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빈센트 반 고흐 — 오베르쉬르우아즈
1편 빈센트 반 고흐 — 오베르쉬르우아즈(1890.5.21.
~7.29)
제1회: 파리의 겨울, 출발의 공기 그리고 오베르에 남긴 마지막 불꽃
파리의 겨울, 출발의 공기
파리는 약 2억 5천만 년 전(트라이아스기)부터 해양 퇴적물이 층층이 쌓여 형성된 거대한 그릇 모양의 지형이다. 특히 약 4500만 년 전 따뜻한 열대 바다였던 파리 지역에 쌓인
조개껍데기와 미생물이 굳어 만들어진 석회암과 석고층은 몽마르트 언덕의 지반을 이루었으며, 루브르 박물관이나 노트르담 대성당 같은 상징적인 건축물들을 짓는 데 사용되었다. 이 풍부한 자원은 예술가들이 모여 석고상을 만드는 창작활동의 시작점이기도 했다.
파리의 겨울은 한국처럼 뼈를 찌르는 듯한 추위는 드물지만,습하고 맑은 날보다 구름 낀 날이 훨씬 많다. 하지만 크리스마스와 연말 마켓의 화려한 조명이 비 내리는 젖은 도로에 반사되면 파리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가 깊어진다. 완전히 다른 모습의 밤의 파리에 반해 잠시 머무르고 지체하다 주말이 되어서야 비로소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나러 움직였다.
파리 북역에서 한 시간이면 닿는 거리지만, 주말의 파리 대중교통은 종종 설명 없이 열차를 취소해버린다. 예정된 시간표보다 운이 더 중요해지는 날들이기에, 나는 이른 시간에
움직이는 것을 택했다. 도시가 완전히 깨어나기 전, 혹시라도열차가 사라지기 전에 다녀오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빈센트의 마지막 시공으로
파리 북역(Gare du Nord)에서 Valmondois(발몽두아) 방향 H선을 탑승했다. 발몽두아에서 하차한 후 Pontoise(퐁투아즈)행으로 환승하여 한 정거장 뒤, 오늘 나의 목적지인
Auvers-sur-Oise(오베르쉬르우아즈)에 도착한다. 휴일 이른 새벽의 열차 안은 사람이 거의 없어 한산했다. 기차가 도시를 벗어나자, 창밖의 풍경이 서서히 달라졌다. 빽빽한 건물대신 들판과 낮은 지붕들이 겹겹이 스쳐 지나간다. 이 풍경은선명하기보다는 번져 있고, 마치 물을 너무 많이 찍은 붓으로 급히 덧칠해 놓은 수채화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감상에 잠겨 있을 즈음, 기차는 어느새 빈센트 반 고흐의 마지막 시공으로 천천히 들어가고 있었다.
기차에서 내려 역을 빠져나가니, 19세기 후반의 서정적인 시골 풍경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고흐에게 이곳은 생애 마지막 70일을 보낸 곳이자, 죽기 직전까지 무려 80여 점의
작품을 쏟아낸 예술적 불꽃의 현장이었다. 그는 이 작은 마을에서 고향 네덜란드를 떠올리며 심리적 안정감을 찾고자 했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곳을 아름다운 시골이라 칭하며 특히 이끼 낀 지붕들의 오래된 초가집에 매료되었다고 썼다.
마을, 그림 속으로 들어가다
마을 곳곳에는 그의 그림이 그려진 자리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완성된 작품을 전시하여 그림이 태어난 장소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고흐가 어디에서 어떤 시선으로 붓을 들었는지,그 위치가 그대로 남아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언덕 위에 우뚝솟은 고딕 양식의 오베르 성당은 고흐의 그림 <오베르의 교회> 속 모습 그대로다. 특유의 뒤틀린 듯한 신비로운 분위기가 감도는 실제 건물을 마주하는 경험은 압도적이다. 마을 뒤편으로 넓게 펼쳐진 언덕 위 밀밭은 고흐가 마지막 열정을 불태운 장소로, 바람에 흔들리는 밀밭을 보고 있으면 그의 고독과 예술혼이 느껴지는 듯하다.
고흐가 머물렀던 Auberge Ravoux (라부 여인숙)는 좁고 어두운 방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소박한 식당과 외벽이 인상적으로 마을의 중심적인 상징물 역할을 하고 있다. 고흐는 친구 피사로의 충고에 따라 닥터 가셰에게 치료를 받기 위해 1890년 5월 20일 오베르쉬르우아즈에 정착했다. 초기에는 호텔 생오벵에 머물다가 시청 맞은 편 라부 여인숙에 하숙하게 되었다.
압생트, 녹색의 요정이 부른 광기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 예술가들의 작품, 정신, 그리고 삶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친 문화 현상 중 하나는 압생트(Absinthe)였다. 특히 빈센트 반 고흐, 로트렉, 고갱, 피카소, 보들레르, 랭보 같은 예술가들은 압생트를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창작의 점화 장치처럼 사용했다. 압생트는 알코올 도수 45~74%에 달하며, 주요 성분은 쑥(Artemisia absinthium)이다. 쑥 속의 투존(thujone) 성분이 환각 효과가 있다고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환각보다는 약한 해리감, 통증 무감각, 감정 과잉을 유발했다 한다. 19세기 파리에서는 'La Fée Verte(녹색의 요정)'이라고 불리며 예술가와 지식인들의 상징적 술이었다.
