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답노트를 찢고 날아오르다
엘리베이터 거울 속의 나는 바보처럼 울고 있었다.
13년 전, 편의점 처마 밑에서 자전거를 타고 멀어지던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내가 했던 생각은
“나쁜 놈, 나를 버리고 가다니.”였다.
하지만 지금 내 손바닥 위에서 빛나는 문자는 전혀 다른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비 많이 오는데 처마 밑에서 움직이지 마. 우산 사서 다시 갈게. 기다려.”
"아유 바보같이... 이걸 왜 이제 보내..."
그는 빗속을 뚫고 우산을 사러 갔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금방 자리를 떴고, 우리는 그렇게 13년을 엇갈렸다.
내 인생에서 가장 차가웠던 기억이, 문자 한 통에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기억으로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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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감동은 짧았다. 다음 날 아침, 민수가 보내준 SNS 캡처 한 장이 나를 다시 현실로 끌어내렸다.
(박준석, 드디어 장가 가나? S그룹 막내딸이랑 호텔 라운지 포착! 꽃다발까지 준비한 센스 보소.)
사진 속 그는 어제 나를 태워다 주던 그 차 옆에서, 내가 안고 내렸던 것과 똑같은 분홍색 꽃다발을 들고 우아한 차림의 여자와 웃고 서 있었다.
”뭐야? 어제 그 문자는... 그냥 미안해서 보낸 팬 서비스였나?”
민수는 내가 준석이와 헤어진 후에 나에게 끊임없이 연락을 해왔다. 패션 디자이너로 일하며 가끔 모델도 하느라 바빠서 매번 차갑게 대했지만 민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언제나 내 주위를 맴돌았었다. 그리고 지금 나에게 그 사진을 (속보) 인양 보내주었다. 그는 왜 항상 우리 사이에 끼어있는 걸까?
나는 옷장을 열었다. 세탁소에서 입었던 눅눅한 티셔츠 대신, 가장 부드럽고 비싼 실크 네이비 블라우스와 허리라인을 날카롭게 잡아주는 흰색 와이드 슬랙스를 꺼냈다. 그리고 9cm 스틸레토 힐을 신었다.
그가 나를 “우산을 사러 가서 기다리게 했던 옛사랑" 쯤으로 여기며 동정을 베풀게 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거울 앞에서 마지막으로 입술을 짙게 칠했다. 13년 전, 빗물에 젖어 속이 다 비치던 얇은 교복 셔츠는 이제 없다.
대신 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실크의 서늘한 감촉이 내가 살아온 시간을 증명하고, 다이아몬드 피어싱이 그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호텔 라운지의 육중한 문을 밀고 들어설 때, 바닥을 때리는 내 구두 굽 소리는 마치 정적을 깨는 경고음 같았다. 서른한 살의 여자가 깨어나고 있었다.
호텔 라운지 스피커에서는 날카로운 바이올린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아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서늘한 그 음악은, 지금 내 속을 뒤집어놓은 배신감과 기묘하게 닮아 있었다.
모델 파워 워킹으로 걷는 내게 호텔 라운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나를 발견한 남자는 당황한 듯 서둘러 고쳐 앉았지만, 나는 그가 앉은 소파의 높이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그를 내려다보며 섰다. 내 옷자락에선 어제의 비 냄새 대신, 차갑고 도시적인 향수 냄새가 났다.
“음악 좋네. 근데 박준석, 네 손에 든 그 꽃다발... 어제 나한테 준 거랑 너무 똑같지 않아? 너 혹시 사과도 대량 구매해서 여기저기 뿌리고 다니니?"
준석은 급히 말을 얼버부리며
“왔어? 앉아. 여긴 웬일이야? 이거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냐.”
“준석아, 13년 전에 나한테 보내려던 그 “우산 문자” 말이야. 혹시 오늘 네 옆에 앉아 있는 저 여자한테도 보낼 예정이었니? 넌 여전히 빗속을 뛰어다니느라 바쁘구나."
어제 받은 문자 한 통이 내 13년의 원망을 녹였다면, 오늘 아침 도착한 사진 한 장은 내 31살의 자존심을 날카롭게 깎아 세웠다. 호텔 라운지의 공기는 서늘했고, 그곳에 앉아 있는 그는 어제보다 훨씬 더 낯선 사람처럼 보였다.
어제 내 눈시울을 붉히게 했던 꽃다발의 그 향기가, 오늘은 호텔 라운지의 인공적인 방향제 냄새보다도 못하게 느껴졌다.
엉거주춤 당황하며 일어서는 그에게 나는 우아하게 말했다.
"어제 그 “우산 문자” 고마웠어. 덕분에 13년 전 숙제는 끝냈거든. 근데 박준석, 너는 여전히 답을 못 찾은 모양이네."
“준석아, 13년 전의 나는 네 우산을 기다리느라 비를 다 맞았지만, 31살의 나는 네 변명을 듣느라 내 귀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그만 가볼게.
다시는 우연이라도 내 앞에 나타나지 마"
그를 향했던 나의 첫사랑 13년 동안의 끈질기고 가녀린 미련의 줄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기다려 내가 다 설명할게”
뒤돌아 걷는 내내 스틸레토 힐 소리가 라운지의 대리석 바닥을 얼음송곳처럼 찔러내며 경쾌한 소리를 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 뒤를 따랐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라운지를 빠져나와 마주한 햇살은 어제 맞았던 비보다 훨씬 눈부셨다. 13년 만에 도착한 “우산 문자”는 내 과거를 구원했지만, 오늘 나의 발걸음은 내 미래를 선택하고 있었다.
투명한 햇살 아래로 나서는 순간,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던 열여덟 살의 나를 발견했다. 비에 젖어 떨고 있던 그 아이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 안아주었다.
”이제 괜찮아. 넌 더 이상 누군가의 우산을 기다리지 않아도 돼. 네 손엔 이미 세상을 향해 펼칠 수 있는 너만의 날개가 있으니까.”
나는 가방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13년 전의 오답 노트를 찢어버린 자리에는,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눈부시게 하얀 새 페이지가 펼쳐져 있었다.
누구의 연인도, 누구의 과거도 아닌, 오직 “나”로서 시작하는 서른하나의 여름.
입가에 번지는 미소가 햇살 속에 부서지며 앞으로 다가올 밝은 미래를 향해 닻을 올리고 있었다.
나의 31살 여름, 진짜 게임은 이제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