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감'의 언어
수많은 시적 순간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시적 순간들을 만난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초여름 나도 모르게 부슬비에 젖는 풀잎이 되고, 바람 따라 흔들리는 꽃잎이 된다. 힘겨웠거나 들뜬 마음이거나, 무료하거나 공허한 상태이거나, 불편하고 무거운 일거리를 처리해야 한다 하더라도 이 순간, 어떤 잠시잠깐에는 눈으로 스쳐가기만 해도 마음 한 구석 쉼을 찍고 가게 된다.
한 번씩 가슴을 툭 치고 가는 저릿한 순간들은 내가 어디에 있든, 어느 시간이든 잊고 있었던 나의 원형들이 놀란 듯이 일어나는 지점들이다. 이 순간들은 시를 쓰지 않아도 시가 되고, 노래가 된다. 그저 아, 좋다, 이 한 마디면 그 순간의 시들이, 느낌들이 다 내포되어 있다. 이 한 마디가 시가 아니고 무엇이랴. 이 순간이 시적 순간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 한 마디 속에는 생명이 숨 쉬고 있다. 불순함을 다 내려놓은 이 한 마디는 나의 순수한 원형을 일깨워 생명의 근원이라는 우주와 연결되어 이미 광활한 그곳을 향하고 있다. 날아가지 못하던 몸과 마음이 그 한순간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근원에 닿는다. 그리고 순수하게 나에게로 들어와 우리는 시적 인간이 된다.
바쁘고 정신없는 하루 중에도 어느 한순간 이 지점을 알아챈다면, 그 순간은 나를 살리는 순간이다. 그래서 나는 일상을 이어가고 현실과 근원을 연결하는 자세를 잃지 않는 것이다.
교감, 시의 언어
시는 이 세상의 만물이 내는 소리를 듣고 읽는 마음의 언어이며 삶의 언어이다.
우리는 때때로 만물이 내는 원초적인 소리를 따라 벌거벗은 마음으로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이 순간이 바로 시적 순간이다. 이런 시적 순간들을 맞닥뜨릴 때, 사람들은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회복한다.
아무 치장 없는 가장 원시적인 상태가 되어 자신을 싸고 있는 억압과 욕망들로부터 놓여나 자유가 된다.
나는 본래 어떤 사람인가, 무엇을 원하는가, 나의 내부에 숨어있는 욕망은 무엇인가, 하고 자신을 정직하게 들여다본다.
그렇게 나를 깨우는 시적 순간들은 삶의 곳곳에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살아가는 동안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
새가 날아오를 때, 바람이 불고 비가 흩날릴 때, 햇볕이 이마를 따뜻하게 비춰줄 때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웃음과 눈물을 만날 때, 좋은 책을 읽고 가슴이 두근거릴 때 등 시간 여행을 하는 인생 매 순간, 시적 순간들은 열려 있다.
마음의 소리를 듣는 시적 순간들은 자신의 본성에 충실하고자 하는 생래적 욕구이며 자연으로서의 자신을 만나는 것이어서 불현듯 미묘한 전율과 쾌감이 느껴진다. 이 순간 우리는 모두 시적 인간이 된다.
그래서 시적 인간의 시간이란 가장 원초적이고 자연적인 상태로 돌아간, 정직한 자아가 섰는 순간이며, 나와 모든 사물이 진실되게 마주한 순간이다. 즉 나의 마음과 만물이 신비로운 교감을 일으키는 순간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내재된 시적 인간의 모습이다.
시적 감수성
시적 인간의 감수성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적 감수성이나 생태적 사고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생명을 잉태시켜 온 흙이나 물, 바람, 햇빛 같은 것이 인간의 까마득한 심층심리 속에 뿌리 박혀 있다고 한다면 나와 나 아닌 것은 엄격히 분리될 수 없을 것이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음을 아는 것은 시적 감수성이다. 그래서 시적 감수성은 원시성에 닿아 있고, 그 원시성은 자연의 생명성이 된다. 그러므로 시적 마음은 원초적인 생명성이다. 궁극적으로 시적 인간은 원초적인 생명성을 읽는 사람이고, 그의 시는 생명의 논리에 닿아 있게 된다.
