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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헌재 May 30. 2022

선택의 알고리즘

우리의 선택은 이미 프로그램이다

첫 번째 이야기



전체 이야기의 서문



  파블로프는 우선 종을 울렸다. 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먹이를 줄 때마다 종을 울려서 소리를 냈다. 이것은 계속 반복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먹이를 주지 않고 종을 울렸는데 개는 먹이를 주는 줄 알고 침을 흘렸다.      

 

  이것이 그 유명한 파블로프의 조건 반사 실험이다. 글의 가장 서두에, 그것도 알고리즘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해서 바로 이런 실험으로 이어진다면 대단히 기계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리고 저 실험 자체가 여러 가지 방향에서 논의를 낳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서문에서 글 전체에 대해 말할 수 지점을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즉 개는 프로그램 되었다.      

 

  한 개체가 일생에 걸쳐 선택하는 모든 행동에는 규칙이 있다. 학습이 가능한 정도의 종이 아니라면 더더욱 그 규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프로그램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규칙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워 보인다. 우리는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으며 어떤 것들은 성취하고 어떤 것들은 포기할 수도 있다. 우리는 단순한 욕구를 이겨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도 프로그램 자체를 무시할 순 없을 것이다. 아니, 혹은 프로그램 되어 있다는 것을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모든 선택은 이미 프로그램 된 결과가 아닌가 하고. 그렇다면 우리의 지금 선택들이 오로지 우리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프로그램의 결과라고 생각해보자. 그래서 지금 우리가 선택한 모든 것이 자유의지가 아니라 프로그램의 결과라고.      

  

  이 글의 목적은 프로그램에 대한 새로운 시선들을 던지고 결과를 바꾸고자 하는 데에 있다. 프로그래밍의 기본 구성은 비슷하지만 그 안에서 한 개인의 타고난 기질, 속성, 강도, 방향의 구성은 다르다. 때문에 그 과정에서의 인과관계, 선택을 만드는 이유, 즉 과정과 결과까지의 각 단계들이 프로그램의 독특함을 결정짓는다. 이 과정은 또한 어떤 사건을 받아들이는 태도라든지, 어떤 상황에서 즉각적으로 하게 되는 행동이라든지, 불쾌를 참아내는 등의 여러 단계들이 서로 교차하며 제기되기도 한다. 이렇게 서로 작용하는 힘들의 상호관계를 파악해서 결국 인생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하는 과정을 알고리즘으로 만들어 체계화할 것이다. 이것은 현재 스스로 겪고 있는 많은 문제들, 즉 지금 우리가 삶에서 겪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시선이다. 그러므로 해야 하는 질문은 “왜 나방은 불에 뛰어드는가?”처럼 우리가 선택한 결과의 문제가 아니라 “왜 나방은 빛에 자극을 받는 고정된 각도로 움직이는가?” 그리고 “특히 왜 나선으로 움직이는가?”라는 질문, 즉 왜 우리는 이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도록 프로그램 되었는가에 대한 대답이 되어야 한다.      


