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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작가 Jan 18. 2024

방송작가의 퇴사기, 다섯 번째

나는 옹졸한 사람

“어, 자외선 차단제가 다 떨어졌네.”

“000의 신간이 새로 나왔네.”

이상하다. 왜 갑자기 사야 할 것들이 늘어나는 걸까? 보통 때였다면 고민 없이 쓱쓱 살 물건들을 샀지만, 이제 곧 백수가 된다고 생각하니 선뜻 살 수 없었다. 다른 일을 언제 시작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집에 있으면 화장도 안 할 텐데 화장품은 사서 뭐 하나, 책이야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보면 되는데 사서 뭐 하나... 이런 생각이 드니 지갑이 열리지 않았다.

이제 짐도 얼추 다 옮겼고, 출연자들에게도 인사를 했고, 회사 지인들 중 만나야 할 사람들도 다 만났다. 후배작가들과도 점심을 먹었다. 대충 상황을 이야기하고 마지막 날짜까지 알려주었다. 후배들이 예상과 달리 담담해서 속으로 당황했다. 같이 분노해 주고, 같이 속상해주었음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갑자기 내가 이 팀에서 이렇게 존재감 없는, 아니 좋은 선배가 아니였던가 하는 자괴감이 훅 몰려왔다. 마음이 꽁해졌다. 친구 작가에게 섭섭한 마음을 하소연했더니 한마디 한다다. “걔네들이 실감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너에게 미안해서 그럴 거야.” 듣고 보니 이해는 갔지만, 마음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나, 옹졸한 사람 맞다.   

우리 팀은 누군가 떠나게 되면 방송 후 스튜디오에서 왁자지껄 송별회를 열어준다. 선물도 주고, 사진도 주고... 스스로 떠나는 것이 아닌 나는 송별회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팀장과 앵커에게 마지막 방송하고 조용히 집에 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완강히 그럴 순 없다고 한다.

3주가 흘렀고, 마지막 방송이 있는 그 주... 유난히 일이 많았다. 출연자 펑크가 나고, 취재 확인할 것도 많았고, 무엇보다 후속 인사로 팀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늘 그랬듯이 뭔가가 꼬이는 상황이 되면 그걸 푸는 건 메인 작가다. 방송에서는 진행자와 출연자만 보이지만, 온갖 난리법석을 풀고 해결하고 정리해서 마침표를 찍는 건 작가의 몫이다. 일주일 내내 마음은 떠났지만 몸은 바쁘게 일했다. “작가님, 고맙습니다.” 앵커의 문자를 받으니 마음 한편이 찌르르하다.  

마지막 방송일이 다가올수록 누구와도 말을 하고 싶지 않고,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침묵의 시간이 간절했다. 바쁜 하루 속에서 마음이 터질 것 같으면 19층 옥상으로 올라가 10분 정도 아무 말도 않고 서 있다가 내려왔다.  

그리고 그날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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