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봄이 시작되는 3월이 되면, 이미 뭉개진 고동색 목련이 항상 기억에 남았다.
찬 입김이 눈에 보이지 않을 때가 왔을 때, 이상하게도 고동빛을 띤 목련들이 마음 한구석에 맴돌았다.
이것은 무의식의 영역이라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길을 걷다 피어나는 생명체들에는 시선이 머물지 않았다. 오히려 언제 피었는지도 모르고, 그마저 이미 떨어진 꽃들을 의식하고 마음속에서 그려내고 있었다.
언젠가 문득, 왜 늘 지고 난 것들에 대해 마음이 쓰이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본 적 있다. 그 생각은 나와 나 사이의 오해를 만들었다.
누군가 나에게 그 고동색을 생각하지 말라고 강요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어린 시절의 나는 ‘3월의 봄’을 떠올릴 때, 햇살 아래 피어 있는 꽃잎이 아니라 이미 뭉개지고 밟힌 고동색 목련을 떠올리는 내 자신을 쉽게 용납하지 못했다. 그래서 스스로를 향해 여러 가지 생각을 쏟아냈다.
‘내가 이 계절을 잘 즐기지 못하고 있는 건가.’
‘왜 내 세상은 어두운 색으로만 칠해진 것 같지.’
따스한 봄날에 고동색이 자꾸 눈에 밟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끊임없는 오해를 만들었다. 그렇게 오해들은, 언제 피고 언제 졌는지도 모르게 지나가버린 목련처럼, 어느새 계절 속에 묻혀 사라진 감정이 되어 있었다.
고동색 목련조차 받아들일 수 없었던 지난날의 나는, 매해 3월이 올 때마다 그 고동색을 떠올리며 자랐다. 그리고 ‘순수함’이라는 단어를 쉽게 꺼낼 수 없는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고동색 목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고동색 목련이 마음 속에서 맴돌았던 것은 유별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단지 무언가의 ‘경계’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해가 저물어 가는 해질 무렵처럼,
덥지도 춥지도 않은 선선한 바람처럼,
나는 언제나 어중간한 그 사이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벚꽃이 피기 전, 그 경계에 고동색 목련이 있었다. 나는 그마저 좋아했기 때문에, 이미 뭉개진 꽃 잎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3월의 시작은 벚꽃이 아니라, 고동색 목련이다.
흩날리는 벚꽃잎이 아니라, 눈처럼 내려앉은 목련 꽃잎이 나의 봄눈이다.
그렇게 나는 어린 시절의 나에게 조용히 오해를 풀어주었다.
새로운 계절의 신호를, 이제는 굳이 부정하지 않아도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