던 2년 전의 데뷔음반 <Bleach> 이후 1991년 9월 24일, 너바나는 정규 2집 앨범 <Nevermid>를 전 세계에 공개함으로써 대중음악의 판도를 영원히 한 번 뒤집어버린다. 비슷한 시기인 1992년, 비디오 가게 점원 출신이었던 한 젊은 영화광은 영화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데뷔작을 내놓으면서 선댄스 영화제를 비롯 영화계의 기성세대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80년대 홍콩 느와르에 대한 오마주가 가득 담긴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이었다. 혹자는 <저수지의 개들>의 등장을 (흔히 영화의 시작이라 알려지는) <열차의 도착>과 비교하기도 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994년, '영화는 문학의 아류'라는 의견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듯 파격적인 플롯과 예측 불가능한 순간들이 담긴 영화 <펄프 픽션>을 들고 나오며 타란티노는 갓 서른을 넘긴 나이에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손에 쥐게 된다.


락의 역사에서 너바나가 차지하는 위상을 영화사에서 쿠엔틴 타란티노의 위상과 비교할 수 있을까. 영화계에서 쿠엔틴 타란티노의 이름은 곧 대중음악계에서의 너바나의 이름처럼 '반골'의 뉘앙스를 지니는 것 같다. 분명히 쿠엔틴 타란티노는 메인스트림을 거부하며 나타났다. 관습을 깨부순 혁신이라는 단어가 그의 이름을 보면 떠오른다. 신비할 정도로 그의 생명력은 어떤 현역의 거장보다 밝게 빛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그의 데뷔가 이젠 30년도 더 지났기에 그라는 이름과 그의 스타일이 여느 메인스트림보다 더 메인스트림의 위력을 가진 듯 느껴진다. 그렇기에 그 '쿠엔틴 타란티노'라는 이름으로 인해 생겨나는 논의를 주목해 볼 만하다. 도대체 타란티노의 영화에는 무엇이 있기에, 그는 마이너리티의 재료를 가지고 메인스트림에 위치할 수 있었을까.


회고라는 단어가 어울리지도 않을 정도의 가까운 과거이지만, 과거를 돌이켜 보면 내가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에 처음 매료되었던 이유는 그의 탁월한 오락성 때문이었다. 지금껏 본 적 없었던 폭발적인 액션, 타협 따윈 없을 것만 같은 표현 방식 등 강렬한 외피적 무언가에 이끌려 그의 영화들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하니 그의 영화가 그러한 표면적 쾌감으로만 소비되기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그의 영화에서 무언가를 놓쳤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타란티노란 이름이 가지는 거대한 아우라에 대한 호기심과 한 예술가가 만들어낸 세계를 향한 무한한 가능성을 인식함으로써 그 지점에서부터 나와 타란티노의 두 번째 만남은 시작되었다.



영화에는 '영화 5분의 법칙'이 있다. 첫 5분에 관객을 사로잡아야 그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다는 것이다. 물론 비단 경제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한 영화의 극초반 장면은 영화의 목표와 태도를 관객에게 소개하는 첫 장면으로서의 중요성을 지니기에 많은 감독은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 굉장한 공을 들인다.


