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소공포증

by 박화영


푸른 눈의 페르시안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그녀가 왔을 때 나는 막 커피를 내리는 중이었다. 문 위에 매달아 놓은 종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들어선 그녀에게 나의 미소는 오히려 경계심을 자아내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내 앞까지 천천히 걸어왔다. 미소의 특징은 한 번 그런 표정을 지으면 쉽사리 풀지 못한다는 데 있다. 오히려 쉽사리 풀었다가는 상대방을 더 긴장시키기 마련이다. 나는 미소를 조금 엷게 하는 정도로만 고치고 나서 영어로 무엇을 도와줄지를 물으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그녀가 다소 어눌한 한국어를 구사하며 말했다.

“맡길 수 있나요?”

“당연히 맡길 수 있습니다. 여긴 물품보관소니까요.”

이 도시에 막 발을 내딛은 외국인이라면 모든 게 낯설기 마련이다. 그러니 당연히 한국어뿐만 아니라 영어와 일본어, 중국어까지 사용해서 물품보관소라고 친절하게 표기한 간판이 있다 해도 이곳에 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물품보관소가 맞는지, 물건을 정말 맡길 수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게다가 자정을 막 넘긴 무렵이라 인적마저 드물었고 보관소 안에는 나밖에 없었으니 더욱더 모든 게 의심스럽고 불안했을 터였다. 나는 미소를 지은 채 그녀에게 물었다.

“맡기실 물건이 뭔가요? 법에 걸리지만 않는다면 유령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말해 놓고 나서야 나는 아차 싶었다. 나로서는 친근감 있게 대한다고 유령 운운한 농담을 던졌지만 그녀로서는 안 그래도 주인이나 가게가 수상쩍어 보이는데 괴담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꺼냈으니 질색할 만했다. 하지만 나의 걱정과 달리 그녀는 오히려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긴장을 다소 누그러뜨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개를 돌리거나 손이나 발의 위치를 바꾸는 동작 하나하나가 부드러우면서도 유연했다. 처음 들어섰을 때부터 느낀 것이지만 우아하고 기품 있어 보이는 행동은 고양이의 움직임을 연상시켰다. 푸른 눈에 흰 피부, 금발 머리카락은 서양 동화 속에서 막 나온 사람 같은 느낌을 주었다. 물품보관소를 운영하면서 이곳에 도착한 외국인 여행객들을 많이 만나 보았지만 그녀만큼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찬찬히 주변을 파악하고 나서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내게 보관 기간이나 그에 따른 보관료 등을 물었다. 나는 최대한 친절하게 기간과 요금을 설명해 주었다. 그녀는 내 이야기를 듣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드디어 결정을 내렸다는 얼굴로 말했다.

“혹시 한 달도 가능할까요?”

“한 달이요?”

나는 조금 놀라서 반문했다. 한 달씩이나 짐을 맡기겠다는 것을 보면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체류에 가까웠다. 게다가 물품보관소를 운영하면서 깨달은 사실 가운데 하나는 어떤 물건이든 오래 맡기면 나중에는 처치가 곤란한 폭탄으로 변한다는 점이었다. 시한폭탄을 맡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다분히 경계하자 이제는 입장이 바뀌어서 그녀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 달이나 맡기신다면 차라리 숙소에 보관하시는 게 경제적으로 부담이 덜 하실 텐데요. 물건은 뭔가요?”

그녀는 내 눈치를 잠시 살피더니 바퀴가 달린 여행용 캐리어의 지퍼를 조금 열고는 조심스럽게 작은 나무 상자를 꺼냈다. 나무 상자는 정사각형에 나뭇결이 고스란히 보이는 고동색으로 표면에 알 수 없는 기하학적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상자의 상태나 손때가 묻은 것으로 보아 아주 오래된 골동품처럼 보였다.

“상자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물어도 될까요?”

내 질문에 그녀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녀는 내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나는 느긋한 표정으로 가만히 기다렸다. 그녀가 내민 상자의 정체가 궁금하긴 했지만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마침내 결심이 섰다는 듯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잠시 내 이야기를 들어 주세요. 부탁합니다.”

나는 결의에 찬 그녀의 표정에 조금 놀랐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상자를 맡기는 게 단호한 결심까지 필요한 일인가 싶었다. 그러다 보니 더욱더 그녀가 내민 상자가 꺼림칙하게 보였다. 그럼에도 내게 들려줄 이야기나 상자가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분위기를 가볍게 할 요량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좋습니다. 그전에 혹시 커피 괜찮으세요?”

우리는 커피를 놓고 앉아 한동안 침묵했다. 그녀는 자신의 커피를 내려다보며 어떤 성분이 들어 있는지 유추해 보는 모양이었다. 마침내 모든 성분 분석이 끝났다는 듯이 그녀는 머그컵을 들고는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눈을 조금 크게 뜨더니 내게 정말 맛있다고 말했다. 나는 미소로 화답하고서 내 몫의 커피를 마셨다. 내게 짐을 맡겼던 캐나다인이 다시 찾아가며 선물로 주고 간 커피 원두는 품종을 알 수는 없었지만 내려서 마실 때마다 만족스러운 맛과 향을 선사했다. 잠시 짐을 맡기러 이곳으로 찾아오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 중에는 간혹 답례로 이런저런 물건을 주는 경우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받은 선물 중에는 지금 마시고 있는 커피 원두라든가 물품보관소 벽면을 장식하는 소품처럼 유용한 것들도 많았지만 처치가 곤란한 것들도 일부 있었다. 지난주 금요일 밤에 이곳을 떠난 아프리카 여행객이 주고 간 선물도 그중 하나였다. 건장한 체구에 언제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는 말을 연발하던 흑인은 뿔이 달린 짐승 두개골을 놓고는 사라졌다. 미처 말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 앞에서 나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나로서는 커다란 눈구멍에서는 온갖 색색의 실타래들이 삐져나와 머리뼈 여기저기를 휘감고,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색 물감으로 각종 기괴한 도형이 그려져 있는 그것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짐승의 두개골을 물품보관함의 가장 아래쪽 구석에 집어넣고 단단히 자물쇠로 잠가 두었다.