이를 잘 나타내주는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시가 있다.
내 생명은 흙
흙이 우리의 핏줄 속에서 자랄 때
우리는 자라고
흙이 우리의 핏줄 속에서 죽으면
우리도 죽는다.
(파블로 네루다)
흙은 생명이고, 흙을 파내면 생명을 파내는 것이다.
흙, 물, 불, 바람은 지구의 생명을 이루는 근원이고 기후를 이루는 근본 물질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후 위기는 자연상태의 지수화풍이 어그러짐으로써 발생하는 지구에 사는 생명들의 위기이다. 나를 존재케 하는 지수화풍의 존재는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보존하고 그대로 지켜가야 하는 생명줄이다. 우리는 이것을 어그러뜨리지 말아야 한다.
누구나 다 생명 가진 한 주체로서 존중받으며 공존하는 삶의 모습은 시적 인간이 꿈꾸는 세계이다. 치장하지 않고, 애써 조작하지 않고, 눈앞에 놓인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는, 본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이해하고 함께하는 삶이 시적 생명성을 저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세계다.
파고의 시대, 외롭고 쓸쓸하여 절실한
지금 우리의 생활은 소비중심 사회, 과학기술 사회 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자연적인 체험보다 전자매체를 통한 간접적인 가상체험에 집중되고 있는 상태다. 전자매체는 그 내재적인 특성상 시적이거나 심미적인 감성을 체험하기 어렵게 한다.
또, 인공지능이 인간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 지금 세상은 유용함을 넘어선 어떤 위기감을 던져준다. 사람의 마음까지 읽어내고 흉내 내는 AI에게 시적인간의 마음까지 데이터를 갖게 한다면, 사람의 장래는 어떻게 될까? 분명 현대사회의 가치 욕망들은 우리를 더욱 견고하게 이 유용함, 편리함, 신속성, 소비성의 욕망구조 속에 얽어 넣고 시적, 자연적 본성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 삶이 곤고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우리에게 본래의 순수한 본성이 있다는 걸 부정하지 않는 한, 본성과 이 욕망들 사이의 괴리감에서 방황하게 된다.
10여 년 전 인문학 부흥기를 지나 인문학이 퇴조하는 요즘 세상은 어찌 보면 다시 인문학이 절실해지는 세상이다. 경쟁하고, 개발하고, 파고가 일어나는 이런 시대는 삶이 아프기 때문에 너나없이 외롭고 쓸쓸하다. 경쟁사회에서 시적 마음이 무슨 쓸모가 있으랴. 시적 마음을 잃어버린 세상에는 시가 별로 쓸모가 없다.
그러나 세상이 점점 물적 관계가 되고 우리 내면의 위기가 심화될수록 세상에는 쓸모없는 시가 더 절실하게 요구되어야 한다. 우리의 내면에 ‘쓸모없음’의 공간이 더 많이 확보되고 확장되어야 숨 쉬고 살아갈 수 있다.
잡초가 우거진 밟지 않는 땅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우리의 삶을 원만하게 만들어 주는 땅이다. 발 디디는 자리만 남겨 놓고 나머지 땅을 쓸모없다고 하여 잘라낸다면 우리가 한 발짝이라도 더 나아갈 수 있겠는가?
그렇듯이 돈이 되지 않는 ‘쓸모없는 시’는 우리의 원시적 생명성을 일깨우고, 시적 감수성은 생명을 일깨우는 정신으로 작용할 것이다. 불어오는 바람이 풀잎을 흔들듯이 '쓸모없음'의 시적 마음으로 세상을 깨워야 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사회적 욕망의 인간으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인간성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처럼 우리는 우리에게 내재된 시적 인간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