그러나 쿠엔틴 타란티노는 스스로의 데뷔작부터 그러한 상식과 관객들의 기대를 비틀어버린다. <저수지의 개들>의 오프닝을 떠올려 보자. 두서없이 잡담과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검은 양복의 사내들을 '다분히 의미심장한' 카메라워크로 긴 시간 담지만, 이 시퀀스는 정말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야기와 어떤 관련도 없는 그야말로 잡담이다. 효율성을 따진다면 폐기처분해야 할 이 시퀀스를 데뷔작의 첫 시작으로 넣은 것은 타란티노의 명백한 의도다. 앞으로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중요한 페이지로 남을지도 모르는 '데뷔작'의 '오프닝 시퀀스'를, 말 그대로 의미 없는 헛소리로 채워놓았다는 것은 생각해 보면 꽤나 충격적이면서도 대담한 선택이다. 영화 언어와 영화적 기능에 대해 능통한 인물이었기에, 효율적이고 관습적인 장치들을 재기 넘치게 비틀 수도 있었던 것이다. 과장을 담아, <저수지의 개들>의 오프닝은 자신의 영화 인생이 이러한 관습들에 저항하고 이를 전복시키는 혁명의 역사로 쓰일 것임을 선언하는 순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타란티노는 전복과 대체의 모티브를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내내 담아냈다. 상술했듯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아우라를 보여주는 <펄프 픽션>에선 충격적일 정도로 난잡하고 혁신적인 내러티브를 보여주어 영화만이 도달할 수 있는 성취를 보여주었고, 어쩌면 매우 과감한 시도였을 단독 여성 주인공으로서의 복수극은 <킬 빌>을 통해 완벽히 성취되었다. <바스터즈>,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같은 작품에선 '대체역사'를 통해 이미 과거가 된 역사가 바꿀 수 없는 것을 영화라는 이름을 통해 되갚아주기도 했으며, 흑인을 서부극의 주인공으로 내세워 백인들을 겨냥하는 복수극 <장고: 분노의 추적자>를 만들기도 했다. 심지어 <헤이트풀 8>에선 서부극을 영화의 동력으로 가져옴에도 모뉴먼트 밸리와 같은 넓은 대지 대신 좁은 잡화점 안에 모든 인물을 집어넣고 혐오와 저주가 가득한 수다극을 만들었다.


그가 행한 '전복과 대체의 것들'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 '전복과 대체의 것들'이 그의 영화에선 더는 과거와 같이 그저 B급 장르의 재료로서만 복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타란티노의 세계 아래선 (이전까진 일부만을 위해 소비되었던) '블랙 익스플로이테이션'도 메인스트림에 위치할 수 있었고, 정돈된 고고함이 아닌 자유로움과 수다스러움이 영화를 대표할 수 있었다.



한편 쿠엔틴 타란티노는 우연이라는 테마를 적극적으로 자신의 영화에 들여오는 감독 중 한 명이다. 타란티노는 필연이라 쓰지만 우연이라 읽을 수밖에 없는 세상의 진실을 자신의 영화에 새기고 싶어 한다. 타란티노의 영화에서 많은 경우 서사를 강력하게 뒤엎을 정도의 거대한 사건은 인물들의 '홧김'에서, 우연에서 비롯된다. 타란티노는 이 세상이라는 곳에서 우연이라는 것을 외면할 수 없다 생각하는 것 같다.


그중에서도 특히 타란티노의 초기작인 <저수지의 개들>과 <펄프 픽션>은 타란티노가 믿는 진실의 극점을 보여주는 것 같다. <저수지의 개들>에서 누가 죽고 누가 살아남았는지, 그 모든 것이 개개인의 역량 차이 때문이었다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미스터 핑크가 그들 중 가장 뛰어났기에 홀로 살아남은 것이었던가? 그들 중 가장 상식적이고 지식인에 가까워 보였던 미스터 화이트가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가장 압도적 이어 보이던 미스터 블론드의 말로는 어떠했던가? <펄프 픽션> 역시 그렇다. "우연히" 총에 맞지 않은 빈센트는 이것을 계기로 과거를 청산하게 되고, 함께 있던 빈센트는 우연히 총을 발사해 차에 함께 있던 마빈을 죽이게 된다. 어쨌든 영화의 주인공으로 보였던 빈센트는 정말 어이없게도 영화의 중반 부치의 집에 잠복해 있다 그에게 죽고, 부치는 그가 배신한 마르셀러스를 우연히 만나 쫓기다 보이는 대로 들어간 가게의 '게이 강간범' 사장에 의해 곤욕을 치른다.


물론 <펄프 픽션> 이후의 작품들에서도 마찬가지다. <킬 빌>에서도, <킬 빌> 시리즈의 2편까지 본 사람이라면 <킬 빌> 세계관 속 그 모든 일의 시작인 '투파인스 대학살'의 계기가 빌의 사뭇 순간적인 질투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것이다. <바스터즈>의 쇼샤나는 나치의 영웅 촐러를 우연히 만남으로 인해 나치의 고위층들을 몰살하게 되는 기회를 얻는다. 이를 두고 이동진 평론가는 <바스터즈>를 두고 "모든 면에서 예측 불가능한 특급 오락"이라 평하기도 했다.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서 극 중 내내 자신의 분노를 꾹꾹 참아왔던, 아마도 타란티노의 세계에서 가장 이성적인 인물이었을 닥터 슐츠는 기어이 한 번을 참지 못해 무슈 캔디의 가슴에 총알을 박는다. <헤이트풀 8>에서 '미니의 잡화점' 안의 그 모든 사람들은 우연히 만나 우연히 갇히게 되었고 우연히 과거로부터의 인연을 만나게 된다. 이처럼 타란티노 세계 속 인물들은 저마다의 계획은 가지고 있으나 예상치 못한 어떤 것으로 인해 계획이 틀어지고 선택이 바뀌게 된다.