“이야기해도 괜찮겠습니까?”

부두교에나 쓰일 법한 두개골 때문에 무의식중에 인상을 쓰고 있었던 나는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얼른 대답했다.

“네, 들려주세요.”

그녀는 입을 다문 채 잠깐 동안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내가 들을 준비가 되었는지를 눈으로 점검하는 듯했다. 나는 자세를 바로잡고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내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이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나는 그녀가 입을 열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잠시 머그컵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고개를 들고는 말했다.

“이 상자 안에는 아버지가 들어 있습니다.”

“아버지가 들어 있다고요?”

놀란 내가 반문하자 그녀는 차분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물품보관소에는 온갖 물건들이 거쳐 갔다. 일반적인 여행 용품은 물론이고 대체 왜 이런 물건을 지니고 다니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많았다. 이곳을 지키면서 내가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사람들이 정말 다양한 이유로 말도 안 되는 소지품들을 지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진정한 본모습은 언제나 여행용 가방 가장 깊숙한 안쪽이나 아니면 점퍼의 안주머니에 들어 있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숨겨져 있다가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들을 볼 때마다 나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항상 놀라곤 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경우처럼 내가 당황한 적은 거의 없었다. 집안의 가보라며 녹슨 부엌칼을 불쑥 내민 여자와 별것 아닌 여행용 캐리어를 맡기는 것처럼 보관함에 넣고 나서 몇 시간 뒤 전화를 걸어 자신이 맡긴 게 사실은 폭탄이라고 장난을 친 남자 이후 처음이었다. 이 두 가지 사건을 겪은 뒤로 나는 일일이 직접 확인한 물건만 받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소지품 검사하듯 확인하는 게 실례라는 생각 때문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물건을 보관함에 넣고 뺄 수 있게 했지만 더 이상 그런 식으로 운영했다가는 내 신경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혹시 놀랐나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다시금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서 그저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그럼 이게 유골함이란 거죠?”

“유골함? 유골함이 뭡니까?”

“그러니까 돌아가신 분, 아니 죽은 사람을 화장한 다음 뼛가루를 담은 상자 말이에요.”

나는 그녀가 최대한 이해하기 쉽도록 말을 바꿔 가며 설명했다. 그러자 그녀가 알아들었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돌아가셨다는 말, 잘 압니다. 하지만 그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나를 보며 난감하다는 듯이 미간을 찡그리고는 손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난처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그녀의 나라에서 망자를 기리는 어떤 상징적인 물건인지도 몰랐다.

“고인의 유품이 들어 있나요? 그러니까 물건들 말이에요.”

“유품 아닙니다. 아버지가 들어 있습니다.”

나는 혹시 그녀가 ‘아버지’라는 단어를 사전적인 의미 외에 다른 뜻으로 잘못 알고 사용하는 건 아닌지 의심했다. 그녀는 답답한지 계속 이마를 문지르다가 적합한 말이 생각났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여기에 아버지 영혼이 들어 있어요.”

아주 어렸을 적에 아버지를 따라서 딱 한 번 서커스를 구경하러 간 적이 있었다. 아마도 서커스가 지방을 다니며 공연을 하던 거의 마지막 세대에 내가 걸려 있었던 듯하다. 물론 지금은 그런 순회 서커스를 보기 힘들다. 내가 어른이 되어 가는 동안 그런 유의 서커스는 멸종되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는 어린 시절 내가 보았던 서커스를 떠올리게 했다. 신비로우면서 믿기 힘들고 동시에 온갖 상상을 하게 만드는 마법 같은 이야기였다. 물론 어른이 된 지금은 그 모든 멋진 이야기와 장면 속에 고도로 훈련된 기술과 어떤 눈속임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감탄이 나오긴 마찬가지다. 그녀의 이야기 역시 망상이나 과장, 허언이 군데군데 섞여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집중해서 들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녀가 본인을 컨토션 배우라고 소개했기 때문에 더욱더 서커스 생각이 났는지도 모른다.

“컨토션이라면 몸을 유연하게 해서 작은 상자 같은 데 들어가는 기술을 말하는 거죠?”

그녀는 낯을 조금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와 함께 갔던 서커스에도 컨토션 배우가 있었다. 어린 내 키보다 작아 보이는 통에 여자의 몸이 완전히 들어갔을 때 나는 긴장해서 잠깐 동안 숨을 못 쉴 지경이었다. 여자 대신 내가 통 속에 갇힌 듯했고 온몸의 마디가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여자는 다시 통 밖으로 천천히 몸을 펴며 빠져나왔고 비로소 나는 구속되었던 몸이 해방되는 기분을 느끼며 편안히 숨을 쉴 수 있었다.

“나는 여기 컨토션 하러 왔어요. 아버지도 컨토션을 배우셨죠.”

그녀는 커피를 간간이 마셔 가며 천천히 이야기를 해 나갔다. 중간에 어려운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으면 말을 끊고 미간을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곤 했다. 마치 떠오르지 않는 단어를 그런 식으로 눌러서 뽑아내는 느낌이었다. 나는 손님 접대용으로 사다 놓은 쿠키를 꺼내 놓으며 그녀가 편안히 말을 이어 갈 수 있도록 느긋하게 기다렸다. 어차피 심야의 물품보관소를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딱 한 번, 배낭을 짊어진 백인 남자가 물품보관소 문을 반쯤 열고 길을 묻기에 답해 준 게 전부였다. 백인 남자는 문을 닫고 돌아서며 우리 두 사람을 기묘한 듯 쳐다보았지만 딱히 뭐라 할 생각은 없는 듯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컨토션을 연습했노라고 말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대대로 컨토션을 해 온 집안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 앞에서도 작은 나무 상자 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적이 있을 정도로 유럽에서는 꽤 알아주는 컨토션 가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컨토션 배우라는 자신의 운명을 극도로 혐오했다. 선천적으로 유연성이 떨어지던 그는 아무리 배워도 장녀나 차녀만큼 훌륭한 곡예를 선보일 수 없었다. 물론 그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남자 친척들이 다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집안은 가부장적이던 다른 집들과 달리 여성의 권한이 센 모계 중심이었다. 이 모든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그녀의 아버지는 열 살이 되던 무렵 컨토션을 그만두겠노라고 온 가족 앞에서 선언했다. 그의 선언에 가족들은 경악했다. 특히 유럽 최고의 컨토션 배우였던 그의 어머니는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 정도였다.

