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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r O Nov 17. 2024

부디,


 안녕 하세요.

 

 바구니 가득 쌓여있던 빨래를 해치우고 베란다에 탈탈 털어 널던 날이었어요. 쉬이익 날아오던 비행기 소리에 방충망 너머로 하늘을 바라보니 그렇게 맑을 수가 없더군요. 때마침 불어오는 나른한 바람에 널린 옷가지들이 펄럭이며 향긋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살랑이니 행복이 뭐 별거냐 싶었네요.


 행복은 정량이 있어서 티 내는 만큼 새어나가진 않을까 두렵다고 종종 얘기했었죠. 그래서 ‘행복하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함부로 벅찼다가 예고 없이 찾아오는 절망이 주는 낙차가 괴로워 늘 행복을 경계하며 살았잖아요. ‘덜 불행’한 삶을 사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행복이라 여겼던 사람이니까요. 그런 제가 따스한 햇빛, 시원하게 가로질린 비행운, 달큼한 내음과 같은 사소한 것에 만행(萬幸)을 느끼니 행복도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닌가 봐요. 어쩌면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을 만큼 흐뭇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가 봅니다.


 올 한 해는 다행다복한 일이 많았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몇 날들이 있네요. 하루는 친구와 벚꽃이 소담하게 줄 지어 핀 공원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포근한 하루를 보내기도 했답니다. 간단히 챙겨간 간식에 맥주 한 잔 하며 흩뿌려진 벚꽃 잎을 배경 삼아 말랑해진 몸과 마음을 한 장의 사진 속에 담아보기도 했습니다. 낯간지럽지만 환하게 웃는 제 모습이 오래간만이라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까지 설정해 두었답니다. 지금 보아도 여전히 예뻐 종종 들여다보며 미소 짓곤 합니다.


 또 어떤 날은 쏟아지는 비에 흠뻑 젖은 채 어린아이처럼 신나게 뛰어놀기도 했네요. 실내 공연장으로 몸을 피할 수도 있었지만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던 우리를 내버려 두기로 했습니다. 그 페스티벌엔 당신이 좋아하던 밴드도 나왔었는데, 처음엔 올드하다며 기대도 안 하던 친구가 막상 노래를 듣고는 그날 가장 신나 하는 모습을 보이던 기억이 납니다. 비를 맞아 정신이 나갔었는지, 술과 분위기에 취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올해 중 가장 웃음이 많았던 날이었던 건 분명합니다.


 무더위가 사알 물러가던 즈음, 한적한 시골마을을 찾아 떠난 날도 있었어요. 서로 일바지 하나씩 맞춰 입고 평상에 누워있는데 일렁이는 바람 덕에 덩달아 제 마음도 설레어 오더군요. 개다리소반에 막걸리 한 잔 받쳐 내오며 우리 제법 시골과 잘 어울리지 않냐 떠들썩하게 웃고 재잘대던 날이었습니다. 저답지 않게 모르는 사람들과 술 한 잔씩 기울이다 마당 자갈밭에 드러누워 밤하늘에 빼곡하게 수 놓인 별들을 한참이나 구경하기도 했습니다. 그 여행에서 저와 친구는 서로를 꼬옥 안은 채 행복을 빌며 작별했답니다.


 아, 좋은 곳이 있으면 같이 가자고 해주는 친구도 생겼습니다. 소심하고 고집 센 저에게 이것저것 함께 하자며 손 내밀어주는 고마운 사람이에요. ‘귀찮다’, ‘무섭다’는 말로 투정 부리기 일쑤인 제가 그 친구 덕분에 부지런히 아름다운 풍경들도 눈에 담고, 용기를 내어 새로운 경험도 하게 되었답니다. 며칠 전 한 식당의 웨이팅을 기다리며 수원화성 야간 산책을 했는데 은은한 조명으로 비춰진 돌담길을 걷다 별안간 감격에 차오르기도 했습니다. 무언가를 아울러 해보자 얘기해 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그리고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감사한 일이지 않나요?


 과거 ‘우린 행복해질 수 없는 사람들’이라 말했던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당신에게, 그리고 특히 제 자신에게 상처 주려고 일부러 뱉은 말이라 더욱 창피하게 느껴지네요. 그래서 당신에게, 그리고 제 자신에게 용서를 빕니다. 앞으로는 무사히 즐거움을 담뿍 느끼며 살아봐요, 우리.


 아직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기엔 한 달하고도 며칠이 더 남았지만 빨래를 널다 문득 올해를 돌이켜보게 되었네요. 전 이렇게 탈 없이 편안한 한 해를 보냈답니다. 당신은, 안녕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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