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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글렛 Apr 28. 2023

미소녀들이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에버소울'을 통해서 본 이세계•하렘•서브컬쳐 장르

요근래 가장 열심히 하는 게임은 ‘에버소울’이다. 중세 판타지와 SF가 섞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모바일 RPG다. 게임성은 미소녀 수집형 롤플레잉을 기반으로 한다, 주인공을 제외하면 전부 다 미소녀 캐릭터다. ‘이세계로 소환된 주인공과 미소녀 정령들의 사랑과 교감’이 게임이 내세우는 테마다. 이른바 ‘이세계 하렘물’. 최근 몇 년간 쏟아져 나온 <만화/애니/라이트 노벨>과 비슷한 설정이다.


‘이세계’는 지금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가 아닌 ‘완전히 다른 세계’로, 일본 창작물에서 넘어온 세계관이다. 현실과는 다른 차원의 세계라는 측면에서, 마블·DC에서 볼 수 있는 ‘멀티버스’의 개념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애니와 게임의 바탕이 되는 ‘이세계’는 대부분 판타지 배경으로, 엘프, 오크, 드래곤 등 이종족이 흔하게 등장한다.


이세계물의 유행은 아마도 사회의 단절이 그 원인인 것 같다. 이미 오래전부터 세대갈등, 젠더갈등, 경기침체가 전 세계적으로 대두됐고, 일본은 자살과 괴롭힘, 남녀불평등이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교감을 나눌만한 환경이 줄어드는 찰나, 코로나19가 터져 불가항력적으로 거리를 두며 인간 사이의 단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이세계의 배경이 판타지적 세계관인 이유도, 현실에서 가장 먼 세계여야 비로소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는 소망이 발현된 것이라 생각된다. 비현실적인 정반대의 세계 속에선 현실에서 느낀 고통을 완전히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애니 '이세계 유유자적 농가'

2010년대 들어 비슷한 설정의 작품이 급증한 탓에, 지나치다는 식의 질타를 받기도 했다. 작품 대부분이 전개가 비슷하고, 클리셰와 자극적인 소재가 넘쳐서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다. 낯선 세계에 떨어졌는데도 너무나 완벽하게 적응하는 주인공이 비현실적이라는 지적도 있다(현실에서 이세계로 간다면, 꿈과 희망이 아닌 조난과 위험에 처한다). 때문에 인기가 식기도 했지만, 여전히 다양한 이세계물이 출시되고 있다.


‘하렘물’은 무엇일까. 보통 여러 명의 여성 히로인이 남성 주인공 한 명의 사랑을 쟁취하고자 경쟁하는 설정의 장르를 말한다(주인공이 여자인 경우 ‘역하렘’). 투쟁적 의미의 경쟁보단 거의 공존에 가깝다. 그야말로 남자의(역하렘은 여자) 로망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설정이다. 그래서인지 통했다. 다수의 취향저격에 성공하며 다양한 시리즈가 나왔다.

하렘물 대표작 '5등분의 신부'. ‘하렘’은 본래 아랍어로 ‘금지된 것’을 의미한다. 이슬람권에서 외부인이 들어갈 수 없는 여인의 구역을 ‘하람륵(haramlık)’이라 불렀는데, 이를 유럽인들이 일부다처제로 잘못 해석하며 지금의 ‘하렘’의 의미로 변질됐다.

설정이 그렇다보니 선정적인 장면도 꽤 자주 나온다. 일부 여론에서 지나친 성적대상화라며 불쾌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시청자 취향이 확실히 분류되는 편이라, 이쪽 세계에선 그런 사회적 비판이 무의미했다.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소망(나를 둘러싼 이성들의 각축장)을 대리만족할 수 있다는 데서 높은 선호도를 자랑한다.


요즘은 극장에서 로맨스 작품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최근 개봉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대부분이 추리, 범죄, SF, 히어로 장르에 국한된다. 정통 로맨스를 보기 힘들어진 이유는, 경기악화로 인해 개인의 삶이 위태로워진 것이 그 원인이다. 먹고 살기가 힘들어지니 연애는 사치가 되고, 로맨스의 주요 관객인 커플의 수가 줄어드니 수요도 감소했다. 제작사 입장에선 수익성이 떨어져서 고려하기 힘든 장르가 됐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의 욕구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세계·하렘·미소녀물>이 그 대체제 중 일부로 등장했다고 보는 것이 꽤 설득력 있다.