많은 작가들이 스스로 영화 속에서의 '순간'을 '우연히 일어난' 것임이라 어필하지만 실상 그 모든 전개를 음미하다 보면 (영화는 각본이 있는 예술이기에 물론 당연한 것이지만서도) 작위적인 필연성이 맡아질 때가 있다. 멜로 장르의 어떤 영화들을 예로 든다면, 처음 두 사람이 만난 순간부터 그들의 모든 사랑의 생로병사는 이미 정해져 있는 듯한 공산적이고 일률적인 움직임들을 떠올려보자. 극적이지 못하고 경직되어 있다. 이와 달리 타란티노의 영화들엔 '예측 불가능함'이 있다. 타란티노의 영화를 보면서 어떠한 예측은 무력화된다. 두 손 들고 즐길 수밖에 없게 된다.



"revenge is a dish best served cold." (복수는 차갑게 식혀서 먹을 때가 가장 맛있는 음식과도 같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대부분의 영화에서 '복수'를 주제로든 소재로든 즐겨 사용하지만 그중에서도 '학살'에 가까운 복수를 보여주는 그의 영화 다섯 편을 주목해 보자. <킬 빌>, <데쓰 프루프>, <바스터즈>, <장고: 분노의 추적자>, <원어할>이다. 이 영화들에서의 빌런들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악인으로 설정된다. 많은 영화의 경우 설령 '옳은 복수'를 다룰지라도 폭력의 장면 폭력의 순간은 누군가에겐 불편함과 양심의 가책을 유발할 수 있다. 타란티노는 한도 없는 폭력을 만들고 싶을 땐 빌런에게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드리운다.


<킬 빌>의 빌은 임신 상태인 신부의 결혼식 자리에 난입해 학살극을 벌였으며 <데쓰 프루프>의 마이크는 무고한 여성을 살해하는 변태성욕 살인마다. <바스터즈>의 빌런은 유대인 학살자 한스 란다에, 최종 빌런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히틀러다. <장고: 분노의 추적자>의 무슈 캔디는 지독한 인종주의자이며 <원어할>의 히피 패거리들은 그 유명한 역사 속의 주인공 '맨슨 패밀리'였다. 극악무도한 죄가 있는 악인을 빌런으로 상정해 놓으면 영화 내에서 복수의 폭력은 마음 편히 펼쳐질 수 있다. 이에 더해 다분히 만화적으로 과장된 장면 장면들의 연출이 더해지니, 적나라한 신체 훼손과 거친 폭력이 등장해도 관객은 마음 편히 오락의 쾌감을 즐길 수 있다. 카타르시스를 위한 장(場)을 타란티노보다 잘 설계해 놓는 감독은 없다. 타란티노의 캐릭터라이징은 영리하다.


'복수'라는 측면을 확장시켜 <재키 브라운>, <킬 빌>, <데쓰 프루프> 이 세 편을 묶어 보고 싶다. 나에게 이 영화들은 한편으론 여성 3부작처럼 보인다. '헤모글로빈의 시인'이란 별명, 거친 대사들과 폭발적인 액션 등 타란티노를 수식하는 어떤 요소들로 인해 그의 영화들이 지극히 남성들을 위한, 남성들에 의한 마초이즘적 세계일 뿐이라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아마도 쿠엔틴 타란티노는 손꼽힐 정도로 여성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자주 내세운 감독일 것이다.


