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아침부터 작은방 카펫 바닥에 쟁반도 없이 4L짜리 와인을 통째로 갖다 놓고 마시고 있다. 13년째 이곳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캐나다의 카펫 문화는 적응되지 않네, 와인 흘리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스치면서 더 꼴 보기가 싫어졌다. 사실 어젯밤의 사건 때문에 더 그랬던 게 정확한 이유지만 한 번 빗나간 마음은 나의 모든 신경들을 일으켰다. 무거운 잠을 자고 아침이 된다 한들 나아질 리 없다.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난 후 냉랭한 분위기 속에 나는 출근준비를 했고 휴일인 남편은 술과 먹다 남은 프링글스를 챙기고, 우리는 각자의 행동을 했다. 어제의 일은 분명 남편의 잘못인데 여전히 그는 묵묵부답. 3일 전 갱년기 진단을 받은 나로서는 1도 배려받지 못하는 나 자신이 너무 가엽게 느껴졌다. 언젠가 부부상담을 할 때 카운슬러가 "싸움을 했더라도 상대가 슬쩍 말을 걸어오면 화해의 사인이니 받아주세요"라고 당부했던 말이 생각났다.
좋다. 네 잘못이지만 내가 먼저 말 걸어 봐주지 라며 "안주 뭐 만들어줘?"라는 내 물음에 남편은 귀씹(귀로 듣고 씹음)을 했다. 나도 일부러 들으라는 듯 가라지 문을 쾅 닫고 출근해 버렸다. 일을 하면서도 겉으론 핸드폰을 슬쩍슬쩍 보며 속으로는 온갖 욕을 하며 하루에 반나절을 보냈다. 어라? 아무리 화가 나고 싸워도 전화 올 시간이 지났는데 핸드폰은 잠잠했고 나의 화는 솟구쳤다. 갱년기라고 진단을 받았다는 생각 때문인지 예전보다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전화를 하려고 보니 '사랑하는 내 꽁승♡'이라고 돼있길래 욱 하는 마음이 생겨 저장된 이름을 ' ૮ .• ﻌ • ა 같JI'로 바꿨다. 남편의 last name은 JI 다.
차마 개XX로 하진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강아 JI로 하기엔 귀여운 느낌인 것 같았다.
이름을 바꾸고 혼자 소심한 복수를 했다는 생각에 조금은 위로가 되다니! 귀씹하고 묵묵부답인 남편에게 타격도 없는 약한 쨉 한 방을 치고 나니 조금 웃음이 났다.
치사하다 : 행동이나 말 따위가 쩨쩨하고 남부끄럽다
국어사전에 찾아보니 나는 쩨쩨하지 않았고 남부끄럽지도 않았으니 이번 싸움은 내가 이긴 건가?
어둑한 밤이 돼서야 퇴근하고 집에 오니
૮ .• ﻌ • ა같JI 가 코를 실컷 골며 잠들어있었다.
남편의 자는 모습이 짠해 보이면 그걸로 끝이라던데(백년해로?) 그 모습을 보니 화가 나있던 마음의 틈이 생기고 미안해졌다. 1년 전부터 주말부부인 데다, 내가 레스토랑을 운영하다 보니 시간 할애가 어렵고 결국 아이들과, 남편과 함께하는 시간이 없어서 벌어지는 싸움이었다. 잠들어 있는 남편 옆에 누워 다시 저장된 이름을 변경했다. '울서방♡'으로.
서방아! 치사하게 굴었던 건 나인 것 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