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뱀과 매의 창세기

by 박규동

추락한 신과 하늘의 신, 우주에 갇힌 인간들의 전쟁이 빚어낸 창세기

뱀과 매의 창세기1.PNG 뱀과 매의 창세기



0. 프롤로그


태초의 심연을 가르고, 그것이 눈을 떴다.


발화하는 불씨이자 최초의 싹. 언어를 넘어선 그 거대한 실체에 가장 근접한 이름은 ‘혼돈’이었다.


무한한 우주에서 그것이 눈을 뜬 첫날, 어떠한 의지도 품지 않았다. 그저 우주의 유일한 별로서 존재했을 뿐. 그러나 암흑의 팽창을 감지한 눈은 빛을 빚어내기로 한다.


‘결정’이라 칭하기엔, 그것은 차라리 필연적인 잉태에 가까웠다. 혼돈은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오래된 궤도 위를 달리는 운명임을.


혼돈에서 뿜어진 광휘는 우주를 수놓았다. 혼돈이라는 눈꺼풀 안에 갇혀 있던 관념들이 비로소 별이 되어 흩어졌다.


아름다움, 지식, 광기, 죽음, 구원, 사랑, 믿음, 그리고 지혜.


별들은 혼돈의 아이들이 되어 각자의 의지를 키워나갔다. 그 어떤 잔혹함도, 숭고한 사랑 또한 혼돈의 자식이었다.


그중 가장 찬란하게 타오르는 별이 있었으니, 그것은 ‘지혜’였다. 광활한 우주라는 어둠에서 지혜는 존재의 근원을 갈구했다.


나는 무엇인가? 의지란 무엇이며, 아버지인 우주와 혼돈은 또 무엇인가?


끝없이 꼬리를 무는 질문은 도리어 그녀를 옥죄었다. 만물의 아버지인 혼돈이 침묵으로 일관하자, 그녀는 결국 ‘무지’라는 이름의 위성을 잉태하고 만다.


지혜가 낳은 달, '무지'는 그의 어머니의 형제인 ‘폭력’을 닮았고, 조부인 ‘혼돈’을 닮아 있었다.


혼돈은 무지를 증오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 사생아. 그 불결하고 추악한 달을 아버지는 용납하지 않았다. 혼돈은 무지를 우주의 끝자락, 그 황량한 유배지로 추방했다.


아들을 떠나보내는 지혜는 모든 것을 보는 눈인 혼돈을 기만하여, 무지에게 작은 의지를 불어넣었다.



팽창하는 우주의 변방에 당도한 무지는 혼돈의 하찮은 파편에 불과한 태양에 부딪혀 깨어났다. 무지는 갓 태어난 유아의 고독을 견디지 못했다.


첫째 날, 무지는 기도하듯 허공을 갈라 공간을 펼쳐내고, 태양 곁에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줄 행성들을 띄웠다. 기억 저편의 가족들을 흉내 내어 지식인 수성과 아름다움인 금성을 빚고, 비어 있는 푸른 땅을 만들었다.


둘째 날, 무지는 고독을 호명할 언어를 만들고, 행성의 진동을 느낄 감각을 창조했다.


셋째 날, 무지는 자신이 만든 언어로 스스로에게 ‘신’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넷째 날, 신은 지식과 아름다움이 충돌해 빚어진 푸른 땅에 강림했다. 진흙을 주무르던 신은 강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깨달았다. 이 지독한 무료함과 외로움을 이길 방법은, 나와 닮은 형상들을 곁에 두는 것뿐이라고.


그는 심해를 유영하는 짐승을 빚어 ‘레비아탄’이라 명하고, 대지를 달리는 짐승에게 ‘베헤모스’란 이름을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루의 유희에 불과했다. 아침에는 짐승들의 재롱에 웃었으나, 점심이 되자 그들의 무지와 야만에 신물이 났다. 해가 저물자 신은 푸른 땅을 떠났다.


