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위해 죽음을 보러 길을 나서다

CosmoNomad

by 전상희 js

살기 위해 죽음을 보러 길을 나서다

3탄 니코스 카잔 차키스 - 크레타

지중해의 징검다리

크레타는 아프리카 판과 유라시아 판이 충돌하며 솟아오른 지형이다. 이 때문에 섬 전체에 험준한 산맥(이디 산 등)과 깊은 협곡(사마리아 협곡)이 발달했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를 잇는 지중해 정중앙에 위치하여, 고대부터 해상 무역의 중심지이자 문화적 교차로 역할을 했다. 판의 경계에 있어 지진이 잦았으며, 인근 테라(산토리니) 섬의 거대한 화산 폭발은

크레타 문명(미노아 문명)의 쇠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설이 유력하다. 정교한 건축, 화려한 벽화, 선형문자 A 등을 남겼다.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지중해 무역을 장악했으며, 벽화에서 알 수 있듯 여성의 권위가 높고 평화로운 문화를 향유했다. 화산 폭발과 지진, 미케네인의 침공 등으로 쇠퇴했으며, 미노아 문명 멸망 후 로마, 비잔틴, 아랍, 베네치아, 오스만 제국(튀르키예)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다. 특히 오스만 제국의 지배(약 250년)에 맞선 치열한 독립투쟁은 니코스 카잔차키스 문학의 핵심 정서인 자유를 향한 피투성이 투쟁의 모태가 되었다. 1913년에야 비로소 그리스의 본토와 병합되었다. 미노아 문명 (BC 2700~1450)은 유럽 최초의 고도 문명이다. 크노소스 궁전으로 대표된다.

현재 우리가 보는 크노소스 궁전은 기원전 2000년의 미노아 문명과 서기 1900년대 아서 에번스의 해석이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섞여 있는 복합적인 유적이다. 이러한 진정성

논란으로 크노소스 궁전은 그 엄청난 역사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보류되다가 최근에야(2023년) 다른 미노아 궁전들과 함께 등재될 수 있었다. 이런 배경을 알고 크노소스를 보게 되었고, 붉은 기둥과 화려한 벽화 사이에서 고대의 진실과 현대의 욕망을 구분, 흥미로운 관점이 생겼다. 크노소스 궁전과 함께 빠질 수 없는 것이 헤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이다. 미노아 문명의 유물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소장하고 있는 곳이다. 크노소스 유적지에 있는 벽화나 유물은 대부분 복제품이고, 진품은 모두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왜 우리는 그리스 신화를 알아야 하는가

그리스 신화는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서구 문명과 인간 심리를 이해하는 운영체제(OS)와 같다. 서양의 문학, 미술, 철학은 그리스 신화라는 거대한 뿌리에서 나왔다.

르네상스 시대의 명화부터 현대의 영화, 소설에 이르기까지 신화적 상징과 모티프가 끊임없이 변주되어 나타난다.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은 완벽하지 않다. 질투하고, 분노하고,

사랑하며, 실수한다. 이는 인간 삶의 다양한 단면과 감정을 극대화하여 보여주는 거울이다. 조르바는 사실 이성과 질서의 아폴론적 인간이기보다 몸, 혼돈, 춤의 디오니소스적 인간이다. 디오니소스는 술, 광기, 춤, 파괴와 재생의 신이다. 조르바의 춤은 디오니소스적 신화가 현대 인간으로 환생한 장면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수많은 용어의 어원이 신화에 있다.에코(Echo), 나르시시즘(Narcissism), 아틀라스(Atlas), 타이타닉(Titan), 천문학(행성들의 이름과 별자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판도라의 상자 등. 신화를 통해 우리는 고난에 대처하는 인간의 자세, 오만에 대한 경계, 운명과 자유의지 사이의 갈등 등 보편적인 삶의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신화는 논리적인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세계의 기원과 현상을 상상력으로 채운 결과물인 것이다. 그리스 신화를 알면 인간이 왜 모순적인지, 왜 이성으로만 살 수 없는지, 왜 파괴와 창조가 함께 오는지를 비난없이 이해하게 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생애

카잔차키스는 영혼의 자유를 평생동안 탐구했던 작가이자 철학자, 행동가였다. 1883년 크레타섬의 이라클리온에서 태어났다. 당시 크레타는 오스만 제국(튀르키예)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며, 어린 시절 목격한 독립 투쟁과 아버지의 강인한성격은 그의 문학 전반에 흐르는 자유를 향한 투쟁의 기초가 되었다. 아테네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프랑스 파리로