“아버지는 많이 두들겨 맞았어요. 그런 다음 어두운 골방에 갇혔죠.”

골방에서 그녀의 아버지는 처음으로 폐소공포증을 느끼고 발작했다. 그는 알아듣기 힘든 비명을 지르며 밤새 문을 두들기고 부수려고 했지만 아직 꼬마인 힘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자애로웠던 그의 아버지는 문을 열어 주고 싶어 했지만 엄격했던 모친이 단호히 막아섰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그는 겨우 풀려났다. 그의 모친은 철없는 아들이 정신을 차렸으리라 생각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풀려난 그녀의 아버지는 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까무러쳤다. 그러고는 내리 이틀간 잠만 잤다. 다시 깨어났을 때 그는 심한 폐소공포증을 앓기 시작했다. 도저히 방 안에서 머무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결국 아버지는 노숙하기 시작했어요.”

몸을 접어 좁은 곳으로 들어가는 묘기를 보이며 살아오던 가문의 장남에게 폐소공포증은 천형이나 다름없었다. 집안 식구들은 그를 보고 안타까워하며 걱정했지만 정작 본인은 밖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얻은 해방감에 기쁠 따름이었다. 좁은 구석을 볼 때마다 무릎이며 팔꿈치가 가렵던 증상도 사라졌고 밤마다 정사각형으로 몸이 접힌 채 펼 수 없는 악몽을 꾸지 않아도 되었다. 밤이슬에 젖고 바람을 맞아 가며 더위와 추위에 노출된 탓에 피부 여기저기가 갈라지고 폐가 상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그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가 기거하던 광장으로 찾아온 모친이 집으로 돌아오라고 엄하게 꾸짖고 돌아서던 날, 다시금 폐소공포증이 시작되었다. 조금 전까지 탁 트여 보였던 거리가 점점 좁아지고 수많은 집들이 자신을 에워싸고 점점 더 다가왔다. 그는 도시가 많은 벽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올가미에서 벗어나는 심정으로 전력을 다해 뛰어 그는 겨우 도시에서 벗어났다.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올라가서야 그는 한숨을 돌렸다. 온몸을 옥죄던 폐소공포증이 사라지고 가쁜 숨이었지만 비로소 제대로 호흡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더 이상 도시에서 살 수 없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그가 아내와 만나서 그녀를 낳았는지 궁금했다. 폐소공포증을 앓으며 유랑민처럼 정처 없이 떠도는 남자에게 가정을 꾸리는 일은 어울리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이야기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벽시계를 흘깃거리며 보는 모습이 이곳에서 더는 지체할 수 없는 듯했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그만하겠습니다. 내일 다시 이야기해도 괜찮을까요?”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안심했다는 표정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럼 아버지를 맡기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심야의 물품보관소는 얼핏 보면 고즈넉해 보이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이런저런 미세한 소리와 냄새를 느낄 수 있다. 그 모든 자극들은 이곳에 막 도착한 사람들이 가져왔다. 이질적인 바람, 낯선 거리의 소음, 그들이 떠나온 곳에서 살던 사람들의 체취가 내 귀와 코를 자극하다 보면 나도 익숙한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 있으면 언제나 국경선을 밟고 서 있는 수문장이 된 심정이었다. 혹은 끊임없이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가는 바닷가에 서 있는 것과 비슷했다. 이 도시를 향하거나 아니면 등지는 사람들에게 물품보관소는 관문이자 갯벌이나 마찬가지였다. 갯벌에 밀물과 썰물이 드나들 듯이 여러 사람들이 이곳에 들렀다가 멀어지고 다시 들르기를 반복했다. 물때의 변화에 따라 갯벌에 조개껍데기, 각종 해초류와 불가사리, 과자 비닐봉지와 페트병 등이 남겨져 있듯 물품보관소에는 항상 그들의 물건이 남아 있다가 물결에 휩쓸리듯 다시 사라졌다. 그중에는 썰물에 쓸려 가지 않고 계속해서 자리에 박혀 있는 것들도 있었다. 나는 물품보관소 한쪽에 별도의 사물함을 마련해 그런 물건들만 따로 모아 두었다. 물론 계속 보관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물건을 맡기는 사람에게 언제나 찾아가기로 한 날부터 한 달이 넘도록 가져가지 않으면 임의로 처분하겠노라고 말하곤 했다. 벽에도 그런 공지를 출력해서 곳곳에 붙여 두었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껏 어떤 물건도 처분하지 못한 채 고스란히 보관했다. 언젠가 주인이 다시 돌아와 물건을 찾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몇 번인가 아주 늦었지만 물건을 찾아가기도 했다. 다만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 끝에 다시 찾아온 이들 중에는 물건이 아니라 다른 것을 찾으러 오는 일도 가끔 있었다. 그녀가 상자를 맡기고 돌아간 뒤, 새벽녘에 찾아온 유령 역시 내게 맡겼던 물건보다는 자신에게서 일어난 놀라운 일에 대한 설명을 찾아 이곳으로 온 경우였다.

“열흘 전쯤 우리 가게에 온 것 같은데 맞나요?”

유령은 내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불안한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보아하니 아직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모양이었다.

“모든 게 낯설고 두렵게 느껴지겠지만 곧 익숙해질 겁니다.”

나는 이십 대 후반에 동남아 출신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 유령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유령은 서서히 기억이 돌아오는지 처음 들어섰을 때보다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나에게 자신이 맡긴 물건을 달라고 말했다. 유령이 건네는 말은 언제나 소리가 아니라 텔레파시처럼 마음속으로 직접 전달되었다. 그때마다 나는 마음 한구석이 먹먹해졌다. 귀를 거치지 않고 직접 전달되는 목소리에는 어떤 미사여구나 거짓도 없이 오직 담담한 진실만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지금 가져오겠습니다.”