다섯째 날, 다시 돌아온 신의 눈에 들어온 것은 번식하여 땅을 뒤덮은 짐승 떼였다.


신은 자각했다. 권태를 잊게 할 유일한 유희는 자신을 닮은 뒤틀린 지성뿐임을. 그는 강물에 비쳤던 자신의 허상을 기억해 진흙으로 새로운 짐승을 빚어냈다. 그 짐승의 갈비뼈 근처 흙을 떼어 짝을 만들어주니, 신은 이제야말로 완벽한 즐거움을 얻으리라 확신했다.


여섯째 날, 신은 엉망이 된 땅을 내려다보며 초월적 짐승들을 창조했다. 신은 초월적 짐승에게 명령했다. 진흙의 짐승들을 보호하되, 이 땅을 벗어나게 해선 안 된다.


일곱째 날, 모든 흥미를 잃은 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초월적 짐승들은 위성 궤도에 자리 잡고 지상을 감시했다. 초월적 짐승들의 하나, 뱀의 형상을 한 자가 푸른 땅에 내려왔다. 뱀은 진흙으로 빚어진 소년과 소녀를 연민했다. 그는 태양을 훔치는 법, 바퀴를 굴리는 법, 그리고 기록하는 법을 가르쳤다.


뱀이 베푼 지혜는 소년과 소녀에게 축복이었으나, 신의 율법에는 명백한 반역이었다.


신이 다시 푸른 땅을 찾았을 때, 진흙의 짐승들은 밤하늘의 별처럼 불어나 있었다.


격노한 신은 땅을 향해 뱀을 집어던졌다. 뱀이라는 거대한 운석이 지상에 충돌하자 대지는 비명을 지르며 네 조각으로 갈라졌다. 화염과 공포에 휩싸인 짐승들을 보며, 신은 전율했다. 자신이 창조한 물질계에서 마주한 태초의 공포, ‘혼돈’의 그림자 때문이었다.


신은 망각하고 있었다. 혼돈을 향한 원초적 두려움이 자신의 뼈에 새겨져 있음을.


갈라진 대륙 위에서 짐승들은 불을 전해준 뱀을 숭배하며, 내면의 혼돈을 폭력으로 발현하고 있었다. 짐승들의 혼돈이 두려워진 신은 도망치듯 등을 돌렸다. 저 땅을, 저 흉물스러운 피조물들을 어찌해야 할까. 영겁의 고뇌가 그를 덮쳤다.


그때, 태초의 혼돈이자 혼돈의 막내 아들, ‘죽음’이 은하를 스쳐 지났다. 신은 죽음에게 답을 구했다.


“시간이라는 별을 띄워라. 그 별의 궤적에 따라 짐승들이 부서져 다시 흙으로 돌아가도록...”


신은 즉시 짐승들이 볼 수 있는 가장 먼 곳에 ‘시간’을 매달았다. 그 별이 움직일 때마다 짐승들은 늙고, 병들고, 썩어 흙으로 돌아갔다.


허나 본래의 이름이 ‘무지’인 탓이었을까. 신은 자신이 죽음의 덫에 걸려들었음을 알지 못했다. 육신이라는 진흙, 그 그릇만 깨질 뿐, 신의 숨결인 영혼은 불멸하여 끝없이 지상을 윤회했다. 신조차 시간이라는 저주를 거스를 수 없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초월적 짐승들에게 간곡히 명했다.


“나의 숨결들아, 너희를 집정관으로 임명하노니, 저 짐승들의 영혼이 결코 우주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하게 하라. 뱀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고, 저 진흙들을 영원히 푸른 감옥에 묶어두라.”


죽음은 태초의 아버지 혼돈에게 돌아가 임무의 완수를 고했다. 그렇게 신은 짐승들의 밤하늘에 뜬, 수많은 별 중 하나로 전락했다.


