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의 프로세싱-1
신문지를 구기며 오목한 그릇들이 깨지지 않게 포장하던 엄마가 소리 없이 울고 있다. 나는 옷을 개키다 말고 엄마 곁으로 가서 아무 말 없이 앉았다. 이내 엄마는 눈물을 훔치며 "잘 살려고 가는 건 아는데.."라고 말하다 다시 운다. 일주일 후면 해외이사를 위해 짐을 가지러 오는데 아직 엄마와 나는 그 자리 그대로 마음을 묶어둔 채 다시 조용히 짐을 싼다. 쓰고 있던 그릇 하나하나에 엄마는 기도를 하듯 곱게도 포장하고 계신다. 두 살 난 아들이 낮잠에 일어난 소리에 그제야 엄마도 나도 눈물을 닦을 수 있었다.
일주일 후 커다란 사다리차와 이삿짐 직원분들의 북적거림이 끝나고 두 달 뒤에 캐나다 주소로 배송될 거라고 했다. 선박에 실려올 세간살림을 보내고 엄마와 나는 우리가 좋아하는 칼국수를 먹으러 갔다. 목구멍에 짠내가 섞인 탓에 그날따라 칼국수가 유난히 간간하게 느껴졌다.
그 시절 즈음에 캐나다 이민은 방문비자로(visitor) 가서 현금을 받고 일을 하다가 오너가 오퍼를 주면 취업비자를(LMIA) 진행하고 이어서 영주권을(PR) 취득하는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남편 역시 캐나다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한국인 오너를 찾아 전화로 인터뷰를 하고 일주일 만에 캐나다로 여행 가는 사람처럼 짐을 싸서 두 달 전 출국을 했다. 남편은 프랑스에 있는 세계 3대 요리학교를 졸업한 인재였고 한국에서의 경력도 꽤 괜찮았다. 여러 조건이 좋으니 당연히 영주권까지 무리 없이 진행될 거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밴쿠버 랍슨 스트리트(정말 핫한 거리)에 있는 가게에서 일을 했고 남편은 매일 "사장님도 잘해주시고 일도 할만해. 일단 공기가 좋아서 아들한테 좋을 거야"라고 같은 말을 했다.
다니던 내내 행복했던 직장을 퇴사하고 해외 이삿짐을 보내고 남편의 말을 믿고 마음은 한국에 두고 출국을 했다.
그날따라 유난히 볕이 좋았다. '나의 새로운 터전의 방향으로 빛을 비추어 주시나 보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