나는 유령의 물건이 담겨 있던 보관함에 가서 마스터키로 문을 열었다. 안에는 낡고 꾀죄죄한 가방이 들어 있었다. 가방을 들어 보니 제법 묵직했다. 다시 카운터로 돌아왔지만 이미 유령은 자리를 떠난 뒤였다. 그새 현실을 깨닫고 이곳을 떠났을 리는 만무했다. 아마도 다시 기억을 잃고 방황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가방을 카운터에 내려놓고는 인적이 끊긴 밤거리를 내다보았다. 맞은편에 불을 밝히고 있는 작은 칵테일 바와 고요한 가운데 떠내려오는 작은 나뭇잎처럼 가끔씩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지는 심야 택시를 제외하고 거리는 고즈넉했다. 사람의 냄새와 소음이 사라진 공간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불면에 시달리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이곳은 세상의 거의 모든 문이 잠겨 있는 땅이었다. 내 시야가 닿는 한에서는 오직 물품보관소와 건너편의 칵테일 바만이 유일하게 열려 있었다. 그러다 보니 여기에 어울리는 또 다른 존재들은 이곳 아니면 건너편의 저곳으로 자주 찾아왔다.

물론 그들은 문이 열려 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드나들 수 있는 존재들이었지만 생전의 기억 때문인지 여전히 문을 연 장소를 선호했다. 게다가 생자나 망자 모두 이곳으로 넘어오거나 저곳으로 떠나기 전에 저마다 무언가 맡기거나 찾아야 할 것이 있기 마련이었다. 또한 떠나거나 다시 돌아오기 이전에 잠시 앉아서 쉬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런 경우는 건너편의 칵테일 바를 찾았다. 그리고 칵테일 바의 사장은 가끔 나를 찾아왔다.

“커피 한 잔 부탁해.”

칵테일 바 사장은 물품보관소로 들어서자마자 한숨을 내쉬고는 커피부터 찾았다. 나는 말없이 뒤돌아서서 커피를 내린 다음 그에게 내밀었다. 사장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고는 얌전히 의자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늦은 시간에 커피를 찾는 것을 보면 장사가 아주 형편없지는 않았을 텐데도 사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가게를 비우고 이곳에 와서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말은 바꿔 말하자면 칵테일 바에 손님이 아무도 없다는 뜻이었다. 덕분에 나는 사장이 오는 시간대를 보고 칵테일 바의 오늘 매상이 좋은지 나쁜지를 대강은 알 수 있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사장이 우리 가게의 단골 가운데 하나란 점이었다. 칵테일 바는 자주 손님이 없는 편이었다.

“근데 가끔씩 답답하지 않나?”

사장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금 커피를 마셨다. 아무래도 오늘 역시 가게가 텅 빈 모양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칵테일 바 대신 다른 걸 해 보는 건 어떠세요?”

“칵테일 바 대신 다른 거라, 어떤 거?”

“이를 테면, 상자 가게.”

내 말에 사장은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상자 가게? 누가 상자 같은 걸 사 간다는 거야. 너도 참 뜬금없군.”

“왜요? 누구든 정말 예쁜 상자가 있다면 갖고 싶어 하지 않을까요.”

사장에게 항변했지만 나 역시 말도 안 되는 제안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깊은 고민 없이 그저 갑자기 떠오른 게 상자였기에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다. 나는 몇 시간 전 물품보관소에 상자를 맡기고 간 금발의 그녀를 떠올렸다.

“손님이 없어서 답답한 게 아니야. 물론 가게 매상을 생각하면 한숨이 나오긴 하지. 하지만 내가 답답한 이유는 다른 것 때문이야.”

“그게 뭔데요?”

“밤하늘.”

“밤하늘이요?”

나는 사장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되물었다. 그러자 사장이 다시금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응, 밤하늘. 너는 그런 적 없어?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면 거대한 동굴 천장이 떠오르면서 천천히 가슴이 짓눌리기 시작해. 몸이 무거워지고 호흡도 느려지지.”

나는 맞은편에 앉은 거구의 남자가 짓눌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지만 도저히 그려지지가 않았다. 오십 대 중반에 어느 모로 보나 건장한 체격이 눈에 띄는 사장은 심지어 본인의 말에 따르면 전직 권투 선수였다.

“그럴 땐 어떻게 하세요?”

“그럴 때는 지금처럼 여기 와서 커피를 마시지.”

“그럼 나아지나요?”

내 물음에 사장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확실히 효과가 있어. 물고기가 부레의 공기 양을 조절해서 주위 수압과 자신의 몸을 맞추는 것과 같아. 술이나 커피로 몸속을 채우면 더 이상 짓눌리지 않지. 하지만 가게를 지켜야 하니까 술은 안 되지.”

사장은 미간을 찡그리면서 커피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눈이 충혈된 것을 보면 여전히 불면에 시달리는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커피까지 좋아하니 불면의 악순환이었다.

“그런데 요새는 커피로도 안 풀려. 잠깐은 나아지지만 다시 금세 가슴이 답답해지거든.”

“혹시 사장님도 폐소공포증 같은 거 있으세요?”

“페소공포증? 좁은 데 있으면 막 식은땀 나고 불안해지는 병 말하는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은 자신에게 정말 폐소공포증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 듯했다. 그러고는 금세 결론을 내렸는지 나를 보며 말했다.

“생각해 봤는데 폐소공포증은 없는 것 같아. 고소공포증은 있지만.”

“저도 고소공포증이 있어요. 폐소공포증도 있죠.”

사장은 내 말에 커피를 마시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누구나 그런 공포증이 한두 개쯤은 있지 않을까?”

“근데 정말 심한 사람도 있거든요. 집에도 못 들어가서 노숙을 하다가 결국 도시도 자신을 가둔다는 생각에 도망친 남자가 있어요.”

“정말이야? 누군데?”

