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간송 미술관 개관 특별전 『與世同寶-세상 함께 보배 삼아』
푸른 하늘이 감싸 안은 대덕산 기슭에 2024년 4월 2일 대구간송미술관이 새롭게 자리를 잡았다. 개관을 기념하고자 한국의 국보와 보물 40건 97점을 모아 개관기념전(2024년 9월 3일~ 12월 1일)을 개최하였다. 미처 오지 못한 석탑과 승탑은 아쉬움을 달래고자 그 모습을 디지털 미디어로 구현하였다.
『여세동보-세상 함께 보배 삼아』는 출품작들을 연결하는 주제보다 하나하나가 보배라는 점에 중점을 두었다. 각각이 갖는 가치를 온전하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4개 전시실을 마련하고 실별로 차별화한 공간을 구성하였다.
장중한 분위기가 감도는 전시실에서는 이정의 금빛으로 물든 회화가 관람자를 맞이한다. 이어지는 중앙의 커다란 공간에서는 정선과 심사정의 산수화를 비롯해 김홍도·김득신·신윤복의 인물화와 풍속화 등 다양한 회화가 반긴다. 그리고 마지막 영역에서는 조선의 풍경을 담은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배웅한다. 이 모두를 통해 조선시대 대가들이 이룩한 회화의 진수를 느낄 수 있다. 아울러 중앙의 공간에는 진열장을 세워 놓아 기념비적인 영역을 마련했다. 이곳에 조선 문인들이 우주 만물의 이치를 소리로 구현하고자 애용한 거문고의 악보를 비롯해 세 권의 책이 자리하였다. 모두가 조선의 학술과 문화를 대변하는 문화유산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과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미술을 각각 꼽는다면 「훈민정음 해례본과 신윤복의 <미인도>이다. 이를 위해 특별히 독립 공간을 설계했다. 해례본은 세종이 글을 모르는 백성을 위해 쉽게 쓸 수 있는 글자 체계인 '훈민정음'을 완성한 후 그 원리를 정리한 책이다. 전시에서는 세종의 애민 정신을 확장하고자 소리라는 비시각적 방법을 이용해 장애가 있는 분까지 훈민정음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이를 위해 다양한 배경을 가진 시민이 참여하였고 이들의 음성은 현대 작가의 뉴미디어 작품으로 태어나 해례본의 주위에서 조용하면서도 조화로운 합창을 한다.
신윤복의 <미인도>는 독대의 방식으로 관람자에게 다가간다. 이 공간에는 작품 자체만을 느끼게끔 외부 요소를 더하지 않았다. 다만 작품에 있는 인장과 시를 추출하여 현대 기법을 이용한 디자인과 조형으로 풀어냈다. 이를 통해 봄기운 같은 화가의 마음이 관람자에게 전달된다.
전시에서는 불교미술과 도자기, 그리고 서예가 출품되었다. 세 구획으로 나뉜 전시실에서는 김정희 등의 작품을 위해 마련된 긴 공간이 관람자를 맞이한다. 두루마리처럼 펼쳐진 비면에는 서예 필치로 그려야 하는 난초 그림을 시작으로 예서에 근간을 두면서 여러 글씨체를 융합해 누구도 오를 수 없는 경지를 보여주는 서예가 먹의 향연을 펼친다. 그 속에 이광사의 작품을 함께 전시하여, 너무나 다른 두 예술가의 서풍을 시각적으로 대비시키고자 했다. 이어서 도자기의 형태에서 착상한 곡면의 공간이 나타난다. 유려한 선을 만들며 높이선 고려와 조선의 청자와 분청사기, 그리고 백자는 저마다 아름다운 자태와 색깔을 뽐낸다. 전시 마지막에는 삼국과 고려의 불교미술이 자리하고 있다. '원만하고 차별 없는 융합 [원융]'의 의미를 담은 원형 공간에서 종교미술은 숭고미로 관람자에게 다가가며 전시를 마무리한다.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은 6세기경 삼국시대의 일광삼존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불상이다. 이 불상은 소용돌이 모양의 불꽃 문양이 새겨진 광배를 배경으로 본존불과 좌우의 협시 보살이 함께 서 있는 형태로, 일광삼존 양식의 전형적인 특징을 담고 있다. 본존불과 보살의 갸름한 얼굴, 양어깨를 감싼 두툼한 옷, 그리고 장식적인 연꽃 문양의 대좌는 중국 북위 시대 불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불상 뒷면에 새겨진 글에 따르면, 이 작품은 계미년(563년)에 보화라는 인물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삼국시대에는 부모와 조상의 안녕을 기원하며 불상을 제작하는 문화가 널리 퍼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화려한 광배와 고요한 부처의 얼굴이 조화를 이루며, 삼국시대 불상의 높은 조형미와 제작 수준을 잘 나타내고 있다.
<금동삼존불감>은 높이 17.8cm의 소형 불감으로, 사각의 기단 위에 삼존불을 모시고 그 위를 불당 형태의 감실로 덮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불당 모양을 본뜬 불감은 정교한 건축적 특징을 담고 있는데, 우진각 지붕, 용마루 끝의 장식물, 공포와 기둥 표현 등이 당시의 건축 양식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이 불감은 고려 중기 이전의 단순한 건축 구조를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로, 당시 건축 요소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점에서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불감 내부의 삼존불은 본존불과 좌우의 보살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존불은 오른손을 들어 시무외인을 짓고, 왼손으로 땅을 가리키는 촉지인을 하고 있다. 석가모니불로 추정되지만 명확한 도상을 확인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이 불감은 불상과 건축 양식이 결합된 독특한 문화유산으로, 고려 시대의 예술성과 종교적 표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청자 음각환문병>은 고려청자의 비색과 정제된 품격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중국 송나라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다. 병의 형태는 고대 청동기를 모방하여 목과 몸체, 굽을 별도로 제작해 연결하였고, 경계선에 띠를 두르는 세심함이 돋보인다. 이 병은 의례용 술항아리였을 가능성이 크지만, 일상에서는 꽃병으로도 쓰였을 것이다. 빙렬이라 불리는 몸체 표면의 잔잔한 균열과 고요한 비색은 청자의 순수한 미감을 극대화한다.
