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피스토 크라이스트

1

by 박규동

햇살 아래 눈을 감은 그는 생각에 잠겼다.

햇볕은 따스하고 바람은 선선하다. 차갑게 푸른 하늘과 포근한 구름. 피부에 닿는 빛. 지구는 분명 아름다운 곳이다. 인간이나 국가를 제외한다면, 나무와 꽃 같은 것들은.


가을 하늘 아래 메피스토는 종소리가 울려오는 방향을 따라 걸었다. 활짝 열린 교회 문으로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주님의 집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하고 풍성한 음식의 향을 맡을 수 있었다. 단정하게 차려 입은 남녀들이 그를 지나쳤다. 그는 교회 1층, 거대한 거울 앞에 섰다. 단정하게 정장의 단추를 채운 후 머리를 매만졌다.


'슬리퍼를 신고 맨발로 교회에 가면 지옥에 가는 건가? 하나님은 정말 엄격하시구먼.'


교회의 권사로 보이는 여성이 그에게 예배 순서가 적힌 종이를 건넸다.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메피스토에게 여성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우리 교회 처음이세요?”

“목사님을 뵈러 왔습니다.”

“배 목사님과 아는 사이세요?”


단정한 수염 아래 하얀 이를 드러낸 그는 미소를 지었다.


“가족 같은 사이죠.”


그는 예배가 시작되려는 1층을 지나 계단을 올랐다. 목사가 있는 4층에 다다랐을 때 그는 몸이 예전 같지 않음을 느꼈다.


'잘난 놈들은 왜 다 높은 곳에 사는 거야.'


그는 목사 방의 문을 두드림과 동시에 방 안으로 들어섰다. 테이블에 앉아 영수증을 정리하기 바쁜 60대 남자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이야기 들었다. 네가 진짜 죽을 때가 됐나 보다. 어쩌려고 그랬어?”

“세금도 안 내면서 무슨 영수증을 그렇게 뒤적거려.”

“안 내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메피스토는 방 중앙의 검은 가죽 소파에 앉아 테이블에 다리를 올렸다. 이윽고 영수증 정리를 마친 목사는 담배에 불을 붙여 물고, 그제야 그의 앞에 앉았다.


“메피스토. 아버지하고 내기했다며? 알지? 네가 이길 방법은 없는 거?”

“그래서 목사님을 찾아온 것 아니요. 전문가한테 조언을 얻으려고. 거짓의 군주 벨리알 목사님.”


목사는 웃음을 지으며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그가 내뱉는 숨에서는 지옥의 불이 뿜어져 나왔다. 목사는 메피스토에게 담배를 건넸다.


“그래서 무슨 내기인데?”

“아버지가 얘기하는 계몽이니 철학이니 내가 하도 지겨워서 얘기했지. 인간들은 정신을 차릴 수 있는 동물이 아니라고. 그랬더니 두고 보자 하시더라?”

“그래서?”

“한 달 안에 도시를 지옥처럼 만들면 내가 이기는 거지.”

“이기면 뭘 받는데?”

“천국으로 견학.”


목사는 어이없다는 웃음을 터뜨렸다. 거짓의 군주 벨리알은 내기를 좋아했다. 원래 인생이란 게 내기 그 자체이고, 내기라는 것이 거짓 그 자체 아니겠는가. 목사는 연기를 내뱉었다.


“지면은 어떻게 되는데?”

“인간으로 한 번의 인생을 살기.”


목사는 메피스토의 입에 물린 담배를 뺏어 재떨이에 던지며 테이블을 치웠다. 그는 자신의 테이블로 돌아가 의자에 앉았다.


“괜히 나까지 엮여서 피해 보기 싫으니까. 점심 먹고 그냥 가라.”

“내가 뭐 해달라고 했어? 조언만 조금 해달라니까?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몰라서 그래.”


목사는 한숨을 쉬며 테이블 서랍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냈다. 메피스토는 건네받은 서류를 천천히 읽어갔다. 그곳에는 단란한 한 가족의 정보, 고등학생 남자아이의 신상이 적혀 있었다. 목사는 말을 이었다.


“사회라는 것의 가장 최소 단위가 뭐냐?”

“가정?”

“그래. 얘기해 놓을 테니까. 예배 끝나고 만나봐.”

“만나서?”

“그 남자애 집에 가서 살아. 너도 어차피 살 곳은 필요한 것 아니야.”

“장난해? 크리스찬 집에 빌붙어 살라고?”

