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역사를 살펴보면 왕권 세습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운이 좋아서 세종대왕과 같은 명군이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사전에 우려한 것과 같이 나라를 폐망의 길로 이끄는 왕들도 종종 등장한다.
100여년을 발전해온 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왕정이라는 것은 생각하면 불합리하고 나라의 명운을 도박에 맡기는 어리석은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왕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나라의 왕은 없어졌지만 회사라는 조직에서는 아직도 왕이 존재하며 왕권을 세습하는 로열 패밀리들이 있다.
나는 로열 패밀리 회사에서 9년 근무를 했다. 왕정이 불합리하다 생각하면서도 작은 왕정의 한 일원으로서 왕을 위하여 충성을 다했다.
그리고 이 충성의 말로로 나는 이직하는 회사의 첫번째 조건은 ‘로열 패밀리 회사가 아닐 것’이라는 원칙을 세우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혈통이 능력이 되는 곳, 로열 패밀리 회사는 도대체 어떤 곳일까?
1. 낙하산과 절실함
로열의 자녀들은 낙하산으로 회사에 입성한다.
그들은 귀족가문과 같이 우수한 아카데미를 다니면서 학습과 자격을 갖추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채용절차에 합격할 것을 전제로 하지는 않는다.
많은 이들이 같은 학습과 자격을 갖추어 왔기 때문이다. 로열 패밀리의 신하들은 배경이 없음에도 본인의 꿈, 현실을 안정화하기 위한 수단을 갖기 위하여 그것들을 쟁취해왔다. 그들은 채용과정에서 이러한 목표를 쟁취하기 위하여 절실함을 갖고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로열의 자녀들은 이러한 절실함을 이해할 수 있을까?
절실함은 우리의 능력 향상에 주요한 역할을 한다. 같은 능력을 갖고 있다면 조금 더 절실하고 조금 더 노력한 사람이 더 나은 능력을 선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로열은 보통 빠르게 우리의 위에 서게 된다. 나보다 능력이 부족함에도 위에 서있는 그를 우리는 인정하기 어렵다.
이러한 부당함 속에도 우리가 가만히 있는 것은 앞서 말한 본인의 꿈, 현실을 안정화하기 위한 수단이 나의 반발로 휙 날아가 버릴지 모르기 때문이지 납득하기 때문은 아니다.
가끔 일부 기업에서 로열 자녀들임을 철저하게 숨기고 입사하여 회사생활을 하다가 능력을 인정받고 알려지는 케이스들을 자랑처럼 이야기하기도 한다. 당연한 것이지, 자랑할 일은 아니다
2. 불합리한 판단의 일상화
전체 직원 중 팀장이 될 수 있는 확률은 10~20% 정도이고 팀장이 되는 기간도 10년 이상 걸린다.
그럼에도 신입팀장들은 경험 부족으로 인하여 크고 작은 애로사항을 겪게 된다. 이것들을 하나씩 개선해가면서 좋은 리더십을 갖추기 위하여 고민한다.
로열 자녀는 어제는 신입사원으로 들어왔다가 내일은 대리고 모레면 과장이다. 내년에는 팀장, 내후년에는 실장이 될 것이다. 그들은 본인의 리더십을 고민할 시간이 없다. 그리고 아무도 문제삼지도 않을 것이다.
그의 말이 곧 정답일테니까, 그러나 이 아무리 현명한 사람이라도 정답만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자명하다.
이러한 분위기는 그가 본인 스스로를 나는 정말 능력자이고 리더십의 소질이 있는 사람이라고 자기 최면에 빠지게 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는 이제 완벽한 리더가 되었다.
그의 주장에 반하는 의견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근거와 데이터 설득력이 필요하다.
제품의 색깔을 정하기 위하여 디자인, 제품의 특성, 이미지 설문조사 등등을 준비하여 빨간색을 제시하여도 ‘음, 나는 검은색 느낌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하면 검은색으로 결정이 된다.
이럴 때 더욱 열 받는 상황은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는 격으로 가끔 그의 이야기가 맞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더욱 완벽해지고 우리는 뭔가를 모르는 신하로 내가 거둬주고 있는 사람이 된다.
채용과정에서 본인의 지인을 HR이 떨어뜨렸다면 다시 면접을 볼 수 있게 기회를 주기도 한다. 면접에서도 hr이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다시 한번 탈락시킨 적이 있다. 이때 HR은 이렇게 능력있는 인재를 두번이나 탈락시킨 능력이 없는 팀이 되었고 두번의 탈락 끝에 최종입사를 하게 되었다. 결국 이 합격자는 2년을 못채우고 본인 스스로 업무에 적응하지 못하여 퇴사했다.
로열들에게는 휘하에 충신들이 생긴다.