<청자양각도철문정형향로>는 고려시대 왕실 의례에 사용되었던 기물로, 고대 청동기를 모방하여 정형화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원통형 몸체와 세 개의 다리, 음각 뇌문 바탕에 양각 도철문을 새긴 문양이 특징이다. 이 향로의 정교한 제작 기법과 균형 잡힌 조형미는 고려청자의 기술적 완성도를 보여준다.
<청자기린유개향로>는 뚜껑 위에 조각된 기린은 앉아서 머리를 치켜든 자세로 정교하게 표현되었으며, 유약 아래의 맑고 투명한 비색이 돋보인다. 기린은 상서로운 짐승으로, 그 모습은 고려청자에서 종교적, 상징적 의미를 담은 작품으로 자주 등장한다. 이 향로는 고려 왕실의 특별한 용도를 위해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청자 오리형 연적>은 세부 표현과 발색이 뛰어난 작품으로, 고려청자의 정교함을 대표한다. 오리의 자연스러운 자세와 유려한 비례, 연꽃 봉오리를 물고 있는 모습은 고귀함과 풍요로움을 상징한다. 이 연적은 기능성과 심미성을 모두 갖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청자 모자 원숭이형 연적>은 원숭이를 형상화한 상형 청자 중 하나로, 어미와 새끼의 교감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새끼 원숭이가 어미의 뺨을 밀며 서로 다른 방향을 보는 모습은 생동감과 관찰력이 돋보인다. 원숭이는 벼슬을 상징하며, 모자 연적은 대를 이어 높은 지위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청자 감연지원양문정병>은 조선 후기 일본인들의 도굴로 세상에 드러난 고려청자는 간송 전형필의 노력으로 보존되었다. 이 정병은 고급스러운 비색과 세밀한 장식으로 고려 도자기의 예술적 정수를 보여준다. 고려청자는 조형미와 실용성에서 높은 가치를 지니며, 동아시아 문화 교류의 산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청자상감국모란당초문모자합>은 13세기 상감청자의 정수를 보여주는 예로, 국화와 모란 무늬를 흑백의 상감 기법으로 정교하게 새겼다. 모합 형태로, 커다란 합 안에 다섯 개의 꽃잎 모양 작은 합이 들어있어 조형미가 뛰어나다. 특히 검은 줄기와 흰 꽃의 강렬한 대비는 화려함과 우아함을 동시에 나타낸다. 이는 왕실이나 귀족들의 주문으로 제작된 것으로, 당시 상감 기술의 최고 수준을 보여준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완벽한 기형과 정교한 상감 문양으로 고려청자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도교적인 상징을 담은 구름과 학 무늬가 흑백 상감 기법으로 병의 전면에 꽉 차게 배치되었다.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문양 구도는 철학적 깊이를 더하며, 무신 정권 시대의 장식적이고 웅장한 미감을 잘 반영한다.
<백자 박산향로>는 둥근 몸체와 삼족 대좌 위에 산 모양의 뚜껑으로 구성된 향로로, 중국의 박산향로에서 유래했다. 박산향로는 한 무제 시기부터 시작되어 남북조와 수당대를 거쳐 금속제와 도자기로 발전하였다.
이 향로의 몸체에는 단순화된 동물 모양의 다리가 달려 있고, 뚜껑 정중앙과 측면에 구멍이 있어 연기가 나오도록 설계되었다. 뚜껑에는 산 모양 장식이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태토는 백색도가 높고 치밀하며, 유약은 투명도가 높아 청백색을 띤다.
뚜껑과 접촉면 일부에 유약을 바르지 않았고, 몸체 바닥에는 모래받침 흔적이 있어 원형 도침 위에서 구운 것으로 보인다. 송나라 청백자와 유사한 형태와 색감으로 인해 제작지가 명확하지 않으나, 송나라 영향을 받은 고려 백자로 추정된다.
<분청사기상감모란문합>은 분청사기 특유의 멋과 조선적 정서를 잘 드러낸 작품이다. 모란꽃과 넝쿨 문양이 대범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뚜껑이 몸체를 감싸는 반합 형태는 고려 말 상감청자에서는 보기 어렵고 15세기 이후 조선의 분청사기와 백자에서 나타난다.
이 작품은 면상감 기법으로 모란 문양을 단순화하고, 굵은 선과 면을 활용해 평면적이면서도 넝쿨의 율동감으로 생동감을 더했다. 뚜껑과 몸체 가장자리의 풀문양은 주요 문양을 단정하게 마무리하며, 몸체의 풍성한 형태와 높은 굽은 청동합을 모방해 안정감을 준다.
분청사기의 전통과 독창성을 보여주는 이 합은 제례용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초기 상감분청사기의 대표적 수작으로 도자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분청사기박지철채연화문병>은 고려청자의 쇠퇴와 조선백자의 태동 사이에 등장한 분청사기의 도답고 순한 멋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병은 바깥으로 벌어진 입구, 짧은 목, 둥근 물방울 형태의 몸체로 이어지는 곡선미가 돋보이며, 15세기 조선에서 제작되었다.