나는 그녀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폐소공포증이 있던 그의 영혼이 지금은 작은 상자 속에 들어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째서 아버지의 영혼을 그런 작은 상자 속에 보관하는지도 의문이었다. 물론 나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는 허언증 환자까지는 아니어도 약간의 망상증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듣지 못한 그녀의 아버지에 관한 뒷이야기가 궁금했다. 모두 꾸며 낸 내용이라 해도 확실히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야기해 드릴게요. 저도 완전히 다 들은 게 아니어서요.”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해 줬는데?”

“컨토션 하는 여자요.”

사장은 처음 듣는다는 듯이 되물었다.

“컨토션?”

“작은 상자 같은 데 몸을 막 구부려서 넣는 묘기 같은 걸 하는 사람이죠.”

“그래서 아까 상자 파는 가게 이야기를 했군.”

“그런 셈이죠.”

내 말에 사장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시고는 일어섰다. 사장은 물품보관소를 나가기 전에 내게 제법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컨토션인가 뭔가 하는 여자가 다시 오면 꼭 좀 만나게 해 줘.”

“왜요?”

“몸과 마음이 굳어서 답답한 것 같거든. 여자랑 만나서 유연성 좀 길러 보려고.”

컨토션 배우가 다시 물품보관소로 찾아온 것은 일주일 뒤였다. 나에게 상자를 맡길 때는 다음 날에 다시 오겠노라고 말했지만 애초부터 그 말이 지켜지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물건을 맡길 때는 대부분 곧 찾아가리라 마음먹지만 세상일이란 게 늘 그렇듯 자기 뜻대로 흘러가 주지 않는 법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차일피일 미뤄지게 되고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들도 생겨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모두 나의 돈벌이가 되었다. 나는 지체와 연장을 먹고사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말대로라면 아버지의 영혼이 담긴 상자를 버리지는 않을 터였다. 그럼에도 일주일은 나의 예상을 뛰어넘는 긴 시간이었다. 그녀가 하루만 더 늦게 왔더라도 상자는 장기 물품으로 분류되어 짐승의 두개골이 담긴 옆 보관함에 들어갔을 것이다.

일주일 만에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내게 미안한 듯이 어색하게 웃으며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나 역시 가볍게 목례했다. 처음 이곳에 들어섰을 때와 달리 이제는 경계심을 보이거나 불안해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지 않았다. 그러한 모습은 그녀의 체류가 비교적 성공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는 이 도시에 한결 익숙해진 듯했다. 그녀에게 이곳은 여행지가 아니라 체류지였고 나아가 정착지가 될지도 몰랐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상자를 찾아가시겠어요?”

내 물음에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부끄럽다는 듯이 어깨를 움츠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미안하지만 좀 더 보관할 수 있을까요?”

“네, 알겠습니다.”

나는 한 달씩이나 상자를 맡겨야 하는 그녀의 사정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커피를 주문하며 카운터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내가 커피를 내리는 동안 그녀는 가만히 앉아서 물품보관소 안 여기저기를 바라보았다. 그다지 볼 것은 없었다. 여행 서적과 이런저런 잡다한 기념품이 군데군데 놓여 있고 차를 마실 수 있는 테이블 서너 개와 의자가 자리해 있을 따름이었다. 내가 서 있는 카운터 뒤편 넓은 공간에 물품보관함이 죽 놓여 있었다. 내가 커피를 내밀자 그녀는 고맙다며 두 손으로 머그컵을 감싸 쥐었다. 자정이 지난 시각인 데다 번화가가 아닌 탓에 바깥은 인적이 끊겨 있었다. 나는 맞은편의 불 꺼진 칵테일 바를 바라보았다. 하필이면 일주일에 한 번 있는 휴무일이 오늘이었다.

우리는 한동안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제 고작 두 번째 만남이었지만 나는 제법 즐기며 그녀와 두서없이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대화 사이사이에 침묵이 끼어들어도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유연하게 구부릴 줄 알듯이 상대를 편안하게 대화로 이끄는 데도 능숙했다. 나는 그녀에게 건너편 칵테일 바 사장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호기심을 보이면서도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장이 조금은 불편한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곰 같은 사람이지만 속마음은 양과 같으니까요.”

“나의 아버지와 비슷한 것 같아요.”

그녀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 역시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녀의 아버지에 관한 뒷이야기가 궁금했다. 다행히 그녀는 내가 이야기를 청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를 떠난 그녀의 아버지는 시골로 갔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벽이 보이던 도시와 달리, 넓은 들판과 야트막한 산들이 자리한 시골에서는 더 이상 가슴을 옭죄는 공포를 경험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비로소 완전히 해방된 느낌이었다. 폐소공포증을 느낄 때마다 그를 괴롭히던 가려움증도 사라졌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관절이며 근육도 이완되어 그는 조금만 더 연습한다면 예전처럼 컨토션도 할 수 있을 듯했다. 물론 그로서는 겨우 해방되었는데 일부러 다시 좁은 곳에 자신을 가둘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컨토션 가문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는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며 하루하루를 즐겼다. 인근 농장의 일을 거들며 밥벌이를 하고, 잠은 지금껏 그래 왔듯이 머리를 가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들어가서 마음 편히 잤다. 뒷산의 개울에 가서 간단히 몸을 씻었고 일하기가 싫을 때면 숲을 돌아다니며 버섯이나 이런저런 열매를 따 먹었다. 가끔 덫을 놓아 산토끼나 다람쥐를 잡아 구워 먹기도 했다. 그는 여유로워졌고 얼굴도 한결 밝아졌다. 마음의 평화는 신체의 매력으로 이어졌다. 매력은 꽃의 향기나 벌의 페로몬처럼 상대를 끌어들였다. 그가 미래의 아내를 만난 것도 이즈음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다소 나른한 표정으로 손목과 어깨를 이리저리 부드럽게 꺾으며 말했다. 나는 그녀의 우아하면서도 믿기지 않을 만큼 유연한 동작을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느낀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하듯 말했다.

“죄송합니다. 무대에 오르고 나면 항상 부드럽게 몸을 풀어 줘야 해서요.”

