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학전집 50 [수레바퀴 아래서]

줄기가 잘린 나무는 다시 자랄 수 있는가

by 무거

*230330 감상문 백업


수레바퀴 아래서 - 헤르만 헤세 (코너스톤)


※결말 스포일러 있음~



오늘은 읽은지 한 달은 족히 넘은 수래바퀴 아래서의 후기를 써 볼까 한다.

이걸 지금에야 쓰는 이유는 솔직히 말하면 글 쓰는 걸 까먹었기 때문이고... 조금 변명을 뒤섞자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신경을 한참 썼기 때문이다. 더더욱 솔직히 말하면 내가 지금 여기서 여러가지 모든 것을 잘하고 있나 걱정이 되고 우울한 기분이 다시금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아서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이다. 원래 우울해질 것 같으면 이렇게 글로 여러 복잡미묘한 기분을 풀어내는 것이 좋으니까.....



그렇지만 일기로 쓰기엔 내 감정을 마주하기가 부끄럽고 무서우니 이렇게 독후감이라도 쓰려는 것이다!!! 우울한 감정은 그만!!!!!!



수레바퀴 아래서는 데미안 보다는 덜 알려진 헤세의 소설일 것이다. 당연히 유명한 책이지만!! 데미안에 비해서 말이다. 솔직히 나도 이런 책이 있다는 것을 몰랐었는데 어쩌다보니 알게 되어서 이렇게 책을 구매하게 되었다.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고 느낀 점은 나는 헤르만 헤세의 작품과 아주 잘 맞는다는 사실이었다.

솔직히 나는 그렇게 머리가 좋지도, 집중력이 좋지도 않은 사람이다. 그래서 다른 고전 문학들은 읽다가 때려친 경우가 많은데 헤르만 헤세의 글은 두 권 밖에 읽지 않긴 했지만 앉은 자리에서 다 독파해버렸다.

헤세가 글을 잘 써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가 만들어내는 문장에 내가 반해버린게 큰 것 같다.

헤세는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마음 속의 흐릿했던 감정들과 생각들을 글로 구체화해주는 것 같다. 내가 항상 어렴풋이 마음 한 구석에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그는 정제된 말로 끄집어내어 소설에 쓴다. 그 글을 읽으면 나는 내가 이런 생각을 했고, 그걸 글로 읽는다는 수치심이 드는 것과 동시에 이러한 생각을 숨기지 않고 글로 표현할 수 있는 헤세에게 동경과 질투심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나는 헤세의 글이 좋은 것 같다.



뭐 아무튼 헤세 덕질 이야기는 그만하고 본론으로 돌아가서,



수레바퀴 아래서는 전에 후기를 썼던 글인 데미안에 비해서는 쉬운 내용의 글이다. 어렵거나 의미가 숨겨져있는 문장도 딱히 없고, 그냥 글을 따라가기만 하면 이해가 간다. 그래서 내가 앉은 자리에서 완독을 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벼운 내용의 책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 이 글의 끝은 데미안보다도 씁쓸하니까.



나는 좋은 작품이란 국적, 성별, 시대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수레바퀴 아래서는 나와 현대인들에게는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햐다. 왜냐하면 수레바퀴 아래서에는 현재, 그리고 나와 친구들이 학창시절에 겪었던 성적과 공부에의 스트레스가 그대로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비록 100년 전의 글이지만, 이 책 안에는 현대의 한국인들이 겪었던, 그리고 겪고 있는 학벌주의와 입시에 의한 병폐가 이 책 안에는 담겨 있다.



그리고 오늘도 역시 내가 읽으면서 눈길이 갔던 문장들과 내 생각을 엮어서 책에 대한 감상을 남기도록 하겠다.



1.



한스는 남들보다 앞서고 싶었다. 왜 그래야만 하는 지는 자신도 알지 못했다.




이 구절은 소설의 극초반부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별 내용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이 구절이 계속해서 신경 쓰였다. 마치 종이에 베인 상처를 발견했을 때처럼 말이다. 그렇게 크게 다가오는 무언가는 아니지만 묘하게 거슬리고 신경쓰이는 그런 느낌.



