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 머피의 법칙

파리, 리스본, 스페인 여행기

by 유한성

record of my jounery_ PARIS, PORTUGAL, SPAIN



오랑주리에서 제법 낭만적인 시간을 보낸 후 다시 아까의 그 다리로 돌아갔다. 그대로 떠나기엔 다리가 너무 예뻐 사진을 몇 장 더 찍기로 했다. 서로를 찍어주던 우리는 작렬하는 태양에 지쳐버리고 말았다. 그늘 아래에서 어디를 갈까 궁리하다 개선문으로 향하기로 했다. 나는 파리 여행을 했던 첫날 이미 가보았지만 제제 언니는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언니는 그곳에 있는 디즈니 스토어를 꼭 가보고 싶어 했다. 어차피 따로 생각해둔 동선이 없으니 기꺼이 언니와 함께 디즈니스토어를 방문하기로 했다.


개선문은 샹젤리제 거리와 이어져 있었고, 우리는 길을 쭉 걸어가면 샹젤리제 거리가 나오는 콩코르드 광장에 있었다. 참 애매한 거리였다. 그 더위에 걸었다간 둘 중 하나는 제대로 탈이 날 것 같았다. 택시를 잡아 탈지 버스를 타고 갈지 한참 고민하던 우리는 결국 버스를 타기로 했다.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내내 발이 갈수록 무거워지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땀도 안 나는데 이렇게 더울 수 있는 건가. 필사적으로 그림자 아래만 꾹꾹 밟았다. 빛으로부터 숨기 위함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았다. 구글 지도에서는 8분 후 도착이라는 정보를 제공했지만 세 대의 버스가 지나갔어야 할 시간 동안 그 어느 버스도 우리 앞에 정차하지 않았다. 콩코르드 광장은 파리 올림픽을 위해 새단장을 하고 있는 상태였고, 알고 보니 공사를 이유로 그 인근 정류장에서는 버스가 정차하지 않았다. 낙담한 우리는 더위에 허덕이며 다급하게 택시 어플인 그랩과 우버를 깔았다. 하지만 몇 번을 호출해보아도 택시는 잡히지 않았다. 결국 꽤 거리가 있는 지하철역까지 걸어가 지하철을 탑승할 수밖에 없었다. 파리의 지하철은 한국 여느 지하철과 아주 많이 다르다. 일단 시원한 공기가 제공되지 않는다는 것에서부터 차이가 있다. 유례없던 더위가 프랑스를 덮쳤고, 에어컨이 없는 지하철을 감내하기에 그 열기는 버겁기 그지없었다. 하도 걷느라 다리는 마비되듯 아려왔고 뜨거운 열기는 온몸을 적셨다. 개선문 근처 역에서 내린 우리는 스타벅스를 찾기로 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절실했다. 그런데 웬 걸. 역에서 올라오자마자 우리를 반기는 구름 같은 인파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디즈니 스토어도 마찬가지였다. 언니는 그곳에서 구매하고 싶다던 물건을 찾지 못했고, 스타벅스에는 앉을자리가 없었다. 대안책인 맥도널드로 향했지만 그곳도 마찬가지였다. 에너지가 동난 나는 좀비처럼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체력 배분을 실패했다. 생각하지도 못한 변수들이 많았던 날이라 그런지 몸이 축축 늘어졌다. 임시방편으로 근처 가게에 방문해 앉아 젤라또를 먹던 우리는 결단을 내렸다. 그냥 숙소로 돌아가서 컵라면이나 먹자고. 그다음 날 디즈니랜드를 가고 그리고 그다음 날에는 몽생미셸 투어를 앞둔 나를 위해 제제 언니가 배려해준 것이었다. 계속 이러다간 앞으로의 여행도 망칠 수 있으니 오늘은 이만 쉬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판단 하에 내린 결정이었다.


결국 우리는 숙소로 돌아왔다. 기분 좋은 서늘함을 지닌 숙소 안에서 숨을 고르다 한국에서 바리바리 싸들고 온 비상식량을 꺼내 들었다. 불닭볶음면을 품에 안고 우리는 정원으로 나왔다. 그늘 아래 자리 잡아 허겁지겁 라면을 먹어치웠다. 그것도 모자라 따로 준비해온 3분 짜장까지 나눠먹었다. 전날 구매한 납작 복숭아까지 디저트로 먹은 우리는 아주 만족하며 해가 지지도 않은 시간부터 잠에 들었다.


생각해보면 이날은 뭐가 안되어도 한참 안 되는 날이었다. 트램도 반대로 탔지. 날은 미친 듯이 더웠지. 버스는 오지도 않고. 두더지 게임처럼 각종 변수들이 트리거가 되어 골칫덩이로 발현한 날. 한 번이면 몰라. 여러 번 반복되면 사람은 지치고 흐물흐물해진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꼭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제제 언니와 나는 이 골치 아팠던 날 서로의 여행 스타일을 파악했고, 예민해질 때 서로가 어떤 모양이 되는지 알 수 있었다. 이 날을 계기로 앞으로 어떤 식으로의 여정이 우리에게 슬기로울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장기적으로 보면 기필코 필요했던 날이었던 셈이다.


꼭 여행할 때가 아니더라도, 삶에서 마주하는 유독 일이 잘 안 풀리는 날은 파리 여행의 넷째 날을 반추할 것 같다. 나름대로의 교훈을 준다는 것과 잠시 쉬어가는 것도 해답이 될 수 있다는 걸 느끼게 해 준 그날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