“괜찮습니다. 그저 감탄했을 따름이에요.”

내 말에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서둘러 자신의 부모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어디서 만나게 되었으며,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는지, 왜 그들은 서둘러 결혼했는지를 듣다 보니 나 역시 그들과 한 가문 사람이 된 듯했다. 그녀의 부모는 나름 원만한 가정을 이루며 잘 지냈다. 그녀의 아버지는 결혼 이후에 폐소공포증이 나아져서 일주일에 절반은 집에서 숙식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가족들은 어쩌면 그의 병이 완전히 나아서 정상적인 생활을 곧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야기가 그러하듯 희망 뒤에는 어김없이 절망이 따라붙었다.

“유성이 떨어지던 날, 아버지의 병이 다시 도졌습니다.”

그녀는 다소 낮은 목소리로 우울하게 말했다. 모든 빛과 색, 소리마저 사라지고 무겁게 가라앉는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밤하늘을 가르는 유성을 처음 발견한 것은 그녀였다. 열 살 생일을 맞이하기 이틀 전이었다며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당시 아버지의 병세가 많이 호전되어 그녀의 가족들은 어쩌면 조만간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가서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이런저런 미래를 계획했다. 그날도 부녀는 저녁 식사를 끝내고 함께 밤 산책을 나서며 앞으로 벌어질 멋진 일들을 이야기했다. 그때 우연히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녀의 눈에 어둠을 가로지르는 빛줄기가 보였다. 그녀는 호들갑을 떨며 손가락으로 유성을 가리켰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두 번째 유성이 빠르게 가로질러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날 밤, 우리 마을에는 유성우가 내렸습니다.”

나는 잠시 회상에 잠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묵묵히 커피를 마셨다. 분명 아름다운 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세계는 참혹했을 것이다. 나아간다고 믿었던 환자가 다시 발병하는 일만큼 환자 가족을 절망에 빠트리는 일도 없을 테니까. 쏟아지는 유성들을 보며 감탄해서 하늘을 올려다보느라 그녀는 옆에 선 아버지가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것을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나의 고통을 주위에서 알아차리기란 언제나 힘든 법이니까요. 같이 있다 해도 우리는 대부분 너무 멀리 떨어져 있죠.”

그녀의 아버지는 쏟아지는 유성들을 보며 공포에 사로잡혔다. 언제나 확 트여 있고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어 그 끝이 보이지 않던 밤하늘도 사실은 돌멩이들이 떠다니다가 떨어져 내리는 실재하는 공간이자 어딘가 끝이 있는 장소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머리 위에 높이 떠 있던 밤하늘이 무겁게 내려앉아 그를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그제야 아버지가 공포에 휩싸였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그의 손을 꽉 쥐었다. 그는 자신의 손을 쥐고 불안하고 겁에 질린 얼굴로 올려다보는 딸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바람과 달리 그런 행동은 오히려 그를 더욱더 구석으로 몰았다. 그는 딸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떨림을 멈출 수도 없었다.

“아버지가 긴 편지를 남기고 사라졌을 때 비로소 나는 모든 걸 알 수 있었어요.”

그가 남긴 편지에는 그동안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겪어 왔던 모든 고통과 두려움, 도망치고 잠시 안주하며 숨을 돌렸다가 다시 공포를 피해 도망쳤던 날들이 길게 적혀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편지를 자신만이 몰래 간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즈음 어머니는 무책임하게 도망친 아버지에게 분노하여 집 안에서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물건이라면 무조건 불살라 버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편지만 가지고 있다면 언젠가는 아버지를 다시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그러기에 어느 날 기어코 아버지의 편지를 찾아낸 어머니가 그것을 불태우자 그녀는 아버지가 눈앞에서 화형당하기라도 한 것 같은 고통과 공포를 느꼈다.

“그래서 어머니를 떠났습니다.”

그녀는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짧게 떠났다고만 말했지만 그 뒤에는 말하지 못한, 그리고 말하지 못할 무수히 많은 이유들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서로 사랑했지만 서로에게 죄수이자 교도관이 되어 버린 불행한 가족의 일원을 안쓰러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도망치는 한 결국 공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을 텐데요.”

나는 그녀의 아버지에 대해 너무 심한 말을 한 게 아닌가 싶어서 마음속으로 후회하면서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그녀는 내 말에 화를 내기는커녕 흔쾌히 동의한다는 듯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맞아요. 나중에 아버지도 그걸 깨달으셨던 모양이에요. 어머니에게서 떠난 다음 받은 아버지의 마지막 편지에도 비슷한 내용이 적혀 있었거든요.”

그녀는 주머니를 뒤적여 내게 편지를 건네주었다. 귀퉁이가 닳은 것으로 보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편지 봉투에서 편지지를 꺼내 펼쳤다. 하지만 내가 알 수 없는 글자들로 잔뜩 적혀 있었기에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다시 편지를 돌려주자 그녀가 부끄러운 듯이 얼굴을 붉혔다.

“미안해요. 거의 매일 편지를 꺼내 읽다 보니 우리말을 모르는 사람은 읽지 못한다는 사실을 깜빡했어요.”

“괜찮습니다. 근데 용케도 이 상자와 편지를 받았네요?”

내 물음에 그녀는 다소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어머니의 유품과 함께 남겨져 있었어요. 어머니가 왜 이 상자와 편지만은 다른 아버지의 물건들처럼 태워 버리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신 건지도 모르죠.”

그녀는 내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하지만 이내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아는 어머니는 쉽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나로서는 그녀의 아버지가 남긴 상자와 편지를 둘러싸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떻게 그녀의 손에까지 다시 들어오게 된 것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편지는 결국 배달되기 마련이라지만 그렇다 해도 먼 거리를 돌고 돌아 이 도시 귀퉁이의 물품보관소에까지 다다르기 위해서 필요한 행운을 생각해 보니 거의 새로운 제국을 세우는 일이나 진배없어 보일 정도였다. 그러한 엄청난 운명에 짓눌린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나는 침묵을 깨기 위해 물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편지에는 무슨 내용이 적혀 있었나요?”

