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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은세 Sep 06. 2023

편지

어린 너는 보아라.

남들보다 많이 가질수록 고개를 숙이며

가장 가난하고 비참한 순간 누구보다 당당하여라.

한 번에 할 수 있는 일은 때로는 여러 번에 걸쳐해야 하며

결핍과 상실은 감출수록 드러나는 법이지만 모두 내보이고 다닐 필요는 없다.

바라건대, 존재에 집착하지 말아라.

그저 몸과 마음을 열고 너를 스쳐가는 든 순간을 감각하고 함께 호흡하여라.

언젠가 부재(不在) 또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과일은 썩고 새빨갛게 물든 꽃은 시들 것이다.

그러나 시고 떫고 달콤했던 과 향을 잊어버리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고통.

온몸을 부수고 가시덤불로 찌르는 생생한 감각은

너의 눈을 멀게 하고 혀를 마비시키겠지만

너를 단단하고 날카롭게 만들어줄 것이다.

그러니, 너무 미워하지 말아라.

너 또한 누군가에게 엉겅퀴 꽃이고 쓰디쓴 씀바귀고 손에 박힌 가시였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라.

네가 길에서 찾는 것이 일신의 안녕이라면 네 시와 노래는 초라해질 것이다.

부디 멈추지 말아 다오.

그날이 오면 네가 마음 애태워 간절히 찾던 것이 이것이었노라, 네게 긴긴 편지를 써서 말해주겠다.

고맙고 미안하다.

긴긴밤 평안하여라.


고은세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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