백토 분장 위에 박지기법으로 연꽃 문양을 그린 후, 산화철 안료를 덧칠하여 어두운 녹색조 배경과 하얀 문양의 선명한 대조를 만들어냈다. 표면의 조밀한 균열은 오히려 문양에 회화성을 더하며 생명력을 부여한다.
이 병은 전라도 지역 가마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음각, 박지, 철채 기법을 모두 활용한 예로는 매우 희귀하다. 분청사기의 독창성과 도자사적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은 1936년 간송이 일본 야마나카상회와의 경매 경쟁에서 거액으로 구입한 조선 후기의 희귀한 백자다. 이 작품은 청화, 철채, 동채의 세 가지 안료를 사용하여 다채로운 색감을 자랑하며, 양각 기법으로 입체감을 더해 조선 백자 중에서도 독특한 사례로 꼽힌다.
병의 형태는 길고 직립한 목과 원형의 몸체로 크고 당당한 비례를 갖췄으며, 국화, 난초, 나비 등의 문양은 각기 다른 안료로 채색되었다. 국화는 동화, 가지와 잎은 철화, 난초는 청화로 장식되었으며, 문양의 배치는 조화와 생동감을 살리며 겸재 정선의 초충도를 연상시킨다.
국화와 난초는 선비의 표상, 나비는 장수를 상징하며, 이는 병의 주인이 사대부였음을 암시한다. 이 작품은 조선 후기 백자의 기술적, 미적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로, 당시 화려한 도자기 제작 경향과 시대정신을 담고 있다.
<백자사옹원인>은 조선 왕실에서 사용하는 도자기를 제작하던 사옹원의 인장이며, 백자로 만들어진 유일한 사례로 역사적 가치가 크다. 이 작품은 정갈한 백토에 푸른빛이 감도는 유약으로 조선 후기 관요의 특징을 보여주며, 전서체로 새겨진 '사옹원인'과 붉은 인주 자국으로 실제 사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인장의 상부는 사자를 형상화한 조각으로, 머리와 갈기, 짧은 주둥이로 위엄과 신성함을 나타낸다. 청화와 동채 안료를 사용해 사자의 눈동자와 입 주변을 각각 푸른색과 붉은색으로 채색하여 생동감을 더했다. 사자의 얼굴과 자세에서 해학미가 엿보이며, 이는 조선 후기 도공들의 뛰어난 기술과 미적 감각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인장은 금속, 돌, 나무로 제작되었으며 크기가 작았지만, <백자사옹원인>은 크고 백자로 제작된 드문 사례로, 당시 도자 예술과 제작 기술의 높은 수준을 증명하며 미술사적 의의가 크다.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은 1403년 조선 최초 금속활자인 개미자로 인쇄된 역사서로, 남송의 학자 여조겸이 북사의 중요 내용을 발췌하고 상세히 기록한 책이다. 총 28권 중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소장한 권4와 권5는 북주와 북위 황제 및 황후, 종실, 신하들의 업적과 생애를 다룬다. 이 책은 구텐베르크 성경보다 30년 앞서 제작되었으며, 조선 초기 금속활자 인쇄술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산이다.
<훈민정음>은 1443년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을 해설한 책으로, 새로운 표음문자 체계와 사용법을 담고 있다. 세종의 서문과 예의(정음편) 및 집현전 학자들의 해례와 서문(정음해례편)으로 구성되며,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된 해례본은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소장하고 있다. 한글의 독창성과 과학적 우수성을 보여주는 이 기록유산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동국정운>은 1447년 세종의 명으로 조선 한자음을 표준화하기 위해 편찬된 최초의 운서로, 중국 성조를 기반으로 조선의 한자음을 훈민정음을 이용해 표기했다.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소장한 권1과 권6에는 한자음 교정 원칙 및 26개 운류가 수록되어 있다. 동국정운은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와 배경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조선 초기 기록문화의 수준을 보여준다.
<금보>는 1572년 거문고 명인 안상이 편찬한 조선 최초의 거문고 악보로, 금합자보라고도 불린다. 거문고와 당비파의 구조, 조율법, 연주법, 주요 악곡의 악보를 담고 있으며, 입문자도 쉽게 익힐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금보는 조선시대 음악사와 임진왜란 이전 왕실 행사 음악을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로, 거문고와 당비파의 전통을 온전히 전한다.
조선 시대 전적류는 학문과 문화의 발전을 위한 중요한 매개체였으며, 금속활자 인쇄술과 악보 제작 등 기록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삼청첩》>은 조선시대 문인화가 탄은 이정(1554-1626)의 그림과 시를 모은 시화첩이다. '삼청'은 매화, 대나무, 난초를 뜻하며, 군자의 덕성을 상징한다. 특히 이정의 대나무 그림은 조선 묵죽화의 기틀을 마련하고 후대에 큰 영향을 주었다. 화첩은 총 49면으로, 이정의 작품 31면과 친구 및 후대 문인들의 글 18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첩의 그림은 검은 비단 위에 금니로 그려 차분하면서도 화려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정은 대상을 세밀하게 묘사하며 강렬한 필선과 섬세한 농담 표현으로 독창성을 발휘했다. 첩에는 한호의 글씨, 최립과 차천로의 서문과 시 등 당대 최고의 문사들의 작품이 담겨 있다.
<삼청첩>은 1594년 임진왜란 이후 이정이 부상에서 회복된 뒤 제작되었으며, 전란과 외세의 침탈을 거치며 수난을 겪었다. 1936년 간송 전형필에 의해 한국으로 돌아왔고, 2015년 복원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는 우리 미술품의 보존과 수난의 역사를 상징한다.
풍죽은 바람에 휘는 대나무를 표현하며, 바람과 맞서는 긴장감을 필선으로 생생하게 묘사했다. 형란은 난초와 가시나무를 함께 그려 군자의 상징성을 강조하며 강한 필선을 사용했다.
