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밤이다. 주말에 꼭 특별한 일이 있지 않아도 평일 내내 하던 일을 잠시 내려놓고 쉼표를 찍을 수 있으니 좋다. 내일이 휴일이라 무엇을 해도 부담이 없다. 나는 희미한 보조 등을 켜고 작은 테이블에 시원한 맥주 한 캔, 간단한 안주, 리모컨을 준비한다. 결혼 전 술 한 모금도 마시는 것을 꺼렸기에 맥주 한 캔은 대단한 일탈이다. 아이들이 TV 소리에 깰지 모르니 음량 버튼을 조절한다. 평일에는 아이들과 같이 자지만 금요일 밤만큼은 느긋하게 대놓고 내 시간을 보낸다.
내가 서른이 되었을 때 결혼할 상대가 없어 초조하고 불안했었다. 요즘은 서른은 결혼하기 이른 나이가 되었다. 독신 남녀와 1인 가정도 늘어나고 있다. 이런 것을 반영해 혼자 사는 유명인들의 일상을 관찰 카메라로 담은 다큐 형식의 예능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 ‘나혼자산다’는 나의 최애 TV 프로그램이다. 서른 초반에 출연한 진행자들도 이제 서른 중후반이 되어간다. 결혼에 대한 환상이 두려움으로 변하고 이제는 혼자 사는 게 익숙하고 재미있어 결혼 생각은 딱히 없다고 말한다.
나는 다른 출연자보다 기안84가 나오는 회차를 더 즐겨본다. 투박해 보이는 그의 앞머리는 이번에도 셀프로 싹둑 자른 듯 삐뚤삐뚤 삐져나와 있고 브라운 색깔의 코르덴 셔츠는 자주 봐서 익숙해졌다. 기우뚱한 자세로 앉아 어색한 표정을 짓고, 상황과 어울리지 않은 말들은 엉뚱해서 재미가 있다. 다른 유명인의 일상보다 그의 일상을 보는 것이 편안하다. 그는 웹툰 작가이다. 나는 한 번도 그의 작품을 읽어보지 않았다. 웹툰은 가볍고 유익하지 못하다는 고정관념을 가진 참으로 어리석은 1인이었기에 선뜻 내키지 않았다. 내가 재미있게 보던 드라마가 웹툰이 원작이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그의 일상을 들여다보자. 그는 위에 옷을 걸치지 않고 하얀 속살을 드러내고 쿰쿰한 냄새가 날 듯한 때에 찌든 이불을 살짝 걸친 채 일어난다. 이불을 돌돌 말아서 구석에 놓인 옷들과 수건인지 걸레인지 모를 것과 함께 세탁기 안으로 쑤셔 넣고 세제도 한꺼번에 쏟아서 붓는다. 그런 다음 냉장고 문을 벌컥 열고 보이는 반찬들을 들고 와서 달구어지지도 않은 프라이팬에 때려 넣는다. 멀쩡한 테이블을 놔두고 바닥에 앉아 음식을 우적우적 먹고 맛있다고 한다. 저러다 배탈 나는 게 아닌지 걱정스럽다.
밥을 먹고 나서 이가 부서질 듯 과격하게 양치질한다. 그러다 샤워기를 틀고 머리를 휘리릭 감는다. 앞머리가 길다 싶으면 주방 가위를 들고 막 자른다. “띠리링”하고 세탁 완료 소리를 듣고 후다닥 나와서는 빨래를 꺼내와 뒤죽박죽 쌓아 놓는다. 의식의 흐름대로, 날 것 그대로 움직이는 사람 같다. 나도 모르게 참견하고 부정하다가 서서히 그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니 이해되었다. 세탁물 구분 없이 한꺼번에 돌리고 싶은 충동이 생길 때도 있었다.
장면이 바뀌고 외출 준비를 하고 길을 나선다. 사진관에서 서른 마지막 기념으로 독사진을 찍기도 하고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하루는 무작정 달리기도 한다. 주로 혼자서 보낸다. 어설픈 준비로 “아이코”를 연발하게 만들다가도 마흔을 준비하여 찍은 사진을 보거나 완성된 그의 그림을 보면 “어머나”하고 감탄하게 한다. 그는 몸치, 음치지만 가요를 자기식대로 부르고 막춤을 춘다. 시상식에서 두서없는 말로 동료들을 조마조마하게 만들고 긴장감을 준다. 그래서 채널을 돌리지 않고 몰입해서 보게 된다.
