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허설은 끝났다 2화

선(線)을 넘지 못한 선율

by 하얀 나비

지훈은 아인슈페너의 차가운 크림을 한 모금 삼키며 수진의 낡은 피아노 곁으로 다가갔다. 평소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무모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서툰 쇼팽 연주가 밴쿠버 대강당의 완벽한 조율보다 더 강렬하게 그의 심장을 두드리고 있었다.


"방금 그 부분 말입니다. 7마디째에서 왜 멈추셨나요?"


수진은 돋보기를 코끝에 걸친 채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엔 경계심 대신 맑은 호기심이 서려 있었다.


"아... 들리셨나요? 여기가 참 묘해요. 악보에는 분명 '시'라고 적혀 있는데, 제 손가락은 자꾸만 '라'를 누르고 싶어 하거든요. 제 할아버지가 남긴 이 자수보 때문인가 봐요."


수진이 테이블 위에 펼쳐 놓은 것은 누렇게 바랜 천 위에 형형색색의 실로 놓인 기하학적인 무늬였다. 지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자수보를 살폈다. 그것은 단순한 꽃무늬가 아니었다. 실의 높낮이와 매듭의 간격이 마치 악보의 오선지처럼 배열되어 있었다.


"이게... 지도인가요?"


지훈의 물음에 수진이 낮게 웃었다.


"할아버지는 이걸 '소리의 지도'라고 부르셨죠. 빈의 어느 무명 작곡가가 남긴 미완성 곡을 자수로 옮겨놓으신 거래요. 마지막 마디를 소리로 완성하는 사람만이 진짜 보물을 찾을 수 있다면서요."


지훈은 자신도 모르게 수진이 비켜준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30년 동안 아내와는 단 한 번도 맞춰보지 못한 '마음의 튜닝'이, 처음 본 이 여자의 엉뚱한 이야기 앞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건반을 눌렀다. 수진이 멈췄던 그 7마디. 지훈의 손가락은 자수보의 푸른 실매듭을 따라 '시'가 아닌 '라'를 향해 미끄러졌다.
빰—.
낡은 피아노에서 흘러나온 그 한 음이 카페 슈페를 의 공기를 가르며 공명했다. 수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에... 바로 이 소리였어요! 지훈 씨, 당신 정체가 뭐예요?"


그때,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했다. 밴쿠버에 있는 아내 혜란에게서 온 짧은 문자였다.


"저녁은 챙겨 먹었어? 밴쿠버는 비가 오네. "


늘 평범했던 아내의 안부 인사가 오늘따라 낯선 불협화음처럼 지훈의 가슴을 찔렀다. 그는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수진의 화려한 자수보로 시선을 돌렸다.


"제 정체요? 글쎄요... 평생 남의 악보만 완벽하게 읽어주다, 정작 제 인생의 악보는 읽지 못해 도망쳐온 낙오자라고나 할까요."


지훈은 수진을 향해 처음으로 소년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수보의 매듭들은 사실 할슈타트의 지형을 본뜬 것이었다. 푸른 실은 호수를, 촘촘한 갈색 매듭은 소금 광산의 입구를 뜻했다.


"수진 씨, 그 보물지도... 제가 같이 풀어봐도 될까요? 잃어버린 풍경을 찾는 여행 말입니다."


덜컹거리는 기차 안, 창밖으로는 오스트리아의 눈부신 알프스 자락이 펼쳐졌다. 창문에 비친 지훈의 얼굴엔 엄격한 피아니스트 대신 모험을 앞둔 소년이 있었다.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지훈은 30년 동안 아내에게도 하지 못했던 마음속 깊은 불협화음들을 꺼내 놓았다. 낯선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은밀한 고백이었다.

그때, 수진이 가방에서 낡은 수첩 하나를 꺼내 건넸다.


"할아버지의 메모예요. '완벽한 연주자는 보물을 찾지 못할 것이다. 오직 틀린 음 속에서 진실을 듣는 자만이 문을 열리라.'"


'완벽함'이라는 감옥에 갇혀 살던 지훈에게 던지는 경고 같았다.


"수진 씨, 만약 보물을 찾게 된다면... 제 인생도 다시 조율될 수 있을까요?"


수진은 대답 대신 지훈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가만히 얹었다. 밴쿠버에서 아내와 나누던 습관적인 손잡기와는 전혀 다른, 거칠지만 따뜻한 위로였다. 기차는 안개 낀 할슈타트 역을 향해 달려갔다.


역에서 내린 그들을 맞이한 것은 서늘한 물안개였다. 산등성이에 박힌 집들은 자수보의 입체 버전 같았다. 지훈은 시간이 박제된 듯한 이 마을의 공기에 압도당했다. 보트 하우스 뒤편, 이끼 낀 바위 앞에 선 두 사람이 낡은 철제 상자를 찾아낸 순간, 동굴 벽에서 돌더미가 무너져 내렸다.


지훈은 본능적으로 수진을 감싸 안으며 뒤로 몸을 날렸다. 쾅쾅—! 커다란 바위가 그들이 서 있던 자리를 덮쳤고 주위는 다시 적막에 잠겼다. 손등에서 피가 배어 나왔지만 지훈은 수진의 안위를 먼저 살폈다. 좁은 공간, 서로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거리. 지훈은 깨달았다. 자신이 도망쳐온 것은 아내가 아니라, 감각을 잃어버린 채 박제되어 가던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을.


안개 낀 호숫가 벤치에서 수진이 지훈의 손등을 손수건으로 감싸주었다.


"지훈 씨, 당신은 연주할 때보다 지금 더 따뜻한 소리를 내는 사람 같네요."


수진의 나직한 목소리에 지훈의 이성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홀린 듯 그녀에게 다가갔다. 차가운 물안개 사이로 입술이 닿았다. 30년 전 첫사랑에게서 느꼈던 순수한 떨림이자, 평생 쌓아온 삶이 무너지는 공포였다. 그 찰나의 순간, 지훈은 비로소 악보 위에는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진짜 선율을 들었다.


입술이 떨어졌을 때, 지훈의 눈에 들어온 것은 수진의 자수보 위에 놓인 자신의 낡은 결혼반지였다. 할슈타트의 평화로운 종소리가 멀리서 울려 퍼졌다. 그것은 축복이라기보다, 돌아가야 할 곳을 알려주는 경적소리처럼 들렸다.


우리는 그 이상의 문을 열지 않았다. 뜨거웠던 숨결 사이로 할슈타트의 시린 새벽 공기가 스며들었고, 그것은 서로의 삶을 더는 침범하지 않겠다는 소리 없는 약속이기도 했다.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뜬눈으로 아침을 맞이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깊은 예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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