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스페이스 공감> 이 기획한 <20:04- 20:24> 전시
어렸을 적 늦은 밤 티비 채널을 돌리다가 종종 마주친 < EBS 스페이스 공감 >은 졸린 와중에 시선을 붙들곤 한다. 불과 몇 미터 안 떨어져 보이는 관객과 아티스트사이 친밀감과 < 뮤직뱅크 > 같은 가요 프로에서 보기 힘든 가수들의 퍼포먼스가 분명 색달랐다. 2004년 시작해 올해 20주년을 맞은 < EBS 스페이스 공감 >은 얼마전 막을 내린 < 네이버 온스테이지 >처럼 한국 대중음악의 산실로 기능했다. 케이팝 저편의 한국 대중음악을 지탱해 왔던 든든한 버팀목이기도 했다.
노들섬 갤러리 2에서 지난 7월 30일부터 8월 11일까지 열린 < 20:04- 20:24 >는 < EBS 스페이스 공감 >의 20주년과 지난 20년간의 한국 대중음악 발자취를 연결했다. 케이팝 저편의. 두 차례 방문한 필자에게도 각 아티스트와 음반에 대한 추억이 몽글몽글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세 가지 섹션이 잘 분리되어 있었다. 개인적으론 첫째 파트 < RECORD 01 – THEATER >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최근 < 공감 >에서 선정한 2000년대 이후(정확하게는 2004년부터) 100대 명반에 선정된 아티스트들의 다큐멘터리를 매일 4~5회차씩 상영했고, 나는 실리카겔과 김윤아, 브로콜리 너마저와 이디오테이프 총 네 편을 감상했다. 40~50분 길이의 영상엔 뮤지션의 세계관과 철학, 멋진 라이브 무대가 어우러졌다. 이제부터 각 영상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려한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밴드 실리카겔은 < 공감 >과 인연 깊다. 국카스텐, 장기하와 얼굴들과 더불어 공감이 2007년부터 시작한 “헬로루키” 프로젝트가 발굴한 팀이기 때문이다. 실리카겔도 < 공감 >과 정이 깊었는지 콜라보 향한 의지를 줄곧 천명했고, 이는 신보 < POWER ANDRE 99 > 수록곡 ‘Ryudejakeiru’의 특별 무대로 이어졌다. 중년들의 합창이 감동을 자아냈고 젊음의 특권처럼 여겨지던 실리카겔의 음악이 세대를 통합하는 순간이었다.
영상 속 ‘Tik Tak Tok’과 ‘Apex의 강렬한 퍼포먼스를 펼친 이들은 다큐 말미 11년 역사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윤지영과의 협업 등 프로듀싱으로도 활발한 기타리스트 김춘추는 최근 다녀온 유럽 페스티벌(필자가 다녀온 프리마베라 바르셀로나에도 섰다)을 언급하며 “판을 키워보고 싶다”라며 야심을 표명했고 김한주는 자신의 끊임없는 음악적 아이디어에 멤버들이 지치지 않을지 걱정된다며 밴드의 역학 관계와 책임 의식에 관해 이야기했다.
특별히 팬이란 자각은 없는데 계속 인연을 이어가는 뮤지션들이 있다. 실리카겔이 그렇다. 작년 일산 킨텍스서 열린 HAVE A NICE TRIP 2023과 올해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및 노엘 갤러거 콘서트 오프닝 무대 등 못해도 열 번 가까이 이들의 퍼포먼스를 목도했다. 올해 5월 장충체육관에서 단독 콘서트 신서사이즈 3(Syn. THE. Size 3)를 통해 이들의 음악 세계를 더욱 폭넓게 느끼기도 했다.
아직 두 장의 정규 음반이 나온 상태지만 먼 훗날 한국 밴드 음악 역사를 되돌아볼 때 실리카겔이 어떻게 기억될지 궁금해질 정도로 현재 이들이 가지는 영향력은 지대하다. 어쨌든 중심은 음악에 있다. 실험과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밴드, 음악 향한 동력이 쉬이 꺼지지 않을 밴드라는 신뢰가 있다. 실리카겔의 2020년대가 어떻게 펼쳐질는지.
5집 < 관능소설 >을 내놓은 김윤아에게서 김수철과 같은 “천상 예술가”의 모습을 봤다. 고등학교 동창을 위한 곡 ‘지현에게’를 지을만큼 일찌감치 음악가의 꿈을 꾸었던 그는 “꿈 꾸던 일을 하며 살고 있어 축복받았다”라며 27년 경력을 술회했다.
거친 이분법이나 자우림 프론트퍼슨 김윤아가 ‘Magic Carpet Ride’의 쾌활한 여장부를 상징한다면 솔로 시절은 다큐 후반부에 깔린 ‘going home’처럼 우아한 숙녀가 떠오른다. 신보 < 관능소설 >도 지천명의 나이에 선 예술가의 철학이 (트랙 곳곳) 부드러이 녹아있다. 전작에 못지않은 음반을 완성하기 위해 편집증적 노력을 기울인다는 그는 시이나 링고와 (종종) 협연한 일본 바이올리니스트 겸 어레인저 사이토 네코에게 편곡을 의뢰했다. 다큐에 직접 일본으로 날아가 사이토와 소통하는 열정 넘치는 모습이 실려 있다.
그는 동갑내기 이적처럼 뛰어난 작사가이다. “버려진 나의 뜰에도 나비가 날아들어 오네” (이상한 이야기) “그건 아마 사람도 피고 지는 꽃처럼 아름다워서 슬프기 때문일 거야”(봄날은 간다)같은 구절을 남긴 김윤아는 “단어와 음절마다 맞아떨어지는 옷이 있다”며 운율과 말의 맛을 강조했다. < 관능소설 >의 ‘장밋빛 인생’에서도 “너의 입맞춤이 나의 낮과 밤을 붉게 물들이고 / 쏟아지는 별빛 속에 춤을 추는 그대와 나” 고혹적이고 낭만적인 가사와 불어 구절로 샹송의 마력을 드리웠다.
‘건강하고 건전한 삶, 폭풍이 휘몰아치는 음악’을 추구한다는 그에게서 뼈를 깎는 각고의 예술인을 느꼈다. 불꽃처럼 스파크 튀는 영감 이면에 무수한 섬세한 노력이 있을 것이고 이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는 음악가의 소명을 실현한다는 의지 하나로 하세월을 버텼다. 자우림의 프론트퍼슨으로, 고고한 솔로 음악가로 그의 예술적 필치를 오래오래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다음 글엔 브로콜리 너마저, 이디오테이프 다큐와 나머지 섹션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