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주제로 글을 쓰다 보니, 글을 쓰거나 직접 게임을 플레이하지 않을 때는 게임에 관련된 작품과 책을 찾아보고 있다. 아쉽게도 그 수가 많지 않다. 게임 원작 영화는 제법 있는 편인데 대부분 실패했고, 게임판타지 기반(세계관) 성향의 애니메이션은 많은데 반해, 게임 자체(배경·산업)를 소재로 한 작품은 드물다. 한국어로 번역된 게임 소재 서적도 책장 한 칸을 다 채우지 못할 정도로 부실한 편이다.
그래서인지 게임 소재 작품이 나오면 평가는 뒤로하고 일단은 반갑고 고맙다. 특정 게임 마니아 보단 ‘게임’ 자체를 사랑하는 게이머다 보니, 게임의 역사·업계 이슈·개발 배경 등 게임과 얽힌 인간사를 탐구한 작품이 좋다. 개인적으로는 게임을 인문학적으로 풀어낸 도서 <게임, 게이머, 플레이(이상우 작가)>, ‘테트리스’의 개발 비화와 저작권 문제를 다룬 영화 <테트리스(애플TV)>, 90년대 일본의 아케이드 게임 산업을 배경으로 한 <하이스코어 걸(넷플릭스)>이 가장 인상적이게 본 작품들이다.
제목은 게이머즈지만, 게이머와 연관성은 거의 없다. 출연하는 게임도 길티기어, 페르소나4를 제외하면 단순히 이름만 언급되는 수준
이번에 소개할 애니메이션 ‘게이머즈!(아오이 세키나/라이트 노벨 원작)’는 게임을 소재로 한 러브코미디물이다. 게임광이자 골수 오타쿠인 ‘아마노 케이타’가 학교 최고의 미소녀 아이돌 ‘텐도 카렌’으로부터 게임부 입단 제안을 받으며 이야기가 펼쳐진다. 개그 성향이 강하고, 일본 애니 특유의 클리셰가 짙은 편이라 호불호가 갈린다. 개인적으로도 추천하긴 힘든 작품이다. 총 다섯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서로간의 오해와 억측이 난무하고 공감하기 힘든 감정선이 표출된다. 무엇보다 게임을 다루는 분량이 현저히 적고, 주로 인물간의 러브 라인이 주된 전개라는 점에서 실망했다.
그럼에도 게이머즈!(이하 게이머즈)는 나름의 컨셉을 유지하고자 게이머를 향해 몇 가지 의미있는 질문을 던진다. 그 시발점이 되는 질문은 ‘당신이 게임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이다.
<스포일러 주의>
작중에서 게임부원들은 위의 질문에 기상천외한 답변을 늘어놓는다(어릴 적 용병인 아버지에게서 엄격한 훈련을 받고 FPS 실력을 향상하게 됐다던가, 기억상실증에 걸렸던 당시 하고 있던 게임이 퍼즐 게임이어서...라는 식). 그런데 주인공 아마노의 대답은 의외로 심플하다. 그냥 어쩌다가 게임을 좋아하게 됐다는 것.
심플 이즈 베스트(Simple is best)라고 하던가. 게임을 하는 이유와 계기가 특별해야 될 필요는 없다. 역사가 요한 호이징가는 인간을 유희적 인간이라는 뜻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고 명명했다. 놀이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자 욕구이며, 놀이야말로 인간 문명의 원동력이라는 주장이다.
이처럼 아마노의 대답은 게임의 본질을 관통한다. 놀이란 즐거움을 위한 자발적인 행위로서 비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다. 아마노가 제안 받은 게임부는 서로가 절차탁마하여 기술과 실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방침이고 의의다. 게임부는 이를 통해 대회에 참가해 상을 받고 상금을 획득해 활동을 이어나간다. 게임 실력을 키우고 경쟁하는 방식은 그저 ‘즐기기 위해 게임을 하는’ 아마노의 방식과는 맞지 않았다.
게임은 놀이의 한 갈래다. 놀이의 특징을 몇 가지로 정의하면, 강요당하지 않는 자발적인 행위이고, 일생생활과 분리된 활동이며, 과정과 결과가 확정되어 있지 않고, 어떠한 재화를 만들어내지 않는 비생산적인 활동이고, 규칙이 정해져 있는 활동이고, 현실과 동떨어진 비현실적이고 허구적인 활동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에 부합하지 않는 목적을 가진 놀이는 노동이나 과업이 된다.
경쟁 또한 놀이의 분류에 속한다. 그러나 아마노는 게임광이긴 해도 게임 실력이 형편없다(유치원생 수준의 피지컬). 아마노가 게임 실력을 키우기 위해 게임부에 입단하는 것은 자발적인 행위로서 게임을 즐기는 자신의 가치관에 위배되는 행위다. 아마노는 자신만의 익숙한 방식으로 게임을 해나가고 싶다며 게임부 입단 제안을 거절한다.
아마노는 게임 실력은 남들보다 떨어지지만, 그럼에도 게임을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는 게임마니아다. FPS를 하며 조준하고 쏘지 않고, 주변 풍경을 관찰하는 별난 행동을 보이지만, 이것조차도 게임이고 놀이의 일부다. 저마다 게임을 하는 이유와 방식이 존재하고, 놀이의 분류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요근래 종종 게임을 하며 뭔가를 이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여있었다. 과제를 하듯 게임을 클리어하고, 글 한 편을 써내기 위해 머리를 싸매는 일이 잦아졌다. 좋아하던 취미도 일이 되면 온전히 즐길 수 없듯이, 게임이 과업처럼 느껴져 부담감이 커졌다. 게임을 하는 이유와 본질을 다시금 되새길만한 물음을 접하게 되어 다행이다.
이밖에도 게이머즈는 훌륭한 작품성을 가졌음에도 주목받지 못한 게임들에 관한 위로, 유저들의 선호도와 자신의 기호가 일치하지 않아 고민 중인 게임개발자를 위한 조언, 비싼 게임가격과 과금 논쟁, 미완성 게임 출시, “게임은 인생의 낭비인가?” 등의 굵직한 의제와 이야기를 꺼낸다. 게이머가 보기엔 아쉬운 점이 많은 작품이지만, 나름의 의미는 있는 편. 어쨌든 게임을 다루는 작품이 더 많이 나왔으면 하는 소망이다.
애니화가 결정된 만화 '16bit 센세이션'. 90년대 일본에서 16비트 에로게임을 개발하는 내용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되는 애니메이션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