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바라바라밀다심경)해석 1편

by 수호천사

바라바라밀다심경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 가면서

느끼고 사색하게 되는 것들

사랑하게 되고

증오하게 되고


우리 스스로는 스스로에게

이름을 정해주게 된다.

바로 “나”라는 이름

우리는 “나”를 통해

이 세계를 경험하고

“나”를 통해 모든 쾌락과 고통을

느끼고 감당하고는 한다.

세상만물이 고요히 잠든 깊은 밤

당신은 마음속 깊은곳에 질문을

던진적이 있는가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 노쇠해지고 아픔을 느끼는 신체인가

병통을

느끼는 신체인가?

이런 때론 환희에 빠지고

때론 슬픔에 빠지게 되는 정서인가?

떠올랐다가 또 사라지는

영원히 끊기지 않는 생각들인가?

그 모든것들이 아니라면

무엇이 진정한 “나”인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머물러 있는 이 세계

이 산천들 하천들 도시들 별들

그들은 견고한 실상인가?

아니면 변환하는 거품인가?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것들

재부 명예 감정 이런것들이

영원한 안녕을 가져다 줄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최종적으로 허무함에 빠지게 하는가?

우리는 왜서 고통스럽게 느끼는가?

왜서 염려하게 되는가?


왜서 공포를 느끼게 되는가?

왜서 그 많은 것들을 채웠음에도

내심 깊숙한 곳에 채울수 없는 빈 공간이 느껴지는가?

2500년전 싯다르타 라는 왕자도

이 문제들로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그는 왕위 재부 가정 모두를 포기하고

6년의 시간에 거쳐 모든 고행을 거치고

생명의 궁극적 해답을 탐색하던중

드디어 어느날 저녁

머리를 들어 우주를 향해 보다가

별똥별이 지는것을 바라보고

그는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이 모든

답안의 정수 모든 불법 지혜의 핵심을

이 겨우 260자의 경문에 응축하여 담아냈다.

그 경문이

곧 “바라바라밀다심경이다”.

이 경문은 보통의 경문이 아니라

또 당신더러 맹목적으로 신봉하라는 교조가 아니라 그것은 각성자로부터 온

“우주인생사용설명서”이다.


그것은 한장의 지도다.

우리에게 고통의 미궁에서 벗어나는 법을

가르쳐 주는 지도이며 한자루의 열쇠다.


우리 내심속 태초부터 구비하고 있는 지혜의 보물창고를 열수 있는 열쇠다.


나머지 시간중에 당신을 요청하나니

잠시 당신이 세계에 대해 가진 모든 고유인식을 잠시 내려놓고 당신의 신분 당신의 번뇌 당신의 기대를 내려놓고 함께 멈추지 않는 골수까지 스며드는 심령여행을 해보자.

이것은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생명의 참선이며 한차례의 각성의 경지의 요청이다. 이 여행과정이 끝날 무렵 당신은 아마도

당신은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고 세계는 여전히 세계이지만 당신은 아마도 한쌍의 새로운 눈을 얻게 될것이다. 전혀 다른 새로운 자신을 보게 될것이고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될것이다.

그 여정을 지금부터 시작해 보자.

정식으로 경문에 들어가기전

우리는 반드시 그 이름을 이해해야 한다.

“바라바라밀다심경” 이 아홉글자 자체가

응축한 수행 법문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전체 “심경”의 항해도이다.