그녀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긴긴밤이 될 것 같네요. 그전에 아버지를 잠시 보여 주시겠어요?”

다시 이곳에 찾아온 이십 대 후반의 동남아 출신 남자 유령은 한결 편안해진 얼굴이었다. 자신의 죽음을 비로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나는 유령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한 뒤, 물품보관소에 가서 그가 살아생전에 맡겼다가 다시 찾아가지 못한 물건을 꺼내와 카운터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그것을 본 유령이 잠시 회환에 잠긴 표정을 짓더니 슬픔이 담긴 눈빛으로 담담히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제가 알아서 처분할까요?”

유령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비록 허락을 받았다 해도 나로서는 과연 그렇게 해도 되는 것인지 여전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불태우면 당신이 가는 곳에 가져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말을 해 놓고 나서도 스스로가 한심스러워 쓴웃음을 지었다. 이곳이 아닌, 그곳으로 가는데 이깟 짐들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금덩어리를 녹여서 가져간다 해도 그곳에서는 그저 쓰레기밖에 되지 않을 터였다. 오히려 죄를 인정하는 족쇄가 될지도 몰랐다. 유령 역시 나와 똑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내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더니 뒤돌아서서 사라졌다. 나는 뿌연 안개가 흩어지듯 형태를 잃고는 반짝거리는 가루로 변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유령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지만 그때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문득 나는 컨토션을 한다던 그녀가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유령만큼 유연한 존재도 없을 터였다. 어쩌면 이곳에서 그곳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한없이 몸이 유연해져야 하는지도 몰랐다.

유령이 찾아온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물품보관소를 찾지 않는 밤이었다. 이곳을 지키다 보면 그런 날이 한 달에 꼭 서너 번은 반드시 있었다. 그런 날이면 나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일기를 썼다. 오늘이 그날인가 싶어 일기장을 꺼내어 펼쳤을 때, 마침 문이 열리며 맞은편 칵테일 바의 사장이 들어섰다. 사장은 카운터 테이블에 놓인 일기장을 가리키며 무엇이냐고 물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일기장을 카운터 서랍에 집어넣고는 칵테일 바 사장에게 커피를 마시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사장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이내 맞은편 의자에 앉아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나는 그에게 커피를 건네며 물었다.

“피곤해 보이시네요.”

“어, 피곤해. 자네는 안 피곤해?”

“피곤하죠.”

“딱딱한 세상이라서 그래.”

사장의 말에 나는 동의한다는 뜻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내 몫의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사장 역시 잠자코 커피를 마시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일전에 말한 컨토션하는 여자가 다시 찾아왔었는지를 물었다. 나는 다시 커피를 마시고 나서 사장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왔었죠.”

“왜 내게 이야기 안 했어? 소개시켜 달라니까.”

“그게,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들어야 할 이야기?”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고는 다시 커피를 마셨다.

유성우가 쏟아지던 날 밤, 결국 그녀의 아버지는 모두가 잠든 새벽에 홀로 떠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이번이 최후의 도피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는 머리 위에 떠 있는 하늘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이 없는 장소로 가지 않는 한, 폐소공포증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 절망에 사로잡힌 채 그는 그저 하늘이 보이지 않는 곳을 찾아 정처 없이 헤매었다. 한번은 동굴을 떠올려 본 적도 있었지만 폐소공포증을 앓는 그로서는 도저히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늘이 보이지 않으려면 결국 밀폐된 장소밖에는 없었는데 폐소공포증을 앓는 그에게는 그곳이 사형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근본적인 해결책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저주의 완성일 수도 있는 방법을 떠올렸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두 눈을 실명시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하늘은 물론이고 자신을 옭죄는 어떠한 상황도 볼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랬다간 정말 영원한 어둠 속에 갇혀 죽을 때까지 폐소공포증을 계속 경험해야 할지도 몰랐다. 겨우 생각해 낸 또 다른 마지막 방법은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문제는 심해가 주는 공포 역시 폐소공포증과 유사하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당연히 심해에서 살아갈 수도 없으므로 이 방법은 그저 자살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계속 머리를 벽에 부딪쳐 가면서도 탈출구를 찾아 이리저리 미로를 헤매는 쥐처럼 그저 장애물을 피해 가며 앞만 보고 걸어갈 뿐이었다. 그러다가 지쳐서 죽을 것 같으면 아무 곳에나 쓰러져서 잠들었다. 그때만이 유일하게 폐소공포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눈을 뜨면 다시 공포도 기지개를 켰다. 그러면 다시 그는 지쳐 쓰러져 잠들 때까지 어딘가로 발걸음을 열심히 옮겼다. 유일한 원칙은 사람을 피해 다니는 것이었다. 행려병자처럼 보이는 지금 자신의 몰골이라면 간단히 경찰 구치소에 수감될 수도 있었다. 폐소공포증 환자인 그로서는 철장에 갇히는 일만큼은 무조건 피해야 했다.

마침내 그가 마지막 도피처를 찾게 된 것은 산맥을 넘어 본인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이웃 나라에 들어선 직후였다. 험준한 산속의 덤불을 헤치며 걷고 있던 그는 멀리서 열매를 따고 있던 노파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동안 사람을 피해 다녔던지라 이번에도 그는 노파가 자신을 발견하기 전에 얼른 몸을 돌려 돌아가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쉽게 도망가지 못했다. 오히려 점점 더 발걸음이 느려지다가 결국에는 노파가 그를 발견하기 좋은 거리에서 완전히 멈춰 서기까지 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열매를 따느라 정신이 팔려 있던 노파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노파는 그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여기 사람인지를 물었다. 그는 아니라고 대답하고는 서둘러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노파의 눈길이 그를 놔주지 않았다. 노파가 그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도망 다니고 있군요?’

놀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노파는 걱정 말라는 듯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날 따라오면 더 이상 도망 다닐 필요 없어요.’