이 구절을 보면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느낌을 느끼지 않을까? 학창시절에 우리는 말하곤 했다. 공부를 왜 해야하냐고.



대학에 가기 위해서라고는 했지만 진심으로 그것을 납득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쉽게 납득한 사람도 적을 것이다. 그냥 주위의 친구들이 다들 성적을 올리려고 노력을 하니까, 다들 대학을 가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퍼져있으니 그럴 뿐, 자신이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스스로가 원해서 진심으로 공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목적의식이 없이 공부하는 사람은 금방 지치게 된다. 이 말을 의지력이 있어야 공부를 잘한다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데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그게 아니다.



어찌되었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제일 필요한 건 의지가 아닌 환경과 관성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의지는 어쩔 수 없이 고갈된다. 그렇지만 공부를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환경과 습관이 조성되고, 자신이 어떤 것인가를 이루고자 하는 명확한 이유가 있으면 의지가 부족하다고 해도, 그 사람은 목표를 향해 망설임이 없이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쉬울 것이다. 목적지가 있다. 그리고 그곳에 도달하고 싶어하는 사람 A와 가고 싶어하지는 않지만 주위에서 가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가려는 B가 있다. 만약 이 둘에게 정글을 통과해서 목적지에 가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솔직히 둘 다 실패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에게 편한 길을 조성해준다면 어떨까? A는 즐거운 마음으로 목적지를 향해 걸어갈 것이다. B 역시도 걸어가겠지만 왜 거기에 가야하는지에 대한 불만과 의문 때문에 A 보다 느리게 가거나 가는 걸 포기하지 않을까.



만약 자신이 어떤 일을 왜 해야하는 지도 모르고 살아간다면 아무리 환경이 잘 조성되어있고, 길이 고속도로처럼 닦여있다고 해도 우리들은 다른 길로 빠지거나 중간중간 멈출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목적지로 가는 것은 어떠한 이유가 있기 때문인데, 이유도 없이 그곳을 향한다면 아무리 좋은 길이라도 발걸음이 즐겁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 뿐만이 아니라 대다수의 성인들이 고등학생 때 했던 공부를 떠올리면 끔찍해하는 것이다. 외부의 압력 때문에 공부한 기억이 대다수니까.



나야 지금은 성인이 되었고, 내가 공부하는 이유와 목표를 스스로 정했지만(그렇다고 해서 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은 스스로 이유는 찾지 못한 채 남이 닦아놓은 길만을 걸어가도록 강요받는다.



이는 이 소설의 주인공인 한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주위에서 들어온대로 남들에 비해 앞서고 싶어하지만,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하지만 그 이유는 자신도 모르고 있으니까. 그래서 최악의 결말을 맞이하게 되니까.



단 두 문장이다. 그것도 짧디 짧은 문장. 겨우 이 두 문장만으로 먹먹한 기분이 들게 된다는 것이 참 신기한 것 같다.





2.


한스는 독특한 친구와의 우정이 자신을 지치게 하고 순수한 영혼을 병들게 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하지만 우울한 타일러를 보면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다. 또한 자신이 그 친구에게 꼭 필요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어 정겨움과 자랑스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한스는 하일러의 병적인 우울증이 자신이 감탄하는 그의 본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구절 역시도 학창시절의 비틀린 우정을 까발린 것 같아서 기억에 남은 구절이다.


그 당시에는 몰랐거나 내 감정을 회피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의 진심을 알게 되는 때가 있다. 타일러와 한스의 관계를 보면서 나 역시도 그것을 느꼈다. 나 역시도 이런 관계의 친구가 있었으니까.


헤세는 이 구절 안에서 인간관계에서의 다양한 생각과 감정들을 표현하고 있다. 어리석음, 애정, 동정, 자만, 신뢰 등등. 인간이 어떠한 다른 인간에게 느끼는 감정은 하나로 딱 정의할 수 없다. 여러가지 복합적인 감정들로 끈끈하게 얽혀있다. 그것이 좋아하는 사람과의 관계라고 해도 말이다. 이 문장만 보아도 우리는 그것을 느낄 수 있다.



한스는 지금 자신의 친구 관계가 건강한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만 그것을 끊으려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친구를 안타깝게 여김과 동시에 그러한 친구에게 자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에서 기쁨을 느끼기까지 한다.