그 글자들을 해체하여 보면 첫째 단어 “바라” 통상적으로 “지혜”라 번역하지만 이 단어로는 절대 표현이 안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혜는 총명 지식 논리 분별의 능력을 뜻한다. 예를 들면 당신이 돈을 잘 버는 능력을 갖고 있다든가. 지식이 연박하다든가. 달변가 라든가. 등등 이런 것들은 세속적인 지혜다. 단 “바라”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바라”는 일종의 언어 논리 이원대립 이론을 초월한 존재다. 사물본질에 직달하는 궁극적 지혜로써 근본적 지혜의 범주에 속한다. 예를 들면 세속적 지혜는 당신에게 수영하는 각종 기교를 습득하여 개구리 헤염 자유수영 나비식 수영 등등을 배워내어 당신이 물속에서 자유자재로 수영할수 있게 한다면 “바라”는 당신이 일순간 당신 자체가 물 본신이며 당신은 물속에서 수영하는 것이 아닌 당신 자체가 물 의 유동이며 세속지혜는 “유” 의 세계에서 유동하며 더욱 쉽게 이 세계를 처리하고 분석하는 도구를 얻게 한다고 하면 “바라지혜”는 당신이 “유”라는 배후에 있는 “공”을 동찰하게 하며 당신을 꿈속에서 깨어나게 하는 지혜를 뜻한다. 그것은 배워내는 것이 아닌 느껴내는 것이다. 우리 모두의 내심 깊은 곳에 본래 존재 하는 것이다. 다만 무명과 번뇌라는 먼지에 덮혀져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심경” 첫페이지부터 우리에게 이번 항해의 목표는 우리 내면의 “바라”를 일깨우는 것이며 두번째 단어 “바라밀다”

의 뜻은 저편에 도달한다 는 뜻이다.

이편은 우리가 현재 처해있는 이 세계를 말한다. 생노병사 사랑 이별 원한 증오 만남 구해지지 않는 오온이 불타오르는 번뇌와 고통으로 가득찬 사파세계를 뜻한다. 우리는 이 세계에 살고 있다. 건너편 즉 저편은 번뇌가 멈추고 고통으로부터 해탈하고 지혜로 원만하고 구경안락의 열반경지를 뜻한다. 그러므로 “바라밀다”는 이쪽편에서 저쪽편으로 건느는 전체과정을 뜻한다.

이 강을 건느는 행동 자체이며 그것은 동사다. 수행,실천,초월을 대표한다. 만약 “바라”는 배를 말한다면 “바라밀다”노를 젓는 동작이며 항행하는 과정이다. 세번째 단어 “심”은 여러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우선으로 그것은 핵심 정요의 의미가 있다.

붓다가 말하는 수많은 “바라” 계열의 경전증 이 260글자의 “심경”은 제일 핵심적이고 정련된 요약강본이다.

“심경”을 읽어 이해한다면 전체반야사상의 심장을 장악한것과 같다고 할수 있다. 두번째로는 이 “심”은 우리의 맘을 뜻하기도 한다. 심장이란 신체기관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상 의식 정신을 뜻한다.

전체 “심경”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이 ”마음“의 오묘한 비밀을 뜻한다.

번뇌는 맘으로부터 생기고 해탈도 맘으로부터 생겨나고 일체의 수행은 최종적으로는 우리의 이 마음을 닦는 것을 말한다.

마지막 한글자 ”경“은 하나의 선처럼

붓가가 말한 법이 마치 하나 하나 진주구슬 처럼 선으로 연결되어 우리가 이 선을 따라 진리의 길을 찾아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아홉글자를 연결시켜보면 그 의미는 매우 선명해진다. 한부의 인도하는 경전 즉 우리에게 만물의 본질을 통찰하는 궁극지혜를 운용하여 지치지 않는 수행실천을 통해 번뇌의 생사고해를 건너 구경안락의 해탈의 저편에 이르게 하는 핵심법문이자 길잡이라는 뜻이다. 경전의 제목만 봐도 경전의 방향을 알수 있다.

이것은 소극적인 은둔의 철학이 아니다.

적극 주동적이고 역량이 충만한 행동지남이다. 우리더러 “바라”의 배에 올라 실천의 돛을 올려 우리의 마음을 조향판으로 삼아 “해탈”의 저편을 향해 항행하라는 뜻이다.

지금 바로 우리 같이 정식으로 배에 올라

선장인 “관자재보살”이 우리에게 어떤 항해도를 제시할지 보여줄지 알아보자.

경문의 첫구절 즉 전체 “심경”의 총 강목이

교향곡의 서곡처럼 제일 핵심적 주선율을 연주하여 사방에 울러 퍼진다.

관자재보살 행심바라바라밀다시 조견오온제공 도일체고액 이 말에는 수행의 주체 방법 발견과 성과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씩 풀어 해석해 보도록 하자.

