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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r O Sep 01. 2024

불행 연습


♪♬내가 맘에 들어하는 여자들은 꼭 내 친구 여자 친구이거나 우리 형 애인, 형 친구 애인, 아니면 꼭 동선동본♬♪     


 재수 없게 눈 뜨자마자 제일 먼저 플레이된 노래가 하필 <머피의 법칙>이라니. 때껄룩, 에센셜 같은 힙한 유튜버들이 말아주는 ‘도입부부터 기분 좋아지는 신나는 팝송’, ‘지루한 일상 가볍게 듣기 좋은 재즈’ 같은 노래들만 들어도 기분이 나아질까 말까 한 월요일 출근 준비 시간에 말이다. ‘나름 비트는 좋네..’


 대충 준비를 마치고 현관문을 나서는데 엘리베이터가 서서히 우리 집 층으로 내려오고 있다. “어어.. 잡아야 되는데...!” 후다닥 복도를 가로질러 뛰어가 보지만 야속하게 스쳐 지나가는 엘리베이터다. 하필 구해도 복도 제일 안 쪽 집을 구한 나란 사람. 계단으로 내려갈 법도 한데 결코 엘리베이터를 포기하지 않는 나란 사람. 그래도 엘리베이터 헤비 유저니까 무릎 건강만큼은 걱정없다.


 마침내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차 키를 찾기 위해 가방을 뒤적여본다. 가방에 들은 것이라곤 립밤, 립스틱, 핸드크림, 쿠션팩트, 지갑, 차 키 정도뿐인데 꼭 한 번에 손에 잡히는 법이 없다. 이쯤 되면 얘네들이 주인이 싫어 일부러 피해 다니는 건 아닌가 싶다. 지금에 와서 가방을 활짝 열어보는 건 왜인지 자존심이 상해 몇 번을 더 휘적거려 본다. 결국 키를 손에 쥐어내고 만다.


 월요일 서울 시내 출근길이 늘 그렇듯 도로는 막힘의 연속이다. 눈치를 보아하니 2차선이 그나마 쭉쭉 빠지는 것 같다. 빽빽하게 줄지어 오는 차들 사이를 비집고 오른쪽 깜빡이를 켠 채 슬며시 끼어든다. 뒷 차의 클랙슨 소리에 급하게 비상등을 켜본다. ‘그래, 월요일 출근길 새치기는 선 넘긴 했지.’ 평소보다 더 길게 비상등을 깜빡여 내가 얼마나 많이 미안해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이제야 출근 시간에 세이프할 수 있겠다고 안심하던 그때, 내 양 옆 차들이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한다. 얼마나 힘들게 끼어든 자린데 2차선만 요지부동이다. 하늘에서 누가 알려주기라도 했나 보다. “쟤 2차선으로 이동했다! 다들 전진!!”


 8시 54분 38초. 평소에는 자리도 널널하더니 오늘따라 주차할 데가 없다. 자칫하면 지각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급한 대로 이중주차를 한 후 엘리베이터를 탔다. 3층, 4층, 6층, 7층, 8층.. 안 서는 층이 없다. 9시 00분 47초. 정시 출근인 듯 정시 출근 아닌 정시 출근 같은 지각을 하고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본다. 출근만 하는데도 무슨 고비가 이렇게 많은지, 나 원 참. 휴가 때리고 싶은 마음을 떨쳐내고 어쨌든 출근 완료한 나 자신이 대견하다.


 “이 과장! 계획안에 일정을 표로 만들어서 넣는 게 좋겠어. 문서 수정해서 다시 올려요!” 평소에는 검토도 없이 프리패스로 승인 버튼을 누르는 결재 머신 부장님이 오늘따라 문서에 왜 불필요한 의견을 내놓는지 모르겠다. ‘오늘 기분이 안 좋은가? 아니면 또 사춘기 아들이랑 한바탕 싸운 건가?’ 툴툴대지만 손은 이미 표 아이콘을 누르고 있다. 뭐.. 표로 정리하니까 나름 깔끔한 것 같기도..?


 친한 동료 3명과 점심 메뉴를 고민해 본다. 간단하게 김밥을 먹을까 하다가 설렁탕으로 오전에 소모한 에너지를 보충하기로 한다. 이번 사보 표지 모델 변우석인 거 봤냐며 오두방정을 떨다 젓가락에 집힌 깍두기를 놓치고 만다. 우유광고마냥 설렁탕 국물이 출렁이며 깍두기 국물과 작은 방울들을 만들어 나의 하얀 셔츠에 왕관을 씌운다. 김밥 먹을 걸. 아니, 검은색 옷 입ㅇ.. 근데 이 집 깍두기 왜 이렇게 맛있지? ‘고춧가루 중국산’. 역시 내 입맛엔 중국산 김치가 딱이다.


 누구보다 늦게 출근했지만 퇴근만큼은 누구보다 빠르게 한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갑자기 입술에 건조함을 느낀 나는 가방 속에서 립밤을 찾는다. 얼씨구, 아침에는 귀신같이 내 손아귀를 피해 가던 차 키가 한 번에 잡힌다. 립스틱, 핸드크림, 쿠션팩트, 지갑 모두 다 손에 걸리는데 또 이 놈의 립밤만 안 잡힌다. 얘네들은 주인 알기를 우습게 아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립밤 녀석도 결국 내 손을 벗어나진 못한다.


 저녁을 먹어야 하는데 세상만사 다 귀찮다. 간단하게 간장계란밥이나 해 먹어야겠다. 재빠르게 달걀 반숙을 만들고 햇반을 돌려 그릇에 대충 담는다. 이제 간장과 참기름 각 한 숟갈씩만 싸악 둘러주면...! 젠장, 참기름 지난번에 다 쓰고 새로 안 사뒀구나. 버터! 버터라도 있어라 제발... 맞다, 며칠 전에 트민녀(트렌드에 민감한 여자)로 거듭나겠다며 레몬딜버터인지 레몬쑥갓버터인지 만든다고 버터도 다 써버렸지.


 다소 뻑뻑하고 텁텁한 저녁 식사를 끝내고 일찍 침대에 눕는다. 오늘을 돌아보니 불운의 연속이었다. 묘하게 조금씩 어긋나던 날이다. 그래도 이런 하루를 꾸역꾸역 살아내었다. 세상이 계속해서 나에게 시비를 걸어왔지만 지지 않으려 애썼다. 불‘운’보다 불‘행’에 가까운 날이 찾아와도 기특한 나의 이 날 덕분에 예사로이 견뎌냈다 말할 수 있길 바라며 몇 번의 눈 깜빡임 끝에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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