그의 작품 중 최초로 여성이 공식적인 주인공으로 등장한 <재키 브라운>을 살펴보자. 오델 로비의 심부름을 하며 다각적인 권력의 차이에 신음하던 재키 브라운은 종국에 이르러 그 권력의 일방향성을 뒤집어버린다. 말하자면 <재키 브라운>은 주인공 재키 브라운이 자립성을 회복하는 성장 영화인 셈이다. <킬 빌>의 주인공인, '데들리 바이퍼'에게 습격당한 베아트릭스 키도는 '임신한' '신부'였다. 중상을 당한 뒤 성적 학대에 시달리기까지 했던 그녀가 깨어난 뒤 차례대로 복수를 해 가는 모습은 소위 이야기하는 'Feminism'적 영화다. <데쓰 프루프>의 악당 '스턴트맨 마이크'는 여성을 자신의 차로 유인해 끔찍하게 학살하는 변태성욕자이다. 세 명의 여성을 내세워 그를 통쾌하게 처단하는 이야기인 <데쓰 프루프>는 어쩌면 가장 타협 없는 그의 여성 영화일 것이다.


자신에게 고통을 주었던 세상 (혹은 남성)을 사법력의 바깥에서 처단하는 이 세 편의 이야기는 타란티노가 호쾌한 오락물이라는 외피 안에 맹렬한 정치성을 함유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는 영화들이다. 자본과 무력의 차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약자에 위치했던 이들이 그 권력의 질서를 일거에 뒤집는 이야기는 영화로 쓰는 저항과 혁명의 역사이다. 심지어 <데쓰 프루프>의 차기작인 <바스터즈> 역시 자신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던 집단을 처단하는 여성이 주인공인 복수극이다. 나치에 의해 참혹히 학살당했었던 역사 속 유대인이, 그 총구를 반대로 돌려 나치를 처단하는 이야기가 바로 <바스터즈>다. 그렇기에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프레스 컨퍼런스에서 타란티노에게 샤론 테이트를 연기한 마고 로비의 분량이 적은 것은 아니었냐며 투정한 한 여성 기자의 질문은 더더욱 헛소리처럼 들린다. 타란티노는 어떤 감독의 영화보다 화끈한 순간을 자신의 작품에서 만들어내는 감독이지만, 한편으론 여성이라는 하나의 장치를 가지고 영리하게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감독이다.



무엇보다 우리 모두가 쿠엔틴 타란티노를 사랑하는 이유는 영화를 사랑하는 태도일 것이다. 시네필인 감독으론 봉준호, 박찬욱, 마틴 스콜세지 등의 많은 예시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타란티노는 단연 눈에 띈다. 그가 영화에 대해 말을 쏟아낼 때는 광기에 가까운 열정을 느끼게 된다. 세상에 그보다 더 영화를 많이 본 사람이 있을까 싶은 그의 영화 덕후 기질은 이미 많은 이들이 알고 있으며, 영화 내적으로도 그는 작품 안에 자신의 영화 사랑을 가득 담는다. 타란티노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킬 빌>과 <원스 어폰 인 타임 인 할리우드>에 주목하고 싶다.


먼저 <킬 빌>을 보자. 감독이 한 작품에서 자신의 영화에 대한 사랑을 유감없이 드러낸 예시 중 가장 높은 지점에 있는 결과물처럼 보인다. 타란티노는 <킬 빌>을 통해 일본의 감독 후지타 토시야의 <수라설희>, 한국의 정창화 감독의 <죽음의 다섯 손가락> 등 자신이 어린 시절 즐겁게 보았던 70년대의 아시아 영화들에 대한 경의를 충실히 바친다. 신비스러운 지점이, 타란티노의 영화들 속 오마주를 볼 때면 (그것이 실은 오마주임을 표방한 표절일 뿐이었던 여느 영화들과는 다른) 진실성이 느껴진다. 그러니까 타란티노는 자신의 영화에서 이것이 오마주임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편이다. 타란티노는 <킬 빌>에서, 분명히 다른 세상에 있었던 제각각의 것들을 한데 모아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었던 그야말로 새로운 지경을 열어젖힌다. 그저 과거의 작품들을 스크랩하듯 모아 결과물을 만드는 것 같기도 하지만, 또 결국 타란티노는 누구와도 비교를 할 수 없는 독보적으로 키치한 오락을 창조한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면 타란티노는 자갈들을 꿰어내 기어이 보화를 빚는 감독이다.