“난 분명히 도와줬다. 돈은 있어? 권능은?”

“돈은 마몬한테 빌렸고, 권능은 아버지에게 빼앗겼어.”


벨리알은 악마의 언어로 속삭였다.


'인간에게 자유를.'


메피스토는 목사의 말에 숨겨진 뜻이 있음을 눈치챘다. 그는 목사의 방에서 나와 1층으로 내려갔다. 예배당에 들어선 그는 가장 뒷자리의 의자에 앉았다. 목사가 건넨 서류에 있던 남자아이를 찾기 위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학생들은 다 여기서 설교를 듣는 게 맞을 텐데. 보이지 않네. 어쨌든 교회에서는 항상 이상한 냄새가 나.'


교단 위에 마이크를 잡은 전도사는 다윗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리는 왜 고난을 겪습니까. 고난으로부터 배우기 위해. 그 배움으로 이웃을 돕기 위해. 여러분, 힘든 시간을 겪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특별히 더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전도사의 이야기에 메피스토의 눈앞에는 지난날의 역사가 흘러 지나갔다. 과거에도 하늘에 앉아 있는 존재의 간섭으로 내기에서 진 적이 있었다. 그는 정장의 안주머니에서 껌을 꺼내 씹었다.


'이제라도 잘못했다고 빌고 지옥으로 돌아갈까. 인간으로 사는 건 정말 최악인데.'


그는 인간세계에 있는 속담들을 좋아했다.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뭐라도 썰어야지.'


지루한 예배가 끝나고 헌금을 걷는 시간에 그는 도망쳐 나왔다. 인간사에 돈이 얼마나 귀한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거짓의 군주를 위해 지갑에 손을 댈 수는 없었다.


'돈 안 내도 구원받을 수 있지 않나?'


그가 교회 앞에 담배를 피우러 나왔을 때 점잖은 부부는 그를 반가운 인사로 맞이했다. 여자의 목에 걸린 진주 목걸이, 남자의 금테 안경에 메피스토는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목사님에게 얘기 들었어요.”

“아, 예.”

“미국에서 공부하셨다고요. 짐은 어디에 있어요? 저하고 남편은 주말에만 집에 오니까, 본인 집이라 생각하고 편하게 지내요.”

“예.”

“우리 철없는 아들 성경 공부시켜주시면 더 이상 바랄 것도 없어요.”


벨리알의 거짓말은 언제나 진실이 되었다. 메피스토는 항상 의아했다. 벨리알에게 어떤 매력이 있기에 사람들이 이렇게 다 속아 넘어가는 것일까. 메피스토에게는 어떤 거짓말을 했을까.


“아드님은 오늘 교회에 안 나왔나 봐요?”

“말도 마세요. 그것 때문에 오늘 아침에도 한바탕 전쟁하고 나왔어요. 끌고 나올 수는 없으니 그냥 저희끼리 왔죠.”


메피스토는 교회 주차장에서 부부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는 금테 안경을 낀 남자가 값비싼 검은 외제차의 문을 여는 것을 보았다.


'좋은 차를 타네.'


차 뒷좌석에 앉은 메피스토는 창밖을 바라봤다. 차 안에서는 앞자리에 앉은 부부의 침묵을 깨는 찬송가가 흘러나왔다. 창문을 내리기 전, 메피스토는 차 안의 향기를 들이마셨다.


'부자들의 냄새가 나는구먼.'


찬송가를 막기 위해 그는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시끄러운 락 음악을 들으며 창문을 내렸을 때 차는 속도를 냈다. 빠르게 지나치는 그의 눈앞 경치는 아름다웠다. 적어도 그에게는. 그는 은행나무를 좋아했지만, 전봇대는 좋아하지 않았다. 따스한 햇볕은 좋아했지만, 가로등은 좋아하지 않았다. 잔디는 좋아했지만, 인간들의 더러운 발걸음이 묻은 아스팔트는 좋아하지 않았다. 가을 바람에 실려 온 세상의 내음을 맡을 때 그는 다시 한번 인간의 방해를 받았다. 앞좌석의 여자는 마치 잘못을 고하듯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저희 아들이 조금 버릇이 없어요.”

“괜찮습니다. 저도 그 나이 때 그랬는데요 뭐.”