노죽은 이슬에 젖은 대나무를 표현하며, 잎과 줄기의 세부적 묘사를 통해 생생함을 부각했다. 통죽은 오래된 대나무의 굵고 바랜 줄기와 힘 있는 마디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며 회화적 기법을 활용했다. 고죽은 잎이 적고 마른 대나무를 섬세하게 묘사하며, 필법과 구성력으로 생기와 기세를 드러냈다.
<산수화조도첩>은 17세기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화가 이징(허주)이 그린 시화첩으로, 산수화 10점과 화조화 8점, 그리고 그림에 대한 제화시가 수록된 예술작품이다. 특히 왕실의 인척과 명문 사족들이 글로 참여해 작품의 품격을 높였으며, 이를 통해 당대 상류층의 예술적 미감과 화평(畵評)을 엿볼 수 있다.
이징은 성종의 고손이자 화가 이경윤의 아들로, 서자 신분이었으나 화원으로서 궁중화 제작을 주도했다. 그의 산수화는 병자호란 이후 어수선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듯 속세를 떠난 문인의 이상향을 표현하며, 조선 초 화풍과 명대 절파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조선 중기의 독특한 필묵법을 보여준다. 화조화는 계절을 상징하는 새와 자연경관을 대칭 구조로 배치하며 조선 중기 화조화의 정형을 갖췄다.
<좌송완수>는 굽은 소나무 아래 선비가 폭포를 감상하는 장면을 그렸다. 조선 초기에 유행한 과장된 산 형태 대신 완만한 산줄기와 안개로 깊이감과 안정감을 표현했다. 차분한 묵색과 푸른빛이 조화를 이루며, 이경석의 제화시는 그림의 정서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
<휴금등대>는 여름의 짙은 녹음과 안개 낀 산수 속 자연을 감상하는 인물을 묘사했다. 변화무쌍한 구름과 계절감을 표현한 필묵법은 이징의 독특한 화법을 잘 보여준다. 이명한의 시는 산과 구름, 물의 조화를 읊어 그림의 품격을 높였다.
<청계추변>은 가을 정취를 담아낸 산수화로, 강변의 누각과 가을을 상징하는 기러기를 통해 온화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흑백 대비와 먹색의 농담은 산과 물의 깊이를 나타내며, 소상팔경도와 같은 전통 산수화 양식을 이어받았다.
<설산심매>는 눈 덮인 산속에서 매화를 찾는 선비의 모습을 그린 겨울 풍경이다. 선염 기법으로 설산의 냉기를 강조하고, 인물 묘사에 섬세함을 더해 이징 가문의 인물화 전통을 보여준다. 이민구의 제시는 여정 속 풍류를 생생히 묘사한다.
<여산초당>은 중국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고사를 배경으로 그렸으나, 조선의 정취와 선비 문화를 담았다. 초가집과 대숲, 연못 등은 구체적으로 묘사되었으며, 진경산수화적 화법이 더해져 실재감을 준다.
<청풍계>는 병자호란 때 순국한 김상용의 별장인 청풍계를 그린 작품이다. 육중한 바위와 오래된 나무, 건물이 화면을 꽉 채워 고즈넉한 유적지의 느낌을 준다. 정선에게 개인적 의미가 깊었던 장소로, 그의 필법이 대담하게 구현된 작품이다.
<풍악내산총람>은 가을 금강산의 풍경을 전경 형식으로 표현했다. 다양한 채색과 세밀한 묘사로 계절감을 전달하며, 사찰과 명소를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정선의 진경산수화 기법이 완숙한 경지에 이른 대표작이다.
<경교명승첩>은 정선이 그린 한강과 한양 근교의 진경산수화와 고사인물화 33점을 엮은 화첩이다. 정선과 친구 이병연의 교류를 통해 제작된 이 화첩은 진경산수화의 표현력을 확장하며, 당대 문학과 그림의 결합을 보여준다.
<해악전신첩>은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이 72세에 제작한 화첩으로, 금강산과 강원도 동해안 일대의 명승지를 담은 21폭의 그림과 41편의 시문이 총 76면에 실려 있다. 화첩은 금강산 입구의 삼부인과 피금정을 시작으로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의 주요 명소를 망라하며, 조선 후기 회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정선은 30대 후반 금강산을 여행하며 친구 이병연과 함께 첫 번째 <해악전신첩>을 제작했으나, 이 화첩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1747년, 정선은 출세작인 이 화첩을 다시 제작하였다. 이번 화첩에서는 이병연이 직접 쓴 시와, 스승 김창흡의 시를 대신 쓴 강원감사 홍봉조의 글씨가 더해졌다. 정선은 젊은 시절의 작품을 성숙한 화풍으로 다시 그렸으며, 특히 적절한 생략과 함축적인 구성으로 금강산의 진면목을 탁월하게 표현했다.
이 화첩은 한때 송병준의 집안에 소장되었으나 아궁이에 버려질 위기에서 장형수라는 골동상에 의해 구출되었고, 이후 전형필이 높은 가격에 사들여 현재 간송미술문화재단에 소장되어 전해진다. <해악전신첩>은 정선의 30대 작품과 70대 작품의 변화를 비교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그의 화풍의 발전과 조선 회화사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큰 가치를 지닌다.
<촉잔도권>은 조선 후기 화가 심사정(1707-1769)이 말년에 그린 대작으로, 길이 818cm에 이르는 화폭에 촉산의 장대한 경관을 담은 작품이다. 이백의 시 「촉도난」에서 영감을 받은 이 그림은 고난과 인생의 여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며, 끊어진 길과 벼랑 끝 나무다리인 잔도를 통해 여정의 위험과 위대함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여정은 암산과 협곡을 지나 화면의 마지막에 도회지 풍경으로 끝난다.
