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스혜영 May 07. 2023

내가 만난 왕, 찰스 3세

12년 전이었다. 남편과 내가 왕의 초청장을 받았을 때가. 런던에 있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한 교회였다. 버스를 타고 교회에 도착했을 때 주소를 잘 못 봤나 착각할 정도로 주변이 너무 조용했다. 교회 문 밖에서 부터 여권과 가방을 열어 소지품을 확인했다. 초청장에는 여권지참 말고도 1시간 전에 미리 도착하라는 문구도 적혀 있었다. 초청받은 사람들이 삼십 명 남짓 되어 보였다. 처음 본 사람들끼리 어색했지만 서로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는지 자연스레 인사를 나눴다. 


당시 남편은 런던에 있는 영국성공회 청소년 사역자(Youth Worker)로 일하고 있었다. 청소년 '칼부림' 범죄가 급증할 당시, 우리 동네에도 칼에 찔려 숨진 십 대가 뉴스에 나오기도 했다. 그의 시신이 있던 장소를 지나다 보면 꽃다발이 한가득 놓여있었다. 평소 랩을 좋아하던 남편은 길거리 청소년들을 위해 'Free Rapping Stage'를 교회 안에다 만들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다. 교회 안 맞다. 신기하게도 소문을 들은 십 대 아이들이 하나 둘 심심찮게 몰려들었다. 


큰 강대상 앞으로 찰스 3세가 오른손을 들어 특유의 왕실 인사(손짓)를 하며 걸어왔다. 모든 이들이 일어나 박수를 치며 뜨겁게 맞이했다. 그가 있다는 존재만으로도 들어마시는 공기조차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 당시 런던 주교(Bishop of London)였던 리처드 차터스가 간단한 인사말을 전했고 이어서 찰스 3세가 강대상 앞에서 연설을 시작했다. 격식 있고 우아한 왕실 악센트로 했다던데 영어를 못했던 나는 무슨 말인지 도통 못 알아들었다. '제발 나한테 말 걸지 마세요!'라는 간절함만이 내 머릿속을 꽉 채웠을 뿐이었다. 그 자리에 초청된 사람들은 지정된 자리에 서 있었다. 강대상에서 내려온 찰스 3세는 리처드의 안내를 받으며 서 있던 사람들에게 한 명씩 인사를 나눴다. 순식간에 두 발만 더 디디면 남편과 내 코 앞에 그분이 나타나는 거다. 물에서 막 나온 물고기처럼 심장이 미치도록 파닥거렸다. 


"자네는 무슨 일을 하는가?"

"저는 런던 OO교회에서 청소년 사역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길거리 청소년들이 속 마음을 뱉어낼 수 있도록 'Free Rapping Stage'를 만들었습니다." 

"참 좋은 생각이군." 

잠시 말을 멈추더니 남편의 눈을 지그시 쳐다보며 조심히 입을 열었다. 

"얼마나 되었나?"

"1년 남짓 되었습니다."

"앞으로 자네는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모슬렘이든 힌두든 천주교든 종교에 상관없이 칼대신 마이크를 들려고 아이들이 몰려옵니다. 마이크 하나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서슴없이 랩으로 표현합니다. 그렇게 가사도 적고 노래도 만들어 녹음도 해 보고 공연도 하고 말이죠. 길거리 말고도 맘 편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습니다." 


마치 질문을 미리 알았던 것처럼 남편은 망설임 없이 물 흐르듯 말했다.(신기하게도 남편말은 잘 들림. 그가 나의 통역사라는...) 다행히 그분은 나에게 고즈넉한 미소를 던지고서 악수를 건넸다. 가만가만 등을 돌리며 다음 사람으로 향했다.  

  

70년 만에 찰스 3세 국왕의 대관식이 열렸다. 백인만 초청되었던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과는 달리 영국 사회를 반영하듯 유색인과 여성이 눈에 띄게 보였다. 심지어 성가대에서 동양인으로 보이는 한 아이가 노래를 부르는데 왠지 기분이 좋았다. 친환경 가치를 돋보이기 위해 왕관, 예복 등을 새로 만들지 않고 재사용했다고도 한다.  


스코틀랜드 방구석에서 잠옷 바람으로 참석했던 오늘의 대관식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눈부시게 화려했다' 

444개의 보석이 달린 성 에드워드의 왕관, 군주의 보주나 두 개의 왕홀이며 높이 솟아 오른 보좌, 왕이 입었던 금색 코트와 그 위에 걸친 제국망토, 마지막 황금 마차까지. 화면에서 보는데도 그 화려함에 숨이 헉헉 막혔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의 본보기로서 나는 섬김을 받지 않고 섬길 것입니다."

오늘 대관식에서 왕이 된 찰스가 했던 말이다.


예수의 본보기라면 그분은 마구간에서 태어나서 왕관이라곤 가시왕관뿐이었다. 하늘에 닿을 만한 보좌에 앉기보다 냄새나는 사람들의 발을 씻겼다. 황금 마차 대신 당나귀를 탔으며 황금망토대신 모든 사람의 죄를 뒤덮고 비참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섬기겠다'는 왕의 말이 어떤 의미일까. 대관식이 끝났는데도 복잡한 마음에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12년 전을 기억한다. 그날, 초청된 사람들에게 눈 한번 질근 감고 손 한번 흔들면 그만일 것을 일일이 눈을 맞추며 관심을 가지고 질문하고 경청했던 왕세자 찰스 3세. 그가 영국의 국왕이 되었다. 75세 최고의 나이에 왕이 되었고 얼마동안 왕의 자리를 지킬지는 아무도 모른다. '섬김을 받지 않고 섬기겠다'는 그의 말을 우리 모두는 잊지 않을 거다. 부디 건강하시고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길 기도한다.



BBC 화면 캡쳐






매거진의 이전글 더할 건 없는데 뺄 건 많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