여자는 아들의 행동에 대비해 사전 사과를 쏟아냈다. 메피스토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두 명의 크리스천과 하나의 악마가 대화를 나누는 자동차는 어느새 부촌으로 들어섰다. 오르막길을 오르던 차는 거대한 검은 정문 앞에 멈춰 섰다. 메피스토는 부부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다행히 그가 좋아하는 잔디와 나무가 있었다.


'무슨 일을 하길래 이렇게 돈을 많이 버는 거야.'


메피스토는 정원을 가로질러 주택의 통유리를 통해 거실을 바라보았다. 거실 소파에는 평범해 보이는 고등학생 남자아이가 누워서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관 문이 열림에도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아들의 모습에 여자는 당황했다. 메피스토는 여자의 혼란에서 벨리알의 모습을 떠올렸다.

'벨리알이 뭐라 했길래 이렇게까지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거야?'


“모세야. 손님 왔어. 나와서 인사해야지.”


잠옷 차림의 남자아이는 현관에 들어선 메피스토와 대치했다.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아이의 시선에 메피스토는 불편함을 느꼈다. 아이의 눈빛에는 의심만이 가득했다.


“아저씨 짐은 없어요?”

“교회에 두고 왔어.”

“아저씨 이름은 뭐예요?”

“메피.”

“메피? 무슨 이름이 그래요?”

“독일 이름이야.”

“나이는 몇 살인데요?”

“서른…. 마흔.”

“서른 마흔이요? 본인 나이도 몰라요? 왜 검은 정장을 입고 계세요?”

“주일이잖아. 교회에 가려고 입었지.”

“아저씨도 예수쟁이예요?”


얼굴이 붉어진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를 물건처럼 방 안에 구겨 넣었다.


“너 말 그렇게 할래? 지옥 가고 싶어? 진짜, 조금 이따가 봐. 큰일 날 줄 알아.”


아이의 어머니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거듭했다. 이내 빠르게 화제를 돌리고 싶은지 그녀는 메피스토가 머물 방을 소개했다. 그들은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메피스토는 그의 방이 마음에 들었다. 책상과 의자, 침대가 전부인 방. 창밖으로는 산을 볼 수 있고, 창 안으로는 햇볕이 들어오니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옷도 사야 하고 백화점에 한 번 들러야겠네.'


1층에서는 부인을 부르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메피스토 역시 그녀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그는 아이가 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남편은 어느새 준비된 여행 가방을 들고 길을 나설 채비를 했다.


“회사가 지방에 있다 보니, 저희가 주말에는 최대한 늦게 내려가려고 하는데,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요. 궁금한 것도, 알려드릴 것도 산더미인데 이렇게 급하게 가서 죄송해요. 다음 주 금요일에 뵐게요. 필요하신 것 있으면 꼭 전화해 주세요.”

'모든 여유를 돈으로 바꿨나 봐.'

“모세야! 엄마 아빠 간다!”


아이는 부모님의 목소리를 듣고서도 방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메피스토는 아들의 역할을 대신해 부부를 배웅했다. 문을 열고 점잔이 인사를 마친 그는 조용한 거실로 돌아왔다. 소파에 앉은 그는 천장을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뭐부터 해야 하지. 은행 같은 곳에 테러를 일으켜야 할까. 이곳을 지옥으로 어떻게 만들지? 나의 고향, 지옥은 어떤 곳이지? 뭐, 별 특별한 장소도 아닌데. 도대체 어쩌라는거야. 아니면 한 달간 쉬다가 아버지에게 잘못했다고 빌까. 인간들은 빛을 통해 눈을 뜰 것입니다. 계몽과 철학으로 그들은 분명 더 나은 세상을 만들 것입니다. 이번 여행으로 아버지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하…. 아니야. 아버지가 거짓말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지. 내가 벨리알도 아니고 말이야.'


천장을 바라보며 고민에 빠진 메피스토는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을 느껴 고개를 돌렸다. 모세는 방의 문을 열어 메피스토를 주시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어색한 순간, 모세는 잠옷 차림 그대로 거실로 걸어 나왔다.


“여기에 얼마나 계실 거예요?”

“한 달.”

“제 방에는 절대 들어오지 마세요.”

“그래. 다른 할 말은 없니?”

“없어요. 배고프면 뭐 시켜 드세요. 저희 집엔 쌀 없어요.”


메피스토는 이야기가 끝났음에도 자리를 뜨지 않는 남자아이에게 소리 없는 압박을 느꼈다. 모세는 분명 거실을 점유하고 싶어 했다.


