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과 웃음의 사이에서
시댁에 처음 인사를 드리러 간 날
시어머니 시아버지 외에 한 분이 더 계셨다.
이모님이라고 남편이 소개했다.
나를 보고 반갑게 웃으셨다.
이모님은 아기였을 때 열병을 앓으시고 그만 귀가 안 들리게 되셨다고 했다. 그래서 말을 못 하셨다.
남편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듬직한 시아버님께 이모님을 부탁하셨다.
이모님은 똑똑하셨지만 공부를 할 기회가 없으셔서 수화 비슷하게 약속을 정해서 가족과 소통하셨다.
엄지 손가락은 시아버지, 새끼손가락은 부인 이런 식으로.
나는 왠지 엄마와 비슷한 느낌의
이모님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이모님은 시어머님의 자식들을 다 뒷바라지하셨다.
시어머님이 몸이 안 좋으셔서
언제나 머리띠를 두르고 누워계셔서 이모님이 집안일을 다하셨다.
교복도 다려주고 도시락도 싸주고 재봉질도 하고 청소도 하고 세끼 밥도 차리고 또 치우고 하셨다.
하루가 매일 같은 패턴이었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설거지가 끝나고 나서야 텔레비전 앞에 앉으셔서 최고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셨다.
드라마를 보시면서 쟤는 나쁘다고 하시고 쟤는 좋은 사람이라고 엄지를 들어 보이기도 하셨다.
드라마에 몰입을 잘하셔서 등장인물들이 마치 진짜인 것처럼 믿으시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재미있게 보시는 거지 모두 연기라는 것은 알고 계셨다.
애국가가 나올 때까지 텔레비전을 보셨다.
졸고 계셔서 들어가셔서 주무시라고 하면 자리를 고쳐 잡고 무거운 눈꺼풀을 다시 올리셨다.
어떤 때는 AFKN 미국방송도 잘 보셨다. 어차피 영어든 한국말이든 이모님에겐 말이 안 들리니 마찬가지셨다.
이모님에겐 텔레비전이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하고도 재밌는 창문이었다.
내가 힘들어 보일 때면 이모님은 언제나 내 어깨를 다독여 위로를 해주셨다.
큰엄마가 생모에게 맨날 잔소리를 했던 것처럼 시어머니도 똑같이 시어머님보다 한 살 위인 듣지도 못하시는 이모님에게 소리를 지르셨다.
음식도 잘하신 것 같은데 이게 왜 이래 저게 왜 이래 별것 아닌 걸로 이모님을 화나게 하셨다.
이모님이 만드신 음식은 맛있어서 언제나 밥이 모자랐다.
이모는 내 앞에서도 그런 수모를 당하시자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아침 먹고 치우고 두어 시간 후부터 다시 점심식사 준비를 하시고 또 저녁식사를 준비하셨다.
삶이 이게 무엇이란 말인가?
하루 종일 일만 하셨다.
나의 엄마처럼 똑같이 사셨다.
남편은 이모와 친구처럼 지냈다. 비빔밥을 양푼에 한가득 만들어
둘이 숟가락으로 퍼먹었다.
그 맛은 최고였다.
그래서인지 남편은 결혼하고 내가 만든 음식이 맛있다고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공포영화를 보고 무서우면 이모 옆으로 가서 잠들었다.
시부모님이 크게 다투는 날에는 이모님이 남편의 귀를 막아주고 다른 방으로 데려갔다.
남편이 크고 나서는 이모님을 보호하였다.
거스름돈을 맞게 챙겨주지 않거나 부당한 대우를 하는 가게에 가서 따지기도 했다.
남편은 결혼을 한 뒤에도 이모에게 장난을 치고 이모를 웃게 만들었다.
남편과 눈만 마주쳐도 이모는 웃을 준비를 하셨다.
우리가 이민을 오고 시부모님도 이민을 오시면서 이모님이 서울에 남게 되셨다.
이건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우리는 시부모님이 이민을 오실 거라 생각하지 못했었다.
이모님이 이민오시기는 쉽지 않았고 방문자로만 입국이 가능했다.
캐나다집에 방문자로 시부모님과 함께 오셔서 얼마간 계셨는데 서울이 편하신 것 같았다.
결국 무연고자 자격으로 서울의 요양원에 들어가셨다.
남편은 엄마 같고 친구 같던 이모님을 그리워했다.
가게를 그만두고 나서 남편이 과거에 수술했던 허리가 안 좋아져서 재수술을 하러 서울에 갔을 때 이모님이 계신 요양원을 찾아갔다.
13년이 지났는데 이모님은 얼굴은 그대로이시고 머리만 하얘지셨고 윌체어에 앉아계셨다.
남편과 내가 반가움의 눈물을 흘렸다.
이모님도 눈물을 흘리시며 남편의 손을 놓지 않았다.
잠시 남편과 수화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나를 보시고 쟤는 누구냐고 하셨다.
나는 어리둥절하였다.
아까 인사를 드리고 반가워하셨는데
사실은 나를 몰라보고 계신 거였다.
결혼한 내 부인이라고 남편이 말했다.
아 그러냐고 예쁘다고 하셨다.
“나를 잊으셨구나” 믿기 어려웠다.
남편에게 너는 왜 얼굴이 늙었냐고 하셨다. 젊을 때 모습의 남편으로 기억하고 계셨다.
잠시 후 나를 보시더니 쟤는 누구냐고 하셨다. 우린 다시 어리둥절하면서
다시 똑같이 결혼했고 부인이라고 했다. 아 그렇구나. 조금 지나서 나를 보시면
또다시 재는 누구냐?
우리는 계속 반복하여 물으시는 질문에 웃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 질문은 열 번도 넘게 계속되었다.
우리는 슬픔을 웃음으로 바꾸는 신기한 경험을 하였다.
이모의 기억 속에서 이미 잊힌 나도 울다가 웃다가.
코미디 같았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몇 번을 더 찾아가서 만났다.
이모님은 편해 보이셨고 잘 지내고 계셨다.
마지막 방문 때 직원에게 이모님과 같이 찍은 사진을 두고 가도 되냐고 물었는데 안 그러는 게 좋다고 하셨다.
그리움이 생기면 이모님이 힘들다고 하셨다.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우리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를 직원에게 남기고 무거운 발걸음을 떼었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신 후에 이모님이 계신 서울 요양원에 전화를 했다.
직원이 이모님이 아주 편안하게 돌아가셨다고 말해줬다.
이메일을 보냈는데 연락이 안 되어서 화장을 해서 수목장을 했다고 했다.
이멜을 확인하니 이메일 주소에 점이 하나 빠져서 적혀 있었다.
이모님도 시아버님과 비슷한 시기에 돌아가신 걸 알았다.
우리는 캐나다에 돌아와 두 분의 이름을 붙이고 제사를 지냈다.
그 시대에는 가족 외의 사람을 데리고 살아야 복이 들어오는 팔자라고 점쟁이가 누군가에게 말하기도 했었다.
하느님은 그렇게 메시지를 보내서라도 홀로 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려 하셨던 게 아닐까?
나도 순간순간 그런 도움을 받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니 남편도 나처럼 어머니가 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