심사정은 이 작품에서 다양한 준법과 청록·주황의 담채를 활용해 험난하면서도 아름다운 촉산의 절경을 표현했다. 비록 촉산을 실제로 방문하지 않았지만, 그는 화보를 참고해 마음속에서 재구성하며 문인화적 이상을 구현했다. 이 작품은 1768년 심사정의 7촌 조카 심유진(1723-1787)과 심이진(1723-1768) 형제의 요청으로 제작되었다. 당시 과거 준비로 고배를 마시던 심유진의 상황과 벼슬길의 험난함이 촉도에 비유되었고, 그림 속 풍요로운 도시는 주문자에 대한 축원의 의미를 담고 있다. 심유진은 이후 1773년 관직에 올라 문신으로 활약했다.
이 작품은 수장 과정에서도 기묘한 운명을 겪었다. 제작된 1768년 이후 심유진 집안에 보관되다가 1778년에 외가로 넘어가 행방불명이 되었고, 1798년에 다시 발견되었다. 흥미롭게도 이 사건들이 모두 ‘무자년’에 발생해 주목을 받았다. 이후 1948년 오세창이 기록을 남겼고, 간송 전형필이 이를 구입해 복원·보존하며 현재까지 전해진다.
<고사인물도>는 조선 후기 화가 김홍도가 그린 작품으로, 역사 속 인물의 교훈적 일화를 주제로 한 고사인물화 중에서도 18세기 문인화풍을 대표한다. 이 작품은 조선 선비들이 본받고자 했던 후한대 현자 엄광, 서예의 성인 왕희지, 국화를 사랑한 도연명, 송대 시인 임포, 성리학의 대가 주희 등의 인물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김홍도는 이 작품을 병풍 형식으로 제작해 여러 폭에 다양한 인물과 산수 풍경을 담았다. 병풍의 수직적 구성은 그림의 공간감을 확장시키며, 여유로운 필선과 시원한 여백은 김홍도의 말년 화풍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구성은 그림의 품격을 높이고 감상하는 재미를 더했다.
고사인물도는 국왕이 감상하는 궁중화부터 민화까지 다양한 계층에서 애호되었으며, 세화, 장식 병풍, 감상화 등으로 널리 활용되었다. 특히 김홍도의 《고사인물도》는 '일반인을 그린 풍속화'와 '성인을 그린 감계화' 사이의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며, 이상적 삶을 꿈꾸게 하는 작품으로 생활공간 가까이에서 즐겨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홍도의 <과로도기>는 신선도와 도석인물화를 잘 그린 김홍도의 명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림 속에는 흰 나귀를 타고 다니며 장생의 비결을 탐구하던 당대의 인물 장과가 등장한다.
장과는 서책을 들고 어느 구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의 얼굴은 섬세하게 묘사되었지만, 큰 붓으로 속도감 있게 표현된 옷자락은 생동감을 더해준다. 나귀는 머리에 자신이 들어가야 할 호리병을 이고 있으며, 녹색과 적색의 대조를 활용한 세밀한 묘사는 김홍도의 공들인 작업을 잘 보여준다. 특히, 김홍도의 장과는 중국의 도석인물화에서 흔히 보이는 비인격적이고 기괴한 표현과 달리, 친근하고 정감 있는 풍속화적 특징을 띤다. 이는 김홍도 작품의 독창성을 돋보이게 한다.
이 작품은 복과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제작되었으며, 왼쪽에 강세황과 정안복의 화평이 남아 있어 동시대 화가들의 평가와 감상을 엿볼 수 있다. 19세기까지 이러한 도석인물화는 널리 유행하였다.
김홍도의 <마상청앵>은 풍속화와 문인화의 미학을 절묘하게 결합한 걸작으로, 그의 말년 최고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림은 나귀를 탄 선비가 길을 가다 고개를 들어 버드나무 가지에 앉은 노란 꾀꼬리 한 쌍을 바라보는 장면을 담았다. 꾀꼬리는 봄철 아름다운 노래로 알려진 새로, 상단의 시에서는 꾀꼬리의 노랫소리를 베틀의 북처럼 표현하며 봄비로 베를 짜는 듯한 생동감을 그렸다.
넓은 여백과 부분적으로 가해진 청록색은 들뜬 봄의 분위기를 살리며, 복잡한 요소를 배제하고 인물의 표정과 정서에 집중했다. 이는 문인화의 함축미와 시적 정취, 풍속화의 생동감을 모두 담아낸 특징이다.
그림의 상단에는 김홍도의 동료 화원 이인문이 지은 시와, 김홍도가 직접 쓴 행서 글씨가 있다. 김홍도의 글씨는 "여린 풀에 작은 새가 앉아 있는 듯하다"고 평가될 만큼 그림과 조화롭게 어우러져,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김득신의 <긍재전신첩>은 조선 후기 풍속화의 대표작으로, 화첩 안에 풍속도 8점이 수록되어 있다.
작품에는 고양이의 소동을 담은 〈야묘도〉, 비밀스러운 만남을 그린 〈밀회〉, 농촌에서 짚신을 삼는 장면의 〈성하직구〉, 낮잠 자는 목동을 묘사한 〈목동오수〉, 어부의 고기잡이를 그린 〈주중가효〉, 승려들이 장기를 두는 〈송하기〉, 강변에서의 회식 장면을 담은 〈강상회음〉, 대장간 풍경을 그린 〈야장단련〉 등이 포함되어 있다.