“알았어. 아저씨는 방에 들어가 있을게. 쉬어.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왜 아저씨가 필요하겠어요?”


모세의 당돌한 목소리에 메피스토의 머릿속은 지옥을 향한 맹렬한 그리움으로 끓어올랐다. 온갖 날붙이와 화염으로 모세를 괴롭히는 상상에 잠겼으나, 손님은 손님인 법.


메피스토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2층 방으로 올라갔다.


'내가 뭘 잘못했나? 저 자식은 저런 태도로 친구를 어떻게 사귀려고. 쟤는 분명 친구도 없을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재수 없네. 그래도 내가 어른인데, 어른한테는 조금의 존경이라도 보여야 하는 거 아니야?'


그는 창밖의 정원을 바라보았다. 비가 오려는지 하늘은 흐려지고 있었다. 정원에서는 외로운 연기가 피어올랐다. 모세가 정원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고독이 창을 통해 방에 가득 찼다. 메피스토는 계단을 내려와 정원 의자에 앉았다. 그는 자신을 보고도 담뱃불을 끄지 않는 모세와 눈싸움을 벌였다. 모세는 속으로 생각했다.


'교회 다니는 아저씨가 나한테 할 말은 뻔하지 뭐.'


그러나 메피스토는 모세가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나도 한 개비만 줘.”


모세는 의아함과 경계가 뒤섞인 눈빛으로 메피스토를 노려보았다.


“나중에 새로 한 갑 사줄 테니까. 편의점 가기 귀찮아서 그래.”


모세에게 담배 한 개비를 건네받은 메피스토는 마치 오아시스를 찾은 듯 기쁘게 연기를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그가 내뱉는 연기에는 지옥의 불이 섞여 있는 듯했다. 다른 이들에게도 그의 지옥 불이 보일지는 모르나, 모세는 분명히 그 불꽃을 볼 수 있었다.


모세는 메피스토의 턱수염과 손톱, 곱게 넘긴 길고 검은 머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그런 잔소리 안 하세요?”

“무슨 잔소리?”

“나이도 어린 게 담배를 피우냐는 등의 이야기요.”

“왜 피우면 안 되는데?”

“청소년이 담배 피우는 건 불법이잖아요.”

“야. 법이란 건 말이야. 약간의 사소한 제안과도 같은 거야. 굳이 다 지킬 필요는 없거든.”


어두워지는 하늘에 섬광이 쏟아졌다. 이내 들리는 천둥소리에 메피스토는 정원에 담배꽁초를 던진 후 집 안으로 들어섰다. 모세는 그의 등 뒤에 소리쳤다.


“여기다가 꽁초 버리면 안 돼요.”


메피스토는 모세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빠르게 계단을 올라 그의 방으로 돌아갔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 그는 사색에 잠겼다.


'벨리알은 나를 왜 이 집으로 보낸 거지. 여기서 어떤 혼돈을 어떻게 일으킬 수 있을까.'


지옥에 모든 권능을 두고 온 메피스토는 어쩌면 이미 내기에서 이길 생각을 포기한 듯했다.


'하긴, 세상을 바꾸는 게 쉬웠다면 진작에 다른 악마들이 바꿔놨겠지. 아니면 바꾼 게 고작 이거인가? 노력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일까? 세상을 불태우고 싶다면 불태우려는 노력이라도 하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일까?'


메피스토의 사색은 문을 울리는 노크 소리에 방해받았다. 이내 발로 차듯 문을 연 모세는 문틈에 기대어 말했다.


“아저씨 저녁 먹었어요?”

“아니.”

“피자 먹을래요?”

“그래.”


일요일 오후, 쏟아지는 비에 하늘은 밤처럼 어두워졌다. 메피스토는 핸드폰을 통해 계좌 잔액을 확인했다. 한숨이 쏟아지게 만드는 숫자를 확인한 후 그는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형제, 마몬. 물욕의 악마여. 인간 세상의 모든 금이 너의 것이니 형에게 힘을 조금 보태다오. 아몬. 그리고, 아멘.’

'역시 기도는 악마들이 훨씬 잘 들어준다니까.'


메피스토는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며 우산을 골랐다. 이번에도 모세는 마치 귀신처럼 그를 놀라게 했다.


“아저씨 어디 가요?”

“편의점.”

“편의점은 왜요?”

“담배 사러.”

“아까 약속한 거 알죠?”

“무슨 약속?”

“제 것도 한 갑 새로 사주신다고 했잖아요.”

“알았어.”