전 세계 모바일 게임 매출 순위에 올라있는 서브컬쳐 게임들. (원신-페이트 그랜드 오더-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

앞서 설명한 장르들을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 바로 ‘서브컬쳐(Subculture)’다. 서브컬쳐는 우리나라에선 하위문화로 번역된다. 대중적이지 않은, 오타쿠들의 전유물(비주류 문화)로서 인식되고 있다. 미소년·미소녀가 등장하는 일본 <만화/애니/라이트 노벨>을 뭉뚱그려 흔히 '오타쿠 문화'라고 말하는데, 규모는 크지만 대중적이라 하기엔 애매한 부분이 있어서 주류 문화와 구분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서브컬쳐는 이제, 적어도 게임업계에선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대형 콘텐츠가 됐다. 모바일 서브컬쳐 게임인 원신, 우마무스메, 페이트 등이 전 세계적으로 구가하는 인기와 매출을 보면 그렇다.


지난 1월 출시한 ‘에버소울’은 이미 세간에 많이 나와 있는 애니와 서브컬쳐 장르 게임들의 설정을 그대로 차용한 게임이다. 캐릭터와 서사만 다를 뿐, 게임성과 배경은 복붙(Ctrl c+v)이나 다름없어서 에버소울만의 특별함을 찾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매출과 이용자수에서 꽤나 선방하고 있다. 익숙한 것들이 한 데 뭉쳐있고, 그 조합을 어렵지 않게 풀어내어 접근성이 용이하다. 이런 종류의 게임을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게임이 어려워서, 설정이 이해가 안 돼서 막히는 구간은 없을 것이다.

특별하진 않지만 괜찮은 평작. 풀더빙 된 스토리 대사, 미연시 요소 추가, AFK(방치형)류에 충실한 게임성 등 호평도 있지만, 다른 게임에서도 본 듯한 시스템이 즐비하고, 매력 없는 캐릭터와 메인 스토리, 후반부로 갈수록 조여 오는 과금의 압박 등이 단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미소녀들을 모으는 재미로 몇 주간을 열심히 플레이했다. 그런데 왜 하필 미소녀일까? 서브컬쳐의 핵심은 미소녀다. 예쁘고 아름다운 어린(중고등학생 뻘) 소녀를 뜻한다. 애니와 게임에서는 통상 귀여움이 한껏 부각된 이미지로 묘사된다. 큰 눈, 빛나는 눈동자, 다채로운 머리색, 애교 섞인 콧소리, 매끈한 피부와 날씬한 몸매 등(가슴 크기가 강조되는 경우가 많다) 각별한 캐릭터 성을 지니고 있다.


서브컬쳐가 묘사하는 것들의 외모가 이렇다보니, 대중에선 극심한 호불호가 나타난다. 비현실 그 자체기 때문에 민감한 현실주의자라면 혐오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도 그리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확고한 마니아층이 존재하며, 그 마니아들의 영향력과 신규유입이 날이 갈수록 거대화되고 있다.


얼마 전, 나도 이 미소녀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늦은 나이지만 오타쿠가 되어 보겠다는 발칙한 생각을 하게 됐고, 행동으로 옮기는 중이다. 연초에 도쿄로 여행을 가서 아키하바라를 샅샅이 훑고 왔다. 이번 달엔 국내 오타쿠의 성지인 홍대 애니메이트에 들렀다.

오타쿠의 천국 도쿄 아키하바라

오타쿠의 대외적인 이미지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한때 ‘오타쿠는 딱 봐도 안다’고 할 만큼 이미지의 전형이 있었다(굳이 묘사하진 않겠다). 최근 목격한 오타쿠들은 오히려 힙하고 자유분방한 모습에 가까웠다. 그나마 튀는 경우가 그렇고, 대부분 평범한 복장과 외모였다. 특히 여성 오타쿠의 숫자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계산대 위에 올려놓은 상품 하나하나의 가격이 무시 못 할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당당하게 지갑을 열었다. 경제력을 확보한 오타쿠들의 취향 발현이 오타쿠 문화를 하나의 거대한 산업으로서 부흥하게 한 듯하다. 돈이 모이는 곳에 기업이 발을 들이지 않을 리가 없으니, 서브컬쳐가 이토록 활성화된 현상이 이해가 된다.


내친김에 피규어를 몇 개 구입했다. 몇 번 사다보니 왜 사는지 알겠더라. 내가 감명 깊게 본 작품, 즐겁게 플레이 한 게임의 캐릭터를 실물로 소장하고 싶은 욕구를 자극했다.


수집형 RPG인 에버소울은 그 소장욕구를 정확하게 겨냥한다. 언제나 클릭 한 번이면 불러올 수 있는 세계 속에, 내가 애정하는 캐릭터를 항상 넣어둘 수 있으니 말이다. 애지중지하는 캐릭터들이 나 대신 열심히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자랑스럽고 대견하기까지 하다.


무과금으로 한 번 해보려고 했으나, 수집욕에 잠식되는 바람에 몇 번 결제를 하게 됐다. 문득 하렘물이 떠올랐다. 여성 히로인들에 둘러싸인 주인공처럼, 게임사의 치밀한 전략에 둘러싸인 듯한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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