김득신은 기존의 풍속화 주제를 새롭게 해석하며 순간적인 동작과 정서를 세밀히 표현했고, 여기에 해학적 분위기를 더해 자신만의 개성을 확립했다. 이는 김홍도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자적인 역량을 발휘한 것으로 평가된다.
화첩은 암록색 비단 포갑으로 보관되며, 1935년 오세창이 금박 종이에 <긍재필풍속화첩>이라는 제목을 쓰고 자신의 인장을 찍어 소장했다. 화첩의 왼쪽 면에는 그림이, 오른쪽 면에는 공백이 배치되었으며, 마지막에는 김득신의 화격에 대한 오세창의 평가 글이 첨부되어 있다.
혜원 신윤복은 조선 후기 풍속화의 절정기를 이끈 화가로, 도시의 풍류와 인간 본성을 생생하게 담아낸 독창적인 작품들로 기억된다.
<혜원전신첩>은 그의 대표작으로 총 30폭의 풍속화를 담고 있다. 이 중 11폭에는 그림에 어울리는 짧은 시구가 첨부되어 있다. 작품은 한량들의 주막 풍경, 남녀 간의 밀회, 여인의 일상 등 당대 한양의 도시풍경과 사회상을 섬세하게 묘사했다. 인물의 표정, 동작, 화려한 복식, 사건의 상호작용을 통해 연극의 한 장면 같은 생동감을 자아내며, 공간 운영과 채색 기법에서도 독창성과 절제된 예술성을 드러낸다.
신윤복의 풍속화는 단순히 시대를 기록한 것을 넘어 중인층에 대한 애정,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 양반사회의 부조리 비판 등 자전적 경험을 반영한 점에서 독특하다. 김홍도가 농민과 생산 활동을 주제로 삼았다면, 신윤복은 도시인의 삶과 애정 문제, 풍류를 다루며 사회 풍자를 담은 비평적 사실주의를 구현했다.
<혜원전신첩>은 1930년대 일본에서 간송 전형필에 의해 구입되어 국내로 돌아왔고, 간송이 새로 틀을 짜고 오세창이 발문을 남기며 보존되었다. 당시 이 화첩은 대중적으로도 큰 사랑을 받아, 축소본이 제작되어 담뱃갑에 담길 정도로 널리 감상되었다. 이는 오늘날에도 신윤복의 풍속화가 간송미술관의 대표적 소장품으로 남아 있는 이유를 보여준다.
혜원 신윤복은 조선 후기 인물화, 특히 여인 묘사에 뛰어난 기량을 보여준 화가로, 그의 대표작 <미인도>는 조선시대 인물화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은 배경 없이 단독으로 서 있는 단아한 여인을 그린 것으로, 섬세한 초상화적 기법과 은은한 채색이 돋보인다. 갸름한 얼굴, 그윽한 눈매, 피부색에 가까운 부드러운 채색은 화가의 공을 엿보게 한다. 여인은 조선 후기 세련된 여성 복식인 삼회장저고리와 풍성한 붉은 치마를 입고, 손에는 마노노리개를 들고 있다. 그녀의 자연스러운 동작과 살짝 들린 버선코는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도 생동감을 더한다.
<미인도>는 초상화적 사실성과 조선 여인의 전통적 아름다움을 조화롭게 담아내며, 중국 화보풍의 인물화와 구별되는 독창성을 지닌다. 특히 신윤복 이전에는 여인의 전신상이 남아 있는 사례가 없으며, 이후 19세기에 이러한 형식의 여인 초상이 제작되기 시작해 미인도 형식의 선구적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작품은 단순한 외형 묘사를 넘어 내면의 정서를 표현하며, 조선시대 여인의 아름다움과 생동감을 이상적으로 구현했다. 이는 신윤복의 세련된 화풍과 인간미를 담아내는 능력을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이후 문인들에 의해 소장되며 은밀히 완상되었다.
추사 김정희는 70여 년의 생애 동안 묵란화를 가장 많이 남겼으며, 이는 그의 예술적 지향과 인물적 덕목을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매체로서 중요시되었다. 그의 묵란화 세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난맹첩>은 상·하 2권으로 구성되어 16폭의 묵란화와 7편의 제발문이 포함된 총 23면의 화첩이다.
<난맹첩>의 제목 ‘난맹’은 ‘난초를 그리는 방법’을 상징하며, 김정희가 묵란화를 통해 추구했던 서예적 법식과 난 그림의 이상을 담고 있다. 특히, 붓을 세 번 굴려 난 잎의 굵기를 조절하는 삼전법, 점과 삐침으로 단순하게 꽃을 표현한 기법은 그의 서예적 감각이 녹아든 독창적 표현 방식이다. 또한, 김정희의 뛰어난 구도 감각은 묵란화뿐 아니라 제사, 인장, 그리고 서예 작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균형 잡힌 구성과 파격적인 화면을 자유자재로 활용해 그의 예술적 정수를 보여준다.
<난맹첩>의 제작 시기는 1830년대로 추정되며, 김정희가 40대 후반이었던 시기로 보인다. 그러나 1837년 부친의 별세와 이어진 제주 유배 이후 묵란화를 거의 그리지 않게 되었고, 이는 그의 예술 활동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맹첩>은 김정희의 독자적인 화풍을 정립하고 묵란화의 기준을 세운 작품으로, 제자들과 후대 화가들에게 묵란화의 교본으로 자리 잡으며 19세기 새로운 묵란화풍 형성의 기반이 되었다. 이광사의 <서결>(1764년 집필, 1766년 완성)은 서예 이론서로, 조선 서예의 고법 회귀를 주장한 중요한 작품이다. 그는 중국 당송 이후의 서예를 참고하지 말고 전서와 예서를 모든 서체와 필법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하며, 동진 시대 왕희지의 서풍을 진품을 통해 배우기를 강조했다. 특히, 조선 서예가들의 붓 사용법에서 먹색이 고르지 않은 문제를 지적하며 이를 바로잡으려 했다.