노파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서 등을 보인 채 앞장서서 걸어갔다. 그는 처음 만난 이 기이한 노파의 정체가 궁금하면서도 두려웠다. 앞서가던 노파는 뒤돌아서서 그를 바라보고는 자신을 따라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자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는 다시 앞만 보며 걸어갔다. 그는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듯 노파를 뒤따라갔다. 한참을 가다 보니 계곡에 자리한 아담한 집이 하나 보였다. 노파는 집으로 들어서기 전에 다시 한 번 뒤돌아보고는 그가 따라온 것을 확인하자 안심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먼저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선뜻 따라 들어가기가 겁났다. 유성우가 떨어지던 날 이후, 실내 공간으로 들어서기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홀린 듯이 따라온 이상 다시 발걸음을 돌릴 수도 없었기에 드디어 용기를 내서 문을 열고는 집 안으로 들어섰다.

현관에 들어서면서도 집 안이 어두컴컴하다고 생각했지만 등 뒤로 소리도 없이 문이 닫히자 놀랍도록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슴푸레하게 보았던 현관이며 집 안 내부는 마치 블랙홀 속에 빨려 들어간 것처럼 아주 흐릿한 윤곽마저도 볼 수 없었다. 완벽한 어둠에 그는 숨이 멎을 듯했다. 그러자 멀리서 걱정 말라는 듯이 노파의 자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와요. 그럼 더 이상 갇히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는 이미 노파의 말을 거역할 힘이 없었다. 사방이 옥죄어 오고 그럴수록 점점 더 공기의 밀도가 너무 진하고 농밀해져 입과 폐를 짓누르는 듯했지만 그는 천천히, 꾸준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집 안이라 생각하는 곳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신기하게도 그는 자신이 들어선 공간이 집이라는 사실을 점점 더 느낄 수가 없었다. 공기의 밀도뿐만 아니라 주위 온도도 점점 높아지는 기분이었다. 머리도 깨질 듯이 아파 왔다. 그럼에도 그는 본능처럼 힘겹게 계속해서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두통이 사라지고 공기의 밀도와 온도도 확 낮아졌다. 그동안 옭죄던 온갖 것들이 떨어져 나가고 완전히 자유로워졌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소리 내서 울었다.

노파는 일종의 산도를 통과해 드디어 지금까지와는 다른 어딘가로 나가게 된 그를 환영하며 말했다.

‘잘했어요. 정말 고생했어요.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작은 상자와 편지지가 놓인 테이블이 있을 거예요.’

그는 희망에 차서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을 옮겼다. 새로운 시공간이 자신 주위를 흐르는 게 느껴졌다. 폐소공포증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주위는 이제 완전히 빛에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어둠에 휩싸여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 자신이 있는 공간이 어디쯤인지, 실재하는 장소인지조차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저 빛의 무한대에 떠 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여전히 모든 게 두려웠지만 동시에 조금씩 희망도 자라나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노파의 말대로 좀 더 안쪽이라 생각되는 공간을 향해 나아가자 정말 작은 상자와 편지지가 마련된 테이블이 보였다. 어디선가 노파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당신이 저쪽에 남겨 두고 온 사람 중에서 꼭 소식을 전하고 싶은 단 한 사람에게 편지를 써서 이 상자와 함께 보내세요.’

‘이 상자는 뭔가요?’

‘지금 당신이 들어 있는 상자예요.’

노파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그는 답을 찾는 심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오직 빛의 한가운데에 그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곳에 있는 한, 당신은 더 이상 예전 같은 공포를 느끼는 일이 없을 거예요. 외부에서는 당신이 머무는 이곳이 작은 상자처럼 보일 뿐이죠. 이걸 편지와 함께 소중한 사람에게 맡겨야만 비로소 당신은 이곳에 안주할 수 있어요.’

그는 여전히 노파의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믿기로 했다. 믿을 수 없기에 믿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자 모든 일이 그저 간단해 보였다. 그는 세상의 모든 공포에서 해방된 이곳에 다다라 마침내 쉴 수 있게 되어 기뻤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영원히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고 홀로 지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었다. 그러자 노파의 목소리가 다정하게 다시 울렸다.

‘걱정 말아요. 당신의 소중한 사람이 상자를 다시 여는 순간 새로운 여행이 시작될 테니.’

칵테일 바 사장은 팔짱을 낀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우리 앞에는 각자 두 잔째 커피가 놓여 있었다. 사장은 이미 두 번째 커피도 다 비운 상태였다. 이야기를 하느라 마실 새가 없었던 나는 완전히 식어 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향은 사라졌지만 지친 입과 목을 쉬게 하기는 충분했다.

“그 상자, 혹시 나도 좀 볼 수 있나?”

“그건 좀 곤란한데요. 주인 허락 없이 함부로 꺼낼 수는 없거든요.”

내 말에 사장은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은 커피를 마시려다 말고 컵이 비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도로 내려놓았다. 내가 다시 커피를 내리려 일어서자 사장은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더 마셨다간 오늘 밤 내내 잠을 못 잘 거야. 그나저나 흥미로운 이야기군.”

“흥미롭죠.”

“일단 여자의 말이 사실이라 치고, 그럼 아직도 상자 안에 아버지의 영혼이 들어 있는 건가?”

“여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렇죠.”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생각해 보면 정말 짓궂은 결말이었다. 평생 동안 폐소공포증을 앓던 남자가 마침내 겨우 찾아낸 안식처가 작은 상자 안이라니.

“여자가 컨토셔니스트라고 했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은 손가락으로 머그컵을 가볍게 몇 번 퉁기더니 말했다.

“혹시 컨토셔니스트가 아니라 허언증 환자가 아닐까? 여자가 상자 같은 데 들어가는 걸 직접 본 적은 있고?”

당연히 본 적이 있었다. 우리에게 긴 밤이었던 그날, 그녀는 내 청에 자신의 묘기를 기꺼이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날, 우리는 또 다른 놀라운 경험과 흥미로운 이야기를 갖게 되었다. 나는 컨토셔니스트의 삼단 접기만큼이나 유연한 마음을 지닌 이라면 누구에게든 들려주고 싶은 그 이야기를 언젠가는 꼭 하게 되기를 바라며 남은 커피를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