우선 수행의 주체는 누구인가?


“관자재보살” “보살”은 “보제살타”의 약칭이다. 각성하는 것은 정이 있음으로 인해서이다 라는 뜻이다. 지칭하는 것은 위로는 불도를 추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감화시키는 수행자를 뜻한다. “관자재”는 이 대보살의 이름이다. 우리가 더욱 익숙한 것은 다른 이름 “관세음보살”이다.

여기에서는 왜 관자재보살이라 불렀을까.

이 이름자체에서 수행의 법문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관”은 눈으로 보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바라 지혜로 관조하고 각찰하는 것을 뜻한다. “자재”는 마음대로 하는 자유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및 인생의 실상을 통찰한 후에도

내심으로부터 도달한 일종의 무가애 불집착 그 어떤 외부환경으로부터 영향받지 않는 구경자유를 뜻한다. 그러므로 “관자재보살”은 이 보살의 이름이기도 하고 생명상태의 묘사이기도 내부관조를 통해 구경자재를 얻은 각성자이자 이번 항행의 선장이자 본보기이다.

그렇다면 수행의 방법은 무엇일까.

“행심바라바라밀다시” “행심”이란 심도깊게 지속적으로 끊기지 않고 우리가 제일장에서 얘기한 “바라바라밀다”

를 실천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맛보기에 그치는 사색이 아니다.

하루 아침 하루 저녁에 얻게 되는 능력도 아니다.

일종의 바라지혜를 생명의 매순간에 융합시키는 심각한 선정의 경지와 관조 행위다.

관자재보살이 심히 깊은 선정경지에 이르렀을 때에 어떤 발견이 있었을까?

이것이 “심경”의 가장 핵심적이고 전복적인 발견이다. “조견오온제공” “조견”은 사색이 아니고 분석과 추리도출도 아니다.

밝은 등불과 같이 암흑속에서 순간적으로

모든것을 밝게 비춰줘 만물의 본래 면목을 선명하게 드러내게 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일종의 직각성적이고 그 순간적인 깨달음이다.

무엇을 관조하게 되었는가 즉 “오온제공“

이것은 “심경” 더 나아가서는

전체 “불법”을 이해하는 기초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오온인가?

“온”은 적취집합 누적되고 모이고 뭉쳐진다는 뜻이다.

붓다는 우리 생명을 구성하는

우리의 “자아감” 구성하는 모든것을 5대분류의 집합으로 귀합하였다.


그것은 각각 색온:우리의 신체 및 일체의 물질 현상이다. 우리의 눈 귀 코 혀 신체

우리가 보게된 산천 하천 대지 우리가 만질수 있는 모든 것들 이 모든것들은 색온에 속한다. 그것은 우리 “자아”의 물질기초이다. 수온:이는 우리들의 감수 감각을 뜻한다. 우리의 감관기관눈귀코혀몸 이 외부 세계의 색 성 향 미 촉 느낌을 감지하였을 때 예를 들면 눈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즐거운 느낌이 들거나 몸이 바늘에 찔려

아픈 감각 즉 고통스러운 느낌을 느끼거나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물건을 보게 되었을 때 느끼는 불고불낙의 느낌 그것이 우리의

“자아”라는 정서의 기초를 구성한다.

상온: 이것은 우리의 사상 개념 상상을 뜻한다. 우리가 감수한 사물에 대해 식별하고

명명하고 연상하는것을 뜻한다.

예를 들면 장미를 보게 되면 붉은색 색온을 느끼게 될 뿐만 아니라 “희열“의 수온 그리고 장미라는 개념이 떠오르고 ”사랑“ ”낭만“등등을 연상하게 된다.

그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자아“에 대한 인지기초를 구성하게 만든다.

행온:이것은 우리의 내심 깊은 곳에서의 의지 동기 습관 충동 등 일종의 추진력이며 ”상“ 이후의 행동이다. 예를 들면 장미를 좋아하게 되므로 가서 꺾으려는 충동과 행위가 발생하며 우리 모든 결정이며 행위 배후의 추동력이다. 모두 행온에 속한다.