원래 감정의 파도가 크고 감각이 예민한 기질이었던 고흐에게 압생트는 그 감각을 더 날카롭게, 더 과열되게 만들었다. 이는 그의 그림에서 색채 대비가 강해지고 붓질이 격렬해지며 감정이 폭발하는 시기와 겹친다. 특히 아를 시절의 노란 방, 해바라기, 그리고 <까마귀가 나는 밀밭> 등에서 나타나는 반짝이는 색채는 압생트의 시각 과민(색채가 더 생생하게 보임) 영향도 일부 있었을 것이라는 연구도 있다. 고흐는 자주 밥을 굶고 술로 대신했는데, 압생트는 공복, 불면, 감정 불안 상태에 최악의 영향을 미쳤다. 그의 발작 시기와 음주 기록이 겹치는 경우가 많으며, 귀 절단 전후에도 압생트와 와인을 계속 마셨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압생트는 고흐의 색채적감각을 자극했지만, 동시에 정신적·신체적 붕괴를 빠르게 진행시킨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다.
제2회: 까마귀 나는 밀밭에서, 죽음을 선택한 이유
가족과의 갈등과 폭발적인 창작열
고흐가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머물던 1890년 6월 말, 동생 테오가 직장에서의 갈등으로 고민에 빠진다. 불안한 마음에 파리를 방문했던 고흐는 결국 돈 문제로 테오와 다투게 되고,다시 혼자 마을로 돌아온다. 가족과의 갈등은 언제나 그의 삶에 큰 파문을 남겼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직후 그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 <오베르의 교회> 등 대표작들을 연달아 그리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 집중된 삶 속에서 폭발하듯 쏟아낸 그림들이었다. 작품 하나하나에는 시간에 대한 조급함과 마지막 열정이 배어 있었다.
자살이 아닌, 죽음의 수용
빈센트는 <까마귀를 날리는 장면>을 그리려고 밀밭에 갔다. 까마귀 장면을 위해 총을 쏘고 싶어 했다는 구전은 라부 여인숙 가족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그 밀밭에는 늘 아이들이 총을가지고 카우보이 놀이를 하며 놀고 있었다고 한다. 1890년 7월 27일, 고흐는 초라한 다락방의 침대 위에 피를 흘리고 누워 있는 상태로 라부의 가족에게 발견되었다. 그를 진찰한 닥터 가셰와 닥터 마제리에 따르면, 총알은 빈센트의 옆구리에 수평에 가까운 각도로 박혀 있었는데, 이는 스스로 총을 쏠 때의 각도(자살 각도)와는 달랐다고 한다. 총을 든 아이들이 쏜 총이 빗나가 사고가 발생했고, 빈센트는 놀랐지만 피를흘리면서도 오롯이 2km를 걸어서 여인숙으로 돌아왔다. 많은 연구자들은 빈센트가 총을 든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고를 '자살'로 남기기로 선택했다고 본다. 그는 치료를 거부하며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였다. 이것이 전통적인 ‘자살’ 개념과 다른 지점이다. 빈센트는 죽으려고 총을 든 것이 아니라, 사고로 총을 맞았고 그후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 죽음을 받아들이는 선택을 한 것이다.
두 형제의 마지막 대화
총상을 입은 이튿날, 파리에 있던 동생 테오는 닥터 가셰의 편지를 받고 오베르쉬르우아즈로 급히 달려왔다. 두 형제는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날 밤 고흐는 의식을 잃었고, 7월 29일 새벽 1시 30분 동생의 품에 안긴 채 “이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파란 가득한 37년의 삶을 마감했다. 7월 30일, 고흐는 동생 테오, 화가 베르나르(Émile Bernard), 화구점 주인 탕기 영감(Julien François Tanguy), 닥터 가셰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베르쉬르우아즈의 공동 묘지에 묻혔다. 그리고 그의 죽음 후 불과6개월 뒤인 1891년 1월 25일, 형의 죽음 이후 갑자기 건강이악화된 테오도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에서 3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고흐의 서간집이 출간된 1914년에 이르러서야 테오의 유해는 형의 무덤 옆에 안치되어 영원히 함께하게 되었다.
시간의 순례
나는 언덕을 지나 들판으로 나왔다. 그가 마지막으로 붓을 들고, 숨을 쉬었던 자리이다. 그 들판에 서서 잠시 바람을 들이마셨다. 조금 더 걸어가자 공동묘지 입구가 보였고, 빈센트와테오, 형과 동생의 무덤이 차분히 펼쳐진 공간에 도착했다. 광기와 헌신, 절망과 우애. 한참을 서서 생각했다.
이 시간은 빈센트를 향한 순례였지만, 동시에 내 안의 그림자를 향해 걸어온 길이기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슬픔은 지나가고, 아름다움은 남는다.”
나는 그 문장을 마음속에서 다시 읽어본다. 그의 시간 위에 나의 시간이 겹쳐진다. 왜 지금, 그의 죽음을 보러 왔는지는 아직 나도 모른다. 다만 역사와 지리가 아닌, 나의 시간으로 이 길을 지나가고 있다는 감각만이 남아 있다.
그는 여기서 70일을 살았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
그 차이가, 나를 이 길로 데려왔다.
*베르나르Émile Bernard (1868–1941) 프랑스화가 고흐와 가장 친한 친구이자 예술적 동료
**탕기영감Julien François Tanguy (1825 Plédran - 1894 Paris) 파리에서 화구점을 운영, 가난한
예술가들의 후원자로 고흐는 탕기 아버지라 부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