다음, 쿠엔틴 타린티노의 가장 최근작인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를 상기해 보자. <원스 어폰 인 타임 인 할리우드>를 두고 혹자는 타란티노가 영화에게 바치는 러브레터라 표현하기도 한다. <킬 빌>을 통해 자신이 어린 시절 목놓아 사랑했던 장르에 대한 경의를 바쳤다면, <원어할>에선 바로 자신이 살았던 6~70년대의 시절과 공간을 애정 어린 시선을 가득 담아 되살려 놓았다. 이 영화는 객관적인 서술의 영화가 아니다. 타란티노의 시선은 '편향적'이며, 트러블 가득하고 서늘한 위기가 도사리고 있는 할리우드임에도 그것을 바라보는 따사로운 눈을 잃지 않는다. 정말 영화의 제목대로, <원어할>의 주인공은 릭 달튼도 아니고 클리프 부스도 아니며, 샤론 테이트와 로만 폴란스키도 아닌 그들이 디디고 숨 쉬고 있었던 '옛날 옛적 할리우드'였던 것이다. 타란티노에게 옛날 옛적 할리우드는 첫사랑과도 같은 기억이자, 언제라도 자신을 소년으로 되돌려주는 절대적 순수의 공간인 것이다.


이 밖에도, 지극히 그 순간의 감흥만을 온전히 향유하기 위해 존재하는 듯한 '정서적'인 장면들을 그의 영화에서 마주할 때의 기쁨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다. <펄프 픽션>에서 미아와 빈센트가 함께 공연한 그 유명한 댄스 장면이나, <재키 브라운> 중 재키와 맥스가 델포닉스의 음악을 함께 듣는 장면 등.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하는 기분마저 드는 아름다움의 장면들이 그의 영화엔 가득하니, 타란티노는 가장 적극적인 방식으로 시네마의 순수함을 역설하는 감독이다.


그 타란티노가 차기작을 마지막으로 은퇴한다는 뜻을 밝혔다. 사실 그의 은퇴 계획은 오래전부터 여러 번 말해왔던 것이다. 연출한 장편 영화의 수 10편을 채우면 영화감독의 자리에선 물러나겠다는. 사실상 한 편인 <킬 빌>과 <킬 빌 2>를 하나로 묶으면 정말 타란티노의 차기작은 그의 10번째 장편 영화 연출작이 된다. 1977년 즈음의 사건을 다룬 '영화 평론가', 'The Movie Critic'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2023년 가을부터 촬영에 시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인터뷰를 통해 타란티노가 밝힌 차기작에 대한 정보는 다음과 같다. 분명히 실존했었지만 결코 유명하지는 않았던, 자신이 비디오 가게 점원 시절 접했던 포르노 잡지에 글을 기고하던 삼류 평론가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 많은 팬들이 원했던 '킬 빌 스러운' 복수극의 형태는 아마도 만들어지지 않을 것 같고, 오히려 전작인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와 같이 시네마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 예상된다.


만약 정말로 타란티노가 이 영화를 끝으로 은퇴를 하게 되어 이 영화가 타란티노의 마지막 작품으로 남게 된다면, <영화 평론가>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되며 어떤 위치에 있게 될까 궁금해진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마지막 영화를 본 이후 타란티노의 모든 영화를 다시금 한 번 볼 생각이다. 그때가 되면 만나게 될 타란티노의 또 다른 모습이 나는 기다려진다.

(+그러나 2024년 4월 해당 작품의 제작이 중단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 이후, 새로운 장편 영화 연출에 관한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다.)


적지 않은 신예들이 제2의 타란티노를 꿈꾸며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지만, 데뷔한 지 30년이 넘은 이 중년의 감독을 대신할 인물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타란티노 그는 대체 불가다. 그가 설령 은퇴를 하더라도, 그의 대한 논의는 어떠한 감독보다 활발하게 진행될 것만 같다. 그렇기에 쉬이 글을 맺는 대신 나 또한 다시금 질문을 던지고 싶다. 어느덧 공고한 메인스트림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타란티노는 여전히 메인스트림을 조롱하고 전복시킬 자격이 있는가? 여전히 타란티노는 기성세대에게 '엿을 먹일' 청춘일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