현관 문을 등 뒤로, 메피스토는 쏟아지는 폭우에 길을 나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우산을 정원에 두고 다시 한번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가나안의 진정한 왕. 파리라는 치욕에도 강하고 아름다운 바알 대왕. 10분만 비를 거두어 주소서. 편의점에 갔다 와야 합니다.’


마법처럼 비가 그치자 메피스토는 길을 떠났다. 대문을 열고 큰길을 배회하던 그는 편의점에 들러 담배와 과자 몇 개를 쥔 채 집 근처를 배회했다. 그의 눈앞에 비 대신 쏟아지는 은행나무 잎은 그의 감성을 자극했다.


'이런 날씨에는 사랑에도 빠지고 싶군.'


어두운 날씨에 그는 길 건너 작은 와인 매장을 발견했다.


'예수님의 피, 좋은 포도주는 정말 오랜만이야.'


그렇게 담배와 와인을 챙긴 그는 바람에 휘파람을 전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대문 앞에 선 그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은행나무 잎을 밝히는 가로등에 어쩌면 도시가 나쁘지만은 않은 듯했다.


'이곳의 가난과 고통, 치욕과 분노를 잊어선 안 되겠지.'


그가 대문 문을 닫는 찰나, 다시 폭우는 쏟아지기 시작했다. 머리와 옷에 떨어진 빗물을 턴 메피스토는 주방에 앉아 피자를 먹고 있는 모세에게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같이 먹지. 먼저 먹냐.”

“뭐 사 온 거에요?”

“피자에는 레드 와인이지. 한잔하자.”


어두운 하늘과 차가운 안개, 번개의 섬광과 천둥의 소음에도 거실 안, 주방은 밝고 따듯했다. 메피스토와 모세는 따뜻한 주방 조명 아래 와인을 나눠 마셨다. 피자의 크러스트 부분을 모두 남긴 메피스토는 주방 의자에 기대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와인에 얼굴이 붉어진 모세는 헛웃음을 지었다.


“아저씨 집안에서 담배를 피우면 어떡해요?”

“왜 안 되는데?”

“안되기로… 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면 너도 펴.”


메피스토가 담배 연기를 내뱉을 때 바깥에서는 천둥의 전조가 섬광으로 빛났다. 모세는 볼 수 있었다. 번개의 섬광에 비친 메피스토의 담배 연기에는 분명 지옥의 불이 담겨 있었다. 모세는 메피스토를 따라 담배를 입에 물었다.


“아저씨 교회 다니는 사람 아니죠?”

“응. 너도 아니잖아.”

“아저씨 인간 아니죠?”


메피스토는 모세의 이야기에 웃음이 터졌다. 메피스토가 웃을 때 입가에서 새어 나오는 담배 연기에 모세는 확신했다.


“아저씨 인간 아니죠?”

“그러면 뭐 같은데?”

“악마 같아요.”

“왜? 턱수염이랑 검은 옷 때문에?”

“아니요. 아저씨의 담배 연기에서 지옥이 보여요.”


메피스토는 웃음을 멈춘 후 모세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현실에 악마 같은 게 어디 있냐. 너는 믿어?”

“저희 부모님은 하나님이 있다고 믿어요. 뭐, 저도 교회를 다니지 않을 뿐이지 분명 하나님은 있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악마도 당연히 있어야죠.”

“충분한 근거가 되지 않아.”


모세는 피자 기름이 묻은 손을 휴지로 닦은 후 핸드폰을 만져댔다. 모세는 인터넷에 '악마'라는 단어를 검색한 후 그 결과를 메피스토에게 보여주었다. 뉴스에는 온갖 흉악 범죄와 끔찍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왔고, 그런 기사에는 악마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았다. 메피스토는 직감할 수 있었다.


'이 아이는 계획의 일부이다. 그 어떤 한낱 인간이 내가 악마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아버지와의 내기, 벨리알이 나를 이곳으로 보낸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는 거야.'


모세는 이야기를 이었다.


“게다가 아까 나가실 때 봤어요. 두 손을 모으고 눈을 잠시 감더니 비가 그쳤잖아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매일 기도를 하는데?”

“그러면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이 복권에 당첨되게요? 제가 아무리 무식해도 하나님이 그런 방식으로 일하지 않는 건 알아요.”


메피스토는 아이에게 명석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 아이의 통찰력은 선악이라는 거짓, 그 뒤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메피스토는 담뱃불을 끈 후 와인을 들이마셨다. 그는 결심을 한 듯 모세에게 말했다.