몇 년 전에 기안84가 한 해를 마무리하며 1박2일 56km 달리기에 도전한 적이 있었다. 그는 마라톤을 하면서 아무 장비로 갖추지 않은 채 평소 옷 그대로 입고 마스크를 쓰고 오직 목적지만을 향해 뛰었다. 지치고 힘든 몸을 겨우 버텨 도착한 곳은 오이도였다. 거기에 도착했을 때 안도의 탄성을 지르며 바닷속을 과감하게 뛰어 들어갔다. 그 장면을 인상 깊게 봐서 집과 멀지 않은 시흥이라 주말에 나들이 삼아 오이도에 갔다. TV에서 봤던 오이도 빨간 등대 앞에서 가족들과 사진을 찍었다. 한 번도 직접 만나보지 않았지만 그가 뛰어온 길을 가족들과 잠시 뛰어봤다. 기안84가 다녀온 곳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린 식당에서 같은 메뉴를 시켜 먹으며 인증 사진을 찍었다. 그가 땀 흘리며 하루 내내 달려왔던 길을 나는 자동차로 20 여분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기안84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우리 집에 관찰 카메라가 있다면 어떻게 할까? 잠시 상상을 해보았다. 수십 대의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집에서 나는 어떻게 할까? 아침이 되면 침실에서 가족들 모두 위아래 세트의 잠옷을 입고 계절에 맞게 새로 산 이불을 갠다. 기지개를 켜고 일어난다. 평소 하지 않던 메이크업을 하고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 간다. 호박, 감자를 채 썰고 보글보글 된장찌개를 끓이고 두툼한 계란말이를 한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들을 깨운다. 아이들은 눈을 찡긋거리며 순순히 자기 이불을 정리한다. 상상만 해도 가식적이다. 사실 그보다 카메라 앞에 설 자신이 없다. 날 것의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낼 수 있으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신경 쓰지 않는 단단한 자존감이 있어야 한다.
처음 기안84가 프로그램에 나왔을 때 연재 마감 시간에 쫓겨 웹툰을 그리면서 사무실에서 자고 화장실에 머리를 감는 모습으로 시작했다. 몇 년이 훌쩍 지난 지금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다. 몇 년 동안 악성 댓글에 시달리고 비웃음도 받으면서도 견뎌냈다. 혐오가 호감으로 되기까지 꾸준함으로 대체 불가의 매력을 보여주었다. 급기야 요즘은 기안84가 대세가 되었다.
그의 일상은 웹툰 작가보다는 예능인이라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본업을 하는 모습이 나오면 감탄하게 된다. 영어를 잘 못해도 개인 전시회에서 도슨트도 하고 열심히 준비하는 모습이 꽤 멋있었다. 영국 전시회도 성공적으로 했다고 한다.
기안84는 매번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목표를 하나씩 달성해나갔다. 그야말로 인생을 즐기는 모습은 대단했다. 운동을 꾸준히 해서 모델에 도전하기도 했을 때 프로모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곧바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평상시 입던 옷을 입고 다녔다. 함께 진행하는 동료가 놀려대도 그냥 편한 그대로 옷을 입었다. 신발도 마음대로 색칠하고 타고 다니는 자동차까지 페인트로 칠했다. 모든 것이 성공적이지 않았고 실패투성이도 많았다. 그가 실패할 때면 미안하지만 오히려 더 웃겼다.
기안84의 일상은 일반적인 유명인과는 다른 평범한 일상이었다. 화려한 SNS를 따라 하지 못해도 기안84처럼 하루를 보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이제는 오히려 핫플레이스, 맛집, 명품백, 자식자랑, 남편자랑 하는 SNS가 더 싫증이 난다. 먹고 싶은 음식을 카메라에 먼저 양보하지 않고 맛있게 먹고 때로는 야외에서 돗자리를 깔고 김밥을 먹고 다른 사람 신경 안 쓰고 대자로 누워 하늘을 보는 것도 좋았다. 최신가요를 들으며 핏대를 보이며 따라 부르고 박자와 동작이 맞지 않아도 춤을 따라 추면서 즐기는 딸을 보면서 나도 배꼽 잡고 웃었다. 주말 저녁 ‘뭐 먹을까?’ 하다가 냉장고 반찬을 다 꺼내 볶음밥을 만들어보았다. 우려한 것과 달리 맛있었다. 맛있으면 됐다.
기안84를 보고 있으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뭔지 생각하게 한다. 생각해 보면 내가 정작 원했던 것은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혼자서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책을 읽는 것, 책을 읽고 의견을 나누는 것, 나의 일상을 글로 적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어뒀다. 남들을 의식하거나 잘못할 것 같은 두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그를 보면서 용기를 내본다. 뭘 해도 안 하는 것보다 나을 것 같다.
기안84 대상 축하합니다.
예전에 제가 쓴 글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