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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마귀 네트워크 Aug 10. 2021

광인과 걸인 사이

제1화

  그가 바로 내 앞을 지나간다. 눈앞에서 딱 마주치는 이런 날이 언젠가는 올 줄 알았다. 


  버스를 기다리는 무리를 무심히 지나치면서 그는 내려앉는 눈꺼풀을 추켜올리려 애쓴다. 졸음이나 허기에 겨운 눈꺼풀이다. 바래고 낡은 자주색 면 티셔츠는 베이지색이었을 바지춤에 추슬러 넣고, 검은 허리띠는 반듯하게 허리를 한 바퀴 돈 다음 조금 더 돌다가 얌전하게 멈추었다. 


  늘 그렇듯이 그는 차도와 보도를 가르는 경계석 위로만 발걸음을 뗀다. 중요한 서류에 도장을 찍듯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나아간다. 베고니아를 가득 담은 원형 화분이 그를 가로막는다. 그는 멈칫거린다. 나는 두근거린다. 베고니아 꽃잎을 훑어 손을 씻은 그는 짓물러 떨어지는 꽃잎을 벌써 잊는다. 차도로 내려 베고니아를 지난 후 등산가가 마지막 한 발을 정상에 내디디듯 다시 경계석 위로 올라와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하는 경계석을 따라 끝도 없을 길로 사라진 그는 ‘좀머씨’*인가.


  출근할 때나 퇴근할 때, 직장 근처에 볼일이 있어 외출했을 때, 혹은 사무실 창으로 거리를 내려다볼 때, 먼발치로 대리석풍의 경계석 위를 지친 몰골로 걸어가는 그를 볼 수 있다. 그의 주거지가 이 근처라는 짐작에도 불구하고 몇 개월이 지나도록 그가 누구와 말하는 것을 본 일이 없다. 앉아서 구걸하는 것도 본 적이 없다. 그동안 그의 의복은 단 두 벌이었다. 검은색 상하 한 벌, 자주색 상의와 베이지색 면바지 한 벌. 상의는 늘 하의의 허리춤에 단정하게 들어가 있었으나 때에 잘근잘근 절어 있었다. 


  그는 고요하므로 광인이 아니다. 구걸하지 않으므로 걸인도 아니다. 무엇을 먹고 어디서 머물며 옷은 누가 갈아입혀 주나 따위의 세상 근심은 나 같은 사람이 해주지, 그는 다른 세계를 돌아다니다 문득 돌아와 송파의 한 거리를 배회할 뿐이다.   

   

  잠실역 지하도에서 가끔 마주치는 또 한 남자. 


  곱슬머리가 새끼줄 가닥처럼 엉기며 자라 어깨를 넘쳐나고, 멀리 지나쳐와 돌아봐도 여전히 그 자리에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서 있거나 계단 한쪽에 정물처럼 앉아있는 그의 악취와 얼굴이며 손등이며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단벌인 재킷의 검은 색감은 이미지의 일치를 이룬다. 


  긴 머리에 꼬불거리는 파마를 해서 머리카락을 한껏 부풀린 록(Rock) 가수도 있고, 머리에 손대는 걸 싫어해서 감지도 깍지도 않는 소설가의 전례도 있으므로, 처음 본 행인들은 대뜸 그를 젊고 괴팍한 예술가로 추측하면서 지나치기 알맞다. 그의 몰두는 그만큼 깊다. 자신의 속으로 깊숙이 걸어 들어가느라 그만 지상의 길을 잃고 만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비슷한 장소에서 두세 번쯤 마주치다 보면 그는 예술가보다 철학가에 가깝다. 혼란스러운 세상을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킨 듯 초연하기 그지없다. 시간의 물살이 급박한데, 그는 그 물가에서 낚시도 하고 일광욕도 한다. 더 자주 마주치는 사람은 드디어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의 바지와 아마도 흰색이었을 남방과 검은색 재킷은 그가 세상에서 자신의 내면으로 출가(出家)할 때 입었던 그 옷 그대로가 아닐까. 


  그는 고요하므로 광인이 아니다. 구걸하지 않으므로 걸인도 아니다. 무엇을 먹고 어디서 머물며 무슨 낙으로 사는지 따위의 세상 근심은 나 같은 사람이 해주지, 그는 다른 세계를 돌아다니다 문득 돌아와 송파의 한 거리를 배회할 뿐이다.        

  

  그들 같이 되는 나를 상상해 본다. 가끔 그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나는 그들처럼 침묵할 자신이 없다. 정중한 옷차림새를 유지하면서 차도로 뛰어들지 않을 자신이 없다. 그저 베고니아 꽃잎에 손을 씻거나, 가끔 마주칠 때마다 자신을 몰래 쳐다보면서 미세한 감정의 동요를 얼굴 표정에 드러내지만 눈 한 번 마주치지 못하고 외면한 채 지나가는 한 여자 따위를 무시할 자신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과의 끈을 놓아버리고 도로의 경계석을 택한 ‘좀머 씨’나, 지하도를 택한 ‘디오게네스’처럼 나는 세상을 놓아버리면 무엇을 잡게 될 것인가. 세상에서 잘 살아간다는 것은 광인이 아니면서 떠들고 걸인이 아니면서 구걸하는 삶에 익숙해지는 것과 비례한다고 은연중에 믿어온 소신 때문에 엇갈려 지나치면서 그들과 눈 한 번 마주치기가 사실 그렇게 두려웠는지 모른다.  


  광인과 걸인 사이에서 그다지 자유롭지 않은 나의 내면은, 그러므로 거리를 배회하지도 않을뿐더러 시간의 급물살을 타고 세상으로만 돌고 돈다.              



     *파트리크 쥐시킨트,『좀머씨 이야기』의 주인공. 배낭을 짊어지고 지팡이를 쥔 채 태풍이 오고 눈이 오고 햇살이 뜨거워도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시간에 쫓기듯 계속 걸어 다니는 고독한 내면의 운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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