“내가 악마라면, 나는 나쁜 놈이겠지?”

“세상만사가 그렇게 다 단순한가요. 악마여도 저한테 담배를 사준다는 약속은 지키셨잖아요.”

“청소년이 담배를 피우는 게 나쁜 것이기 때문에 사준 거라면?”

“그러면 별로 똑똑한 악마는 아니겠네요.”


메피스토는 미소를 지었다.


“악마를 영어로 데몬(Demon)이라고 하지? 너 그 어원이 뭔지 알아?”

“몰라요.”

“고대 그리스어로 다이몬(Daimon)이라고 하거든. 다이몬은 물질적인 것을 초월한 자, 심지어는 정령, 또는… 육체와 현실이라는 실체를 넘어선 자. 이렇게도 불릴 수 있다 이거야. 물질적인 세계의 인간과 영계의 존재들을 이어주는 존재.”

“그러면 무당과 신 사이에 전화기 같은 존재라고도 할 수 있네요?”

“그건, 그런가? 아니라고는 못 하겠지만 아무튼, 너 데몬이라는 단어의 뜻을 봤을 때 나쁜 놈, 또는 나쁜 짓이라는 개념을 하나라도 찾았어?”

“아니요. 그래서 아저씨가 악마는 맞는데, 악마라는 게 꼭 나쁜 놈이라는 뜻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메피스토는 머쓱한듯 코를 긁었다.


“뭐, 너무 단순하게 함축해버리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

“그러면 악마들은 왜 나쁜 놈들이라고 불리게 되었는데요?”

“우리는 합리적이거든.”

“합리적인 게 나쁜 거예요?”

“합리적인 건 자유로운 거야. 우주 최고의 미덕은 자유라고 믿는 게 우리야. 그렇다면 우리가, 심지어 너희 인간들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원치 않는 존재도 있는 거지.”

“그게 하나님이다?”

“뭐 굳이 그렇다는 건 아니고.”


메피스토는 괜히 바지에 묻은 먼지를 떼어내며 시선을 피했다. 그는 주방의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원래 새로운 종교가 들어서게 되면, 그 전의 것들은 모두 사악한 사이비가 되는 법이야.”

“그런데 아저씨가 실제로 나쁜 짓들을 할 수도 있는 건 맞잖아요? 마당에 담배꽁초 버리고, 청소년한테 담배 사주고, 실내에서 담배 피우고.”

“머릿속에 담배밖에 안 들었어? 그런 행동들이 나쁘다고 누가 정했는데? 내가 담배꽁초를 마당에 던지는 사람이라고 해서 나한테 배울 게 하나도 없을까?”


모세는 자신의 잔에 든 와인을 모두 마신 뒤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아저씨랑 대화하니까 시간 가는지 모르겠네요. 내일부터 하나씩 증거를 보여주세요.”

“무슨 증거?”

“아저씨가 악마라는 증거요. 뭐 불을 뿜는다거나, 마귀를 소환한다거나 그런 거요.”

“내가 너 말을 왜 들어야 하는데?”

“아저씨가 시키는 일들이 있으면 제가 할게요.”

“생각해볼게.”


메피스토보다 많은 양의 와인을 마신 모세는 비틀거림 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서 문을 닫았다. 그의 뒷모습을 보는 메피스토는 헛웃음을 지었다.


'웃긴 새끼네. 무섭도록 똑똑하기도 하고.'


메피스토 역시 잠자리에 들기 위해 주방 식탁에서 일어났다. 그는 피자와 술잔, 쓰레기들이 넘쳐나는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엔 십자가를 들고 자신을 향해 주기도문을 외우는 모세의 부모님 모습이 떠올랐다. 결국 그는 피자 박스와 와인병을 재활용 쓰레기통에 정리한 후 주방을 떠났다.


그가 정의하는 죄책감이란 자신이 저지른 행동 다음에 올 상황 그뿐이다. 2층을 향해 계단을 오르는 메피스토는 술기운에 비틀거렸다.


'인간의 몸을 쓴다는 건, 인간의 뇌를 쓴다는 것이지. 이제 인간이랑 별 다를 게 없네. 애초에도 별다른 게 없긴 했지만.'


그는 검은 셔츠의 단추를 풀어 던진 후 침대에 누웠다.


'내일은 편한 옷을 사야겠어. 모세가 입은 잠옷 같은 옷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