이광사는 왕희지의 서풍을 부활시키고자 했던 서예가로, 스승 윤순과 그 계보인 이서로부터 전통 서체를 계승했다. 그는 당대 성행했던 명나라 서풍과 화려한 촉체에서 벗어나 고법에 기초한 서풍을 조선 서단에 정착시키고자 노력했다.
<서결>에서는 전서·예서 필법과 왕희지의 서풍을 기초로 한 다양한 특징이 나타난다. 그의 글씨는 구불거리는 획, 비석 서체를 본뜬 방식, 가로가 긴 형태의 해서, 오른쪽 아래로 길게 뻗은 획 등에서 왕희지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비록 당시 서예 연구의 한계로 완전한 이론 정립은 이루지 못했으나, <서결>은 위작 논란을 제기하며 비석 글씨의 활용을 권장한 선구적 저작으로 평가받는다. 이는 조선 서단에서 서예 학습의 기준과 방향을 제시한 중요한 자료로 남아 있다.
<서원교필결>은 김정희가 이광사의 서예 이론서 <서결>을 분석하고 비판한 글로, 1840년대 제주도 유배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정희는 고증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기록, 사상, 서예 등의 작품을 역사적으로 검증한 인물이다. 그는 이광사가 익힌 동진 왕희지의 글씨 다수를 위작으로 판단했으며, 이광사가 전서와 예서를 배우기 위해 선택한 비석 또한 한나라 이전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다.
김정희는 구양순의 비석 글씨를 출발점으로 삼아 왕희지의 서풍으로 나아가는 방식을 선호했다. 이는 당나라 이후의 글씨는 배우지 말라고 한 이광사의 주장과 상반된다. 또한, 그는 조선 서예가들이 붓을 뉘어 쓴다는 이광사의 주장에 반대하며, 먹색의 차이는 필법이 아닌 묵법에 따른 현상이라고 반박했다.
1820년대 중반부터 김정희는 기존 서풍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를 모색했으며, 정자체(해서)에서는 구양순 글씨체를 기반으로 자신만의 서풍을 발전시켰다. <서원교필결>에 나타난 그의 해서체는 날카로운 필획과 살이 빠진 듯한 형태로, 초기 추사체의 특징을 보여준다.
비록 김정희가 이광사의 논리를 날카롭게 비판했지만, 이광사가 활동한 시기의 고증학과 금석학 연구 수준이 깊지 않았던 시대적 한계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아쉬움도 남아 있다.
<침계>는 김정희가 문인 윤정현(1793-1874)의 호를 쓴 작품으로, 두 글자가 화면을 꽉 채우는 큰 글씨이다. 왼쪽에는 이 글씨를 쓰게 된 경위가 적혀 있다. 김정희와 윤정현은 정치적으로 같은 계파에 속했으며, 김정희가 함경도 북청에 유배된 시기(1851년)에 윤정현은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해 그를 돌보며 교류했다. 두 사람은 황초령의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함께 연구하기도 했다.
김정희는 약속한 지 30년 만에 글씨를 써주었으며, 처음에는 오래된 비석의 예서체로 쓰려 했으나, ‘침(枕)’ 자에 적합한 예서 글씨를 찾지 못해 고민했다. 결국, 예서와 해서가 혼합된 옛 사례를 참조하여 ‘침’ 자는 해서로, ‘계(溪)’ 자는 예서로 썼다. 특히 ‘계’ 자의 가로획을 일직선으로 처리한 방식은 중국 한나라 비석에서 주로 나타나는 예서 특징이다.
이 작품은 예서와 해서의 조화를 통해 김정희의 창의적 필법과 60대 후반의 성숙한 서예 경지를 잘 보여준다. 그의 굵고 강인한 필획은 고풍스러운 매력을 더하며, 윤정현과의 깊은 교분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차호호공>은 김정희가 이근수(1824-1860)를 위해 쓴 글씨로, 두 사람의 관계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근수가 김정희의 제자인 강위(1820-1884)와 교류가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두 사람도 인연이 깊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작품은 같은 크기의 종이에 나란히 쓴 글씨로, 획이 가늘고 글자 모양이 다소 불규칙하다. 김정희는 이 글씨를 촉예법으로 썼다고 빈 공간에 적어 놓았다. 촉예법은 한나라 때 촉 지방(현재의 사천, 섬서성 한중 등)에서 유행한 예서를 가리킨다. 촉예는 전서의 영향을 받아 가는 필획이 특징이며, 김정희는 이러한 서체를 좋아했다.
그는 촉예의 네모난 구성법에 얽매이지 않고 가로획과 대각선 획을 길게 빼거나 전서와 초기 예서의 요소를 결합해 독창성을 발휘했다. 이는 고전적 서체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완성해 나가던 김정희의 70세 무렵 서예 경지를 보여준다.
<대팽고회>는 1856년, 김정희가 유치욱에게 주기 위해 쓴 글씨로, 이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의 작품이다. 유치욱은 김정희의 제자 강위와 친분이 있는 인물로, 이 작품은 금박이 뿌려진 고급 냉금지에 쓰였다. 그러나 고급스러운 재료와 달리 글씨는 힘차고 거친 필치와 파격적인 형태가 돋보인다.
김정희는 이 작품에서 초기 예서인 고예와 후기 예서인 팔분서를 혼용했으며, 전서의 요소도 가미했다. 곧은 가로획과 리듬감 있는 운필이 특징적으로,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글씨의 획들은 마치 늙은 소나무 가지와 같아 기교와 이론을 넘어서 자연스럽고 소박한 경지에 이른 듯하다.