우리는 말하곤 한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관계는 끊는 것이 맞다고.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한스처럼 생각하고 이러한 관계를 계속해서 유지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이것을 좋다, 나쁘다라고 이분법적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이러한 오묘한 관계에 대하여 헤세는 잘 서술하고 있다. 인간관계에서 좋은 것만 얻을 수는 없다. 좋은 점을 배움과 동시에 나쁜 영향 역시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한스와 타일러의 관계 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많은 인간관계가 그렇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자세하게 그런 관계를 맺는 사람의 속마음을 알게 되니 찝찝함과 동시에 찔리는 느낌이 드는 기분이다. 그렇지만 나는 헤세의 이러한 묘사가 너무나도 좋은 것 같다. 음침하고 찝찝한 생각을 이렇게 짚어줌으로써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니 말이다.



3.


줄기가 잘린 나무는 뿌리 가까이에서 새순이 싹튼다. 상처 입은 영혼은 이와 같이 봄 같은 그 시절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새순이 상처를 치유하는 새 희망처럼 자란다고 해도, 다시 제대로 된 나무가 되지는 못한다.


이 문장은 읽고나서 내가 잘못 읽었나 싶어서 다시 읽었던 문장이다. 조금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나 할까. 보통은 뿌리가 죽지 않은 나무는 다시, 더 튼튼하게 자란다는 비유를 많이 쓰는데 여기서는 줄기가 잘린 나무가 다시 자라기는 하지만 제대로 된 나무는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 비유가 신선하고 신기하게 느껴졌다. 실제로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뭐 헤세가 말했으니 맞겠지.



그렇지만 지금까지 보았던 나무들을 생각하면 맞는 말 같기는 하다. 비뚤게 자란 나무들을 보면 원래 자라던 줄기가 잘리고, 새로 자란 줄기에서 커진 나무들이 많았다. 아마 헤세가 이야기 하는 것도 그런게 아닐까 싶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 역시도 같다. 상처가 치유된다고 해도 흔적은 남아있다. 상처를 받기 전의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더 단단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처입은 나무가 진액을 내뿜어 더 단단해지듯이, 사람 역시도 상처를 입고 나면 예전처럼 순수하고 올곧은 사람으로 돌아가지는 못해도 더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스 역시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았을텐데, 그럴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아래 구절에서 확인하자.



4.


의사는 그에게 물약과 간유, 달걀을 먹으라고 했으며, 냉수 목욕도 권했다. 그러나 어떤 것도 효과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한스에게는 삶을 지탱해주는 의미와 목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우울증을 진단받은 한스의 상황을 나타내는 구절이다. 의사가 권유해준 것들은 우울증을 치료하는 치료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한스에게는 듣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뿌리가 이미 죽은 나무에게 아무리 좋은 영양제를 많이 투여해도 그 나무는 다시 되살아날 수 없다. 한스에게는 그 뿌리가 되는 삶의 의미와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어떤 치료를 한다고 해도 돌아올 수 있을 리가 없다.



이 구절에서 나는 그가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그렇게나 열심히 살았는데, 삶의 주체를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맡긴 탓에 한스는 중심을 잃었다. 과연 이것을 한스의 탓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의 의지부족 탓이라고 말해도 되는걸까? 한스의 부모, 교사, 주위 사람들 모두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그 누구라도 한스의 이러한 이변을 알아채고, 삶의 의미를 찾아주고, 희망을 불어넣어줬다면 한스는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건 어른들의 잘못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삶을 지탱해주는 의미와 목적을 찾으려고 해야한다. 나를 즐겁게해주는 무언가를 만들어야한다. 그래야지만 우리는 힘든 일이 나를 괴롭힌다고 해도 계속해서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호기롭게 글을 쓰긴 했지만 나 역시도 아직 나를 완전히 지탱해주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작은 것들 하나하나가 나를 위태롭게 지탱해주고 있으니 아직은 괜찮지 않을까? 나를 좀 더 단단하게 지탱할 수 있도록 멘탈을 조금 더 단련하고 지속가능한 나만의 낙원을 가꾸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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