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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orever young Oct 22. 2023

서럽고 억울해서 펑펑 울었던 기억

교육의 목적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만든 시험 문제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목적을 물으면, 아마도 경제적 자유를 첫 번째로 꼽을 것이다. 그런데 부자들 중에 그 자유를 즐기기보다 그 부를 관리하느라 자유가 부족해지는 사람이 많다. 비하해서 말하면 돈의 노예.


공부를 잘해서 좋은 성적을 받으려는 사람의 목적을 물으면, 아마도 지적을 능력을 길러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라 답할 것 같지만, 현실은 출제자의 의도 파악을 잘하는 눈치 빠른 하수인에 알맞은 사람이 되는 경우가 많다. 비하해서 말하면 성적의 노예.


왜 성적이 좋은 사람들이 비겁자가 되는지, 스스로의 생각하고 자기 논리를 세우기보다 평가자의 의도에 자신을 맞춰야 학업에 성공하는지를 보여주는 경험을 했다.

다음은 내가 중2 때 마주한 문제다.


중학교 기술 교과 해양 단원에서 출제된 문제

나는 교과서 내용을 잘 알고 있었고, 출제자인 교사가 3번을 답으로 하려고 낸 문제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교사의 비위를 맞춰주기 싫었던 나는 3, 4번 둘 다 적었다가 마지막 순간에 4번만 적어서 제출했다. 그래야 출제한 교사랑 더 잘 싸울 수 있을 같아서다. 3, 4번을 두 개를 쓴 것은 맞은 것으로 인정하기는 어렵지 않지만 4번만 쓴 것을 답으로 인정하는 것은 출제한 교사의 자존을 더 상하게 할 것이라서. 이래서 중2가 무섭다. 


   정답은 역시나 3번으로 발표되었고, 나는 계획대로 출제 오류를 따지기 위해 교무실로 그 출제자를 찾아갔다. 중년의 여자 교사였던 그분은 그때 다른 선생님들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내가 시험지를 보이며 질문을 하자, 나를 힐끗 보더니, 무시하고 손짓으로 나가라고 했다. 상대도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살면서 처음으로 겪어본 심한 무시였다. '공부 못하는 학생은 이렇게 무시를 당하는구나'.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교무실 문을 '꽝'하고 세게 닫고 나왔나 본데, 그다음 날 아침에 그 교사가 나를 기술실로 따로 불렀다. 주변 교사들 중에서 나를 아는 사람이 억지 주장할 학생이 아니라고 조언을 해 줘서인지, 전날처럼 무시하지 않고 나름의 논리를 폈다.


"네가 교과서 내용을 정확히 외웠다면 500m 이외의 숫자는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도 지지 않고 답했다.


"교과서의 내용(수심이 깊을수록 어두워 진다.)을 이해한 사람이라면 1,000m는 무조건 암흑 상태라는 것을 모를 수 없다."


논리로 안 되겠다 싶었던 그 교사는 내가 교무실 문을 세게 닫고 나갔기 때문에 싸가지가 없어서 정답 처리해 줄 수 없다고 했고 그 선생이 이겼다. 


내가 펑펑 소리 내어 서럽게 울었던 때는 교무실 문을 꽝 닫고 나왔을 때다. 교무실에서 출제자 선생님에게 무시당한 것이 분하고 억울해 씩씩거리고 있는데 한 친구가 다가와 왜 그러냐고 물어서 그간의 일을 말해줬다. 다 듣고 난 그 친구는 이해가 내가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그 한 문제의 점수가 너에게 무슨 의미가 있냐면서. 친구의 말이 맞다. 그 한 문제의 점수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내신 성적으로 고교 입시를 준비하는 것도 아닌 평준화 지역이라서. 하지만 내가 그 문제로 그렇게 싸운 이유는 '공부하는 목적'을 건드리고 있어서다. 단순 지식 암기가 아닌 개념과 원리를 이해해서 생각의 힘을 기르는 것. 이런 내 뜻에 동의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서러웠다. 내가 펑펑 눈물을 쏟는데 트리거가 된 친구는 왜 우는지 몰라 난감해하면서 위로하는 시늉을 했고, 난 한참을 울면서 감정 배설을 마치고 안정을 찾았다.


이런 억지 문제는 학생들을 스스로 생각하길 포기하고 지배자의 눈치를 살피는 사람으로 길들인다. 진리를 추구하기보다 권력자의 통제에 안주하는 비겁자로 길러진다. 학생 때는 이렇게 시험 성적에 지배된 사람들은 직장인이 되어서 돈의 지배를 받는 것에 익숙해진다. 지배받는 것에 익숙한 비겁자를 양성하는 학교 교육. 권위주의 국가가 국민을 가르치는 목적이다. 그래서 교육 시스템으로부터 자발적으로 낙오한 사람들이 생긴다. 


교육계도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학력고사에서 94년부터 수능으로 바꾼 것도 나름 변화를 위한 노력인데, 이것 역시 X세대의 부상과 시기가 비슷하게 겹친다. 이젠 수능도 너무 오래되어 새로울 것이 없게 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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