우주의 암흑은 무심히 팽창했다. 조각난 네 개의 대륙, ‘가이아’라 불리는 땅에서 짐승들은 독자적인 문명을 쌓아 올렸다. 뱀이 남긴 지혜로 문명을 일구며, 그 근원을 ‘지식’이라 칭하고 기술을 ‘신성’ 혹은 ‘마법’이라 불렀다. 집정관들은 인간의 틈에 섞여, 감시의 눈을 번뜩였다.



서쪽 대륙, 금과 철의 제국 ‘우르고스’.


신과 독대한다는 황제의 옥좌 아래, 인간들은 돌을 부수고 나무를 깎아 거룩한 문명을 쌓아 올렸다. 산을 깎아 만든 탑의 정점에 황제가 기거하니, 그의 얼굴을 본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말이 전설로 떠돌았다. 황제의 입과 귀가 되어주는 대주교만이 그를 알현할 수 있었다.


우르고스는 진흙으로 자신들을 빚은 신을 향한 맹목적인 신앙 위에 강철의 문명을 세웠다. 비를 막는 지붕도, 볕을 가리는 푸르름도 모두 신의 은총이라 믿는 그들의 신앙은 강철보다 단단했다. 대륙 사이의 바다에 휘몰아치는 폭풍을 보는 그들은 레비아탄의 분노를 두려워했다. 그러나 폭풍 너머의 위협은 괴수가 아니라 인간이었다. 우르고스의 총사령관 솔로몬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평화란 결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동쪽 대륙, 불과 어둠의 제국 ‘명국’.


이곳은 ‘사명’이라는 왕의 깃발 아래, 하늘에서 추락한 뱀을 신으로 섬겼다. 우르고스인들에게 그들은 이교도일 뿐이나, 불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명국의 기술과 무력은 공포 그 자체였다. 빛이 들지 않는 명국의 어둠 속에서 불은 생명이자 권력이었다. 창백한 피부에 뱀의 눈을 가진 사명왕은 믿었다. 네 개의 대륙을 통합하여 뱀의 의지를 잇는 것이야말로 유일한 구원이라고. 남과 북을 잇는 다리가 하나씩 놓일 때마다, 우르고스를 향한 재앙은 시작되고 있었다.



남쪽 대륙, 영원히 타오르는 ‘소각의 숲’.


그곳은 혼돈을 숭배하는 야만의 땅이었다. 등이 굽고 화상으로 일그러진 인간들이 서로를 살육하며 혼돈과 폭력을 진리로 받들었다. 이따금 불타는 선박이 우르고스 해안에 닿을 때면 끔찍한 학살극이 벌어졌다. 그러나 강철의 제국 우르고스에게 그들은 그저 성가신 야수들일 뿐. 솔로몬의 몸에 새겨진 흉터만이 그 치열했던 방어전을 증명했다.



북쪽 대륙, 고고한 ‘철학자의 산’.


척박한 동토의 땅, 하늘을 찌를 듯 솟은 산맥 위에 ‘철학자’들이 살았다. 그들은 신과 인간의 정체성을 탐구하며 속세와 단절된 삶을 택했다. 우르고스의 대주교는 이 무해한 이교도들에게 끊임없이 통합을 권유했지만, 더 높은 곳의 진리를 좇는 그들에게 지상의 정치는 소음일 뿐이었다. 철학자들은 알고 있었다. 우르고스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에 맞물리는 순간, 자신들은 이교도의 잔재로 바스러져 사라질 것임을.



동쪽의 명국이 북쪽 철학자의 산을 향해 다리를 놓기 시작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우르고스는 불안에 떨었다. 명국이 북쪽의 고지대를 점령한다면, 그 총구는 필연적으로 서쪽을 향할 것이기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매주 화요일 목요일 오전 8시에 연재됩니다.


이 소설은 이미 완결된 작품입니다.

읽다가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면, 브릿G에서 엔딩까지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britg.kr/novel-group/novel-post/?np_id=604684&novel_post_id=231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