그것들이 우리 “자아”의 의지기초를 구성하며

“식온”은 우리의 사물을 식별하고 인지하는 능력을 뜻한다. 전에 먼저 얘기한 네가지 사온이 운행되는 기초활동무대라 할수 있다. 예를 들면 모니터에 색,수,상,행 이 표시되었다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눈으로 인식 귀로 인식 코로 인식 혀로 인식 몸으로 인식 의식으로 인식 이 여섯가지 의식은 우리가 이 세상을 분별하고 의식할수 있게 해준다. 그것들이 우리가 “자아”라는 것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핵심이다.


그 능히 알수 있게 되는 주체 우리 평범한

필부들은 일생동안 이 다섯가지 오온의 집합을 진실되고 독립적이고 항상적인 “나”로 잘못 알게 되어 우리는 이 “색신”의 노쇠 로 인해 고통스러워 하고 감수되는 것들의 구해지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번뇌에 빠지게 된다. “사상”의 맞고 그름으로 논쟁하고 “행온”의 욕망으로 인해 추종당하고

“식”이라는 이 능지의 주체에 집착하게 된다.

하지만 “관자재보살”은 그의 바라지혜의 빛으로 무엇을 비추어 보았는가?


이 오온이 모두 “제공”임을 비추어 냈다.

“공”은 아무것도 없는 “단멸공”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허무주의가 아니다.

불법에서의 “공”은 “연기성공” 이란 뜻이다. 이 오온중의 어떤 일온이든지 독립존재가능한것이 아니라 그것은 각종 인연조건이 화합하여 생긴것으로써 본신은 고정불변의 “자성” 이 없으며 네 신체의 색온은

부모의 유전자 ,음식,공기, 물 등 무수한 인연화합으로 만들어진 것으로써 한찰나도 쉬임없이 신진대사가 진행되며 항상불변한 “너”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너의 감수는 즉 수온은 근(감관),진(대상),식(분별인식) 3자가 화합하여 생긴 것이다. 인연이 모이면 생기고 인연이 흩어지면 멸하며 마치 물거품 같이 허망하며 환상같은 것이며 어디에 하나의 진실된 주체가 “감수” 하고 있는가 ?

너의 사상 상온은 과거의 기억,지식,개념의 집합이다. 념두는 왔다가 또 사라지며 마치 하늘의 뜬 구름 같다.

어디에도 영원한 “사상가”가 없다.

너의 의지 행온은 과거의 습관 그리고 현재의 인연이 공통으로 작용한 결과다. 마치

파초나무같이 층층이 벗겨내보면 중심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너의 의식 “식온”은 반드시 근본적인 먼지와의 접촉을 통해야만 생성되며 그 본신도 폭포와 같이

찰나에 생멸하는 서로 이어지는 흐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온제공” 은 우리가 “나”라고 하는 것을 통찰한 결과로써

수,상,행,식,상 이 다섯까지 원소가 인연의 작용하에서 잠시 취합하여 이뤄진것이며

부단히 변화하는 동태적인 생명과정이다.

그것은 마치 소용돌이 같이 보기에는 형체가 있어보이나 실제로는 물의 유동이며

네가 이 “나”라는 것에 집착하면

고통은 또 어김없이 생성되게 된다.

관자재보살이 이 실상을 알게 된후

어떤 성과를 얻었는가가.

이 세상 모든 고액을 없앨수 있는 법을 찾았다. 그 고액이란 고통과 액운에 대한 인식을 뜻한다.

그 모든 고액을 건너게 하는 해법이 곧 반야심경에 담겨져 있다. 그 법에 대한 설명이 곧 반야 심경의

핵심내용이다.

그것은 관세음보살만 가능한 특별한 능력 혹은 신통력이 아닌 수많은 보살들이

바라바마밀다에 의하여 무상정등정각을 얻었듯이


우리 중생 모두가 관자재보살이 관조한 그 실상을 알게 된다면 그 누구라도 관자재보살이 이르른

그 경지에 이를수 있고 그 이르르는 길잡이가 곧 반야심경이라 생각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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