글씨의 내용은 일상의 평범함 속에서 행복을 찾는 삶의 태도를 담고 있다. 두부와 오이 같은 흔한 반찬이 최고의 음식이며, 가족과 함께 모이는 자리가 최고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두 번의 유배를 겪으며 부귀영화를 초월한 김정희가 터득한 삶의 진리가 담긴 글이다.
<괴산 외사리 승탑>은 충청북도 괴산군 외사리 사지에 있던 고려 시대 승탑으로, 승려의 사리를 봉안한 석조미술이다. 승탑은 통일신라 말기부터 만들어졌으며, 고려 중기의 팔각당형 승탑 양식을 잘 보여준다.
1930년대 일본으로 반출될 뻔했으나, 간송 전형필이 이를 구입해 간송미술관으로 옮겼다. 한국전쟁 당시 부재가 흩어졌으나, 1964년 복원되었다.
탑비와 탑지를 통해 주인을 추정할 수 있는데, 비석 조각에 "중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왔다"는 문구가 남아 있어 불교를 깊이 연구한 승려의 승탑임을 알 수 있다.
<문경 오층석탑>은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에 있던 고려 시대 석탑으로,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반출될 위기를 간송 전형필이 막아 현재 위치에 보존 중이다.
이중 기단 위에 5층 탑신이 올려져 있으며, 기단에 돋을새김된 꽃무늬와 탑신부의 구조가 특징적이다. 다만, 5층 옥개는 다른 부재가 섞인 것으로 보이며, 상륜부는 대부분 소실되었다.
탑의 형태와 장식 기법은 같은 경북 지역의 예천 개심사지 오층석탑(1010년 제작)과 칠곡 정도사지 오층석탑(1031년 제작)과 유사하다. 이로 보아 11세기 경북 지역 주민들의 발원과 탑 조성 전통을 반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탑의 건립 배경과 제작자는 알려지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다.
전시 작품 중에서 불상 전시가 가장 깊은 감동을 주었다. 석가여래좌상과 같은 작품은 그 고요하고 엄숙한 표정에서 불교의 자비와 평화를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조각된 손의 섬세한 표현과 옷 주름의 생동감은 신앙적 경건함과 예술적 기술의 완벽한 조화를 보여주었다.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을 거쳐 발전한 불상 양식의 변화를 통해 시대적 배경과 신앙의 변화까지 느낄 수 있었다.
고려청자의 비색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경건함과 정제된 품격을 느끼게 했다. <청자 음각환문병>의 고요하고 은은한 색감과 세련된 형태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변치 않는 미의 기준을 보여주는 듯했다.
특히 <청자상감국모란당초문모자합>과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의 상감 기법은 정교함과 화려함이 조화를 이루어 마치 예술과 철학이 만나는 순간을 형상화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 운학문 매병의 구름과 학의 배치는 단순히 장식적 역할을 넘어,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도교적 의미를 담고 있어 감탄을 자아냈다.
분청사기의 작품들은 소박하면서도 생동감 있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분청사기박지철채연화문병>과 같은 작품은 백토와 산화철의 대조적인 색채를 통해 단순한 미감을 넘어선 서정적 아름다움을 표현했으며, 일상과 예술이 가까이 닿아 있음을 느끼게 했다. 이는 당시 민중의 삶과 정서가 도자기에 어떻게 스며들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조선 후기의 백자는 그 단아함과 정갈함이 특히 인상 깊었다.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은 여러 색채가 어우러져 화려하면서도 고풍스러운 조화를 이루며, 당시 조선 사회의 심미적 가치를 담고 있었다. 또한, 백자 사옹원인은 조선 왕실의 권위와 도자기 제작 기술의 정수를 잘 보여주는 유물로, 단순히 도구 이상의 역사적 가치를 느낄 수 있었다.
전적류 코너에서는 조상들의 지혜와 학문적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직지심체요절>과 같은 귀중한 자료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서 우리의 인쇄기술이 얼마나 앞서 있었는지를 보여줬다. 한 장 한 장 정성스럽게 기록된 글씨와 세밀한 삽화는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기록을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한 노력의 흔적이었다.
회화 작품들은 당시 사람들의 삶과 자연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줬다. 정선의 <금강산도>와 같은 작품은 단순한 풍경 묘사를 넘어 자연의 거대함과 인간의 겸손함을 느끼게 했다. 여백의 미를 활용한 조선 시대 회화는 단순함 속에서 깊은 철학적 메시지를 전달하며, 서양 회화와는 다른 동양적 미학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불상, 도자, 전적류, 회화, 서예, 석조 등 다양한 한국 전통 유물을 통해 우리 조상의 삶과 정신세계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였다. 각각의 작품이 가진 독창성과 정교함은 예술적 감동을 넘어 우리 역사와 문화의 뿌리를 느끼게 해주었다.
이번 전시는 각 작품이 담고 있는 시대적 맥락과 예술적 가치를 깊이 탐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도자기와 불상이 단순히 장식품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철학, 종교, 그리고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문화적 상징임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한국 미술과 문화의 정수를 한껏 느낄 수 있었던 이번 관람은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과 함께, 우리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알리는 일의 중요성을 새삼 생각해보게 한 소중한 경험이었다.
일생을 개인의 부와 안위를 넘어 민족문화의 보존과 계승이라는 대의에 헌신한 인물 간송 전형필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며, 다음 기획전을 기대해 본다.
참고자료: 대구간송미술관. 간송미술문화재단. <여세동보> 대구간송미술관 개관 기념 국보·보물전.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