유학하여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에게 사사했다. 이후 니체 철학, 불교, 맑스주의(공산주의), 기독교 신비주의 등 다양한 사상을 섭렵하며 자신만의 영적 체계를 구축했다. 발칸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고, 잠시 그리스 내무부 장관직을 수행하거나 유네스코에서 번역 담당자로 일하기도 했다. 평생 유럽, 러시아, 중국, 일본 등 세계 각지를 여행한 세계인이었다. 주요

작품으로 그리스인 조르바, 최후의 유혹, 미할리스 대장(자유냐 죽음이냐), 영혼의 자서전, 오디세이아 등이 있다. 1957년 백혈병과 독감 합병증으로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7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정교회에서 사실상 퇴출당한 이유

엄밀히 말하면 카잔차키스는 교단으로부터 공식적인 파문 문서가 확정되기 전에 사망했으나, 그리스 정교회는 그를 신성을 모독한 자로 규정하고 교회 묘지 매장을 거부했다. 이 갈등의 핵심 이유는 그의 문학 작품에 있다.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1951년 발표한 소설 최후의 유혹

(The Last Temptation of Christ)이었다. 그는 예수를 신성한 존재가 아닌, 두려움과 욕망을 가진 고뇌하는 인간으로 묘사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잠시 정신을 잃었을 때,

십자가에서 내려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사는 유혹(환상)을 겪는다는 설정이 포함되었다. 결국 예수는 이를 뿌리치고 십자가의 길을 택하지만, 그리스

정교회는 이를 명백한 신성모독이자 이단적 행위로 규탄했다. 1954년 로마 가톨릭 교황청 역시 이 책을 금서 목록에 올렸다. 또한, 소설 미할리스 대장 등에서 그는 당시 부패하거나 권위적인 성직자들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묘사했다. 이는 보수적인 그리스 교회의 분노를 샀고, 그를 무신론자 혹은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는 빌미가 되었다. 교회가 그에게 저주를 퍼붓자 카잔차키스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편지를 보냈다.

"성스러운 신부님들, 당신들은 나에게 저주를 내렸지만 나는 당신들에게 축복을 보냅니다.

당신들의 양심이 내 양심만큼 깨끗하기를, 그리고 당신들이 나만큼 도덕적이고 종교적이기를 기원합니다."

죽음과 묘비 문장의 재해석

그리스 정교회가 그의 시신을 교회 묘지에 안치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는 고향 크레타의 마르티넹고 요새(성벽 위)에 외롭게 묻혔다. 그의 묘비에는 그가 평생 추구했던 삶의

태도가 새겨져 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Δεν ελπίζω τίποτα)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Δε φοβούμαι τίποτα)

나는 자유다.(Είμαι λέφτερος)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무욕이 아니다. 여기서 바라지 않는다는 희망을 버렸거나 욕망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외부가 나를 구원해 주길 기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카잔차키스는 말한다.

“의미를 나 대신 만들어달라고 신에게도, 역사에도, 미래에도 요구하지 않겠다.” 이건 포기가 아니라 책임 인수인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무감각이 아니다. 고통을 모른다거나, 죽음이 무섭지 않다는 게 아니라, 두려움에 판단을 맡기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는 두려움을 제거하지 않고, 두려움 위에서 선택하고 행동한다. 이건 용감함이 아니라 자율성이다. 그래서 마지막이 나는 자유다.

앞의 두 문장이 있어야만 이 문장이 성립하는 것이다. 바라지않음으로 의존을 끊고, 두려워하지 않음으로 회피를 끊고 그 결과. 자유는 상태가 아니라 선택을 되돌려 받는 일이다.

이 문장을 물리적으로도 읽어보자.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우주 안에서 의미를 외주 주지 않고 국소적으로 생성하겠다는 선언이다.

조르바의 춤으로 번역하면 광산이 무너진 뒤, 조르바는 말하지 않고 춤춘다.

그 춤은 이렇게 말한다. 다시 세워달라고 바라지 않는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서 리듬을 만든다.

나는 지중해를 바라보고 카잔차키스의 묘지 앞에서 되뇐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말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가 아니라는 거. 내 삶의 의미를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겠다고.

그렇구나. 이 문장은 죽음의 문장이 아니라 살아 있는 나를 위한 윤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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