나의 능력을 우수하게 평가해주며 내가 어떻게 말하든 알잘딱깔센으로 처리를 해오는 친구들이 생긴다. 로열들은 이들을 높이 평가하며 아주 중히 쓰인다. 만약 이 그룹 안에 들어갔다면 로열의 눈 밖에 나지 않는 한 앞으로의 회사생활은 문제없다.
충신들은 로열의 권력을 함께 이양 받는데 이것이 또 골치 아프다. 로열과 같이 불합리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인원이 배로 증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는 높은 능력치를 갖추었기 때문에 불합리한 판단을 잘 하지는 않지만, 간혹 감정적이거나 불합리한 판단을 하더라도 추궁받지 않는다. 이렇게 추궁을 안 받는 경험을 조금씩 하다보면 그들은 점점 합리적인 판단을 해야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괴물이 된다.
이러한 충신들도 애로사항은 있다. 로열의 성격에 따라 이 충신이 자주 바뀌기 때문에 불안감이 있다. 이러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하여 업무 성과보다는 로열의 입맛과 관심사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고, 업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니 또다시 불합리한 판단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로열들의 가족행사에 회사직원들이 동원되기도 한다.
초대회장님의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주말 우리는 출근하여 명예회장님(회장님의 배우자)의 요청을 이것 저것 들어야 했다. 회장님이 좋아하셨던 화분, 명예회장님이 좋아하셨던 화분을 추모장소에 배치해야 했다.
화분을 옮기고 있을 때, 계열사에 다니고 있던 로열의 조카가 이렇게 이야기했다. “얘는 누구야?”
이것은 학습된 무례함일까, 선천적인 무례함일까? 그때만큼 우리가 머슴처럼 느껴지는 날이 없었다.
조금 후, 추모식에서는 항상 쓰이던 촛대가 없다며 혼이 나야했다. 본인들 제사 물건을 우리가 못 챙긴 것이 혼날 일이었을까? 혼난 뒤 우리는 인근 장례식장으로 달려가 촛대를 빌려왔다. 잘했다는 칭찬을 듣고 싶어하는 우리가 더욱 비참하게 느껴졌다.
3. 군림하되 통치하지는 않는다.
로열 패밀리 회사들의 문제점은 ‘군림하면서 통치까지 한다’라는 명제가 원인인 듯하다. 군림=통치는 아니건만 그들은 통치를 통하여 군림하려 한다. 마치 삼국지의 정치능력치 99인 제갈공명이 통치를 하고 있는데 정치능력치 70인 유비가 이래저래 간섭을 하는 격이다.
의외로 해외에도 로열 패밀리 형태의 회사가 많다. 그럼에도 이들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를 실천하면서 위와 같은 문제점들을 예방하고 있다.
닌텐도의 전성기를 이끈 야마우치 히로시 회장은 창업주의 손자인 전형적인 로열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취향을 직원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미야모토 시게루라는 평범한 신입사원의 천재성을 알아봤고, 다른 임원들의 반대를 무릅쓰며 그에게 전권을 실어주었다. 이후 미야모토 시게루는 게임계에 전설적인 존재인 마리오와 젤다 시리즈를 만들게 된다.(젤다의 전설은 꼭 해보세요)
야마우치 회장은 자신이 아들이 아닌 평사원 출신인 이와타 사토루에게 자리를 물려주며 세습을 끊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포드 자동차도 로열 패밀리 회사다. 창업주의 증손자인 빌 포드는 2006년 회사의 위기상황에서 자신이 CEO 자리에서 물러나고, 외부 전문가인 앨런 멀럴리를 영입했다. 멀럴리는 회사의 현금을 확보하고 흩어진 브랜드를 하나로 통일하는 결정을 이끌었고 포드는 위기 상황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 빌 포드는 가문의 자존심보다 회사의 생존을 우선으로 했다. 로열 패밀리가 지배가 아닌 수호를 택했기에, 회사는 비로소 파산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러한 레슨런으로 포드사는 아직도 전문경영인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에르메스의 로열은 브랜드의 수호자 역할만을 수행한다. 에르메스 가문은 경영 전면에 나서기보다 '이사회'를 통해 브랜드의 철학이 훼손되지 않는지를 감시하는 역할을 주로 수행한다. 실제 경영은 외부 전문가에게 맡기되, 가문은 에르메스 특유의 장인 정신과 장기적 가치를 지키는 뿌리 역할을 자처하는 것이다. 단기 실적에 급급한 전문 경영인의 폭주를 막는 견제 장치로서 가족 경영을 활용하고 있다.
회사가 흔들릴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로열의 자녀들을 밀어주는 행보가 많은 것을 보면 한국은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애착이 유독 높은 것 같다. 그 애착은 부디 집안에서만 나누었으면 한다. 회사는 가족의 안위가 아닌 일의 본질이 되어야 하는 곳이다. 9년의 충성을 뒤로하고 내가 세운 이직의 첫 번째 원칙으로 ‘로열 패밀리가 아닌 회사’를 정한 것은 어쩌면 민주주의 시대를 사는 직장인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갖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