  당신은 온종일 누워 유튜브를 보면서 하루를 보내는 것을 선택했는가? 그리고 잠들기 전 거기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스스로를 한심하게 생각하고 나서 다음날 또 그 선택을 반복하는가? 혹은 SNS를 통해 드러나는 타인의 삶을 보며 스스로를 더 낮추고, 자신의 삶에 대해 부정하는가? 아니면 이유를 알 수 없는 그 무엇으로부터 끝없이 도망치고 있는가? 어떻게든 그 하루를 버티고 다음날, 또 다음날, 또 다음 날, 또 그렇게, 하루를 보내는가?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런 기질과 성격을 타고 났고 이런 환경도 바꿀 수가 없다. 유전과 환경, 둘 다 바꾸지 못한다면 이건 내 책임이 아니다. 나는 프로그램 자체이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당신이 일생을, 삶 전체를 유전자의 희생물로 여길 수도 있다. 환경 또한 그렇게 생각된다. 아니, 어쩌면 거기까지도 프로그램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이 바꾸지 못한 것은 유전과 환경이 아니라 전복의 가능성 자체들이다. 이미 무언가를 바꿀 여지조차 마련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심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왜”라는 질문들을 통해 근거를 마련해야 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나는 바뀌고 싶다.”의 문제가 아니라 “바꿀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문제이다. 물론 지금까지 몇, 몇 학자들의 단편적인 언급이 유전적인 결정론에 대한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유전이라는 이 말은 이제 너무나 쉽고 당연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유전학에서의 많은 문제들이 아직 가설이라는 것을 상기하자. 유전학도 마찬가지이지만 이후의 결과들, 즉 환경에 대한 부분과 연계되는 후성유전학 역시 이제야 그 시작점에서 출발 신호의 총소리를 듣고 한 걸음을 내딛었을 뿐이다. 유전적으로 타고난 기질과 속성, 그리고 환경으로부터 받아들이는 학습의 결과로서의 인간의 행위, 이 상호간의 지배에 대해 어쩌면 새로운 질문과 가능성에 대한 여지들은 아직 말해본 적이 없다. 때문에 사람의 행동에 대한 프로그래밍과 그래서 사람이 선택하는 이 알고리즘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은 유전자의 활동과 생물학적인 행동, 세포에 다운로드 된 환경으로부터의 정보와 역동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이 구조를 생물학의 기본적인 원리에서 출발해서 어떻게 심리학적인 영역으로 끌고 들어와서 설명하며 철학의 방법을 통해 논리적인 형태로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글의 초고는 프로그래밍으로 인해 낮은 자존감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시작되었기 때문에 – 그렇다. 그것도 선택되어진 것이다 - 글의 중간, 중간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긍정, 자신을 돌아봄, 타인을 신경 쓰지 않기, 태도 바꾸기, 환경의 변화, 인간관계의 절단, 혹은 변화, 스스로를 사랑하기, 주눅 들지 않기, 남들의 험담을 무시하기,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기, 쓸데없는 고민 하지 않기, 상처받을까봐 두려워하지 않기 등을 선택함으로 자존감을 높일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 단편적인 가능성은 전혀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역시 질문은, 질문의 힘은 질문을 위해 채택되는 몇 가지의 명제들이 옳기 때문에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의 의도, 목적, 조건들 자체가 이미 새로운 시선을 가지고 또한 질문을 실현 가능한 구체적인 예측으로 전환시킬 가능성의 순간에서만 발휘된다. 그렇다. 우리는 이미 막연한 질문들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것으로는 우리의 선택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의 자존감은 높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자존감이란 언뜻,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논리적인 것이 아니다. “당신은 왜 자존감이 낮습니까?”라는 질문에 논리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알고리즘이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자존감이 낮은 것도 내가 선택한 것일까. 지금 당장은 그렇다(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제대로 된 대답이야 말로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자존감이란, 그리고 선택이란 이미 프로그램 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그렇게 선택되어지도록,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말이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은 애초에 유전적으로 타고난 무의식적인 프로그램일 뿐이다. 이후 어떤 이론을 바탕으로, 논리적인 토대로 쌓아진 것이 아니라 그저 주입식으로 입력된 것이다. 때문에 온전히 당신의 탓은 아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프로그램 되었고 그대로 살아왔다면, 그리고 그걸 바로 지금 알게 되었다면, 이것은 당신에게 기쁜 일인가, 혹은 화가 나는 일인가. 낮은 자존감이 당신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은 기쁠 수도 있고 당신이 지금까지 수도 없이 겪은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이 단순히 그 프로그램 때문이었다면 화가 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 프로그램을 수정할 수 있다면, 프로그램을 보다 재조립하고 수정해서 재구성할 수 있다면 어떨까. 그러므로 이 글의 목적은 단 하나이다.      

 

 “인간은 어떻게 프로그램 되어 있으며, 그 프로그램을 통해 무엇을 선택하게 되며, 그 프로그램은 어떻게 수정 가능한가.”     

 

  즉 이 글은 인간은 프로그램 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프로그램이 이루어지는 전반적인 과정과 그것들의 구조를 알고리즘으로 만들어 논리적으로 밝히고 우리가 스스로 다시 재-프로그램 할 수 있는 방법을 고찰하고, 수정한 프로그램을 통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행위를 선택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이론서이다. 또한 이런 구조들을 밝혀내면서 드러난 근거를 통해 우리가 사소하게 겪고 있는 여러 가지 일상에서의 낮은 자존감, 약간의 우울, 잦은 자책, 관계에서의 고립, 소외, 그리고 불필요한 소비, 과도한 행동, 집착, 인정받기 위한 욕망 등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그저 막연한 환상이라는 것을 논리적으로 말하기 위해 씌어졌다. 때문에 이 글을 단순히 ‘읽는’ 것으로 그친다면 선택은 달라지지 않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론은 그것을 읽고, 그것을 알고, 적용하고, 비로소 실천할 때에만 완성되고 성립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어떤 책도 그 자체로서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어떤 책도 실제로 행할 수 있는, 바로 여기에는 조력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것도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라는 조력자가.     


  이 글은 당신의 궁금한 지점들을 차례로 리드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당신이 보고 싶어 하지 않는 부분까지 끌고 들어갈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분명히 그럴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불쾌한 경험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겪었던,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진 그런 선택으로부터 비롯된 그런 불쾌한 경험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그리고 더군다나 우리가 지금까지 믿고 있는, 혹은 추구하고 있는 쾌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있다면 어떻겠는가. 쾌를 또 다른 시선으로, 혹은 진실한 의미로 볼 수 있다면, 그것도 드러나는 방법이나 형태와는 관계없이 말이다(쾌는 정신질환이라는 고통으로 드러날 수 도 있으니까). 그렇다면 쾌에 대해 처음으로 다소 거칠게, 난도질해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쾌와 불쾌의 메커니즘을 다시 따라가다 보면 반드시 이 프로그래밍을 구성하는 선택의 알고리즘의 또 어느 지점에 도달할 것이다. 좀 복잡하고 어렵게 보이겠지만 인간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주위에서 나의 고통을 진심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닌, 누구나 말할 수 있는 것만을 말하고, 누구나 말할 수 있는 것만을 듣고, 누구나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상처받을 것이다. 우리 주위에서 우리를 향해 말해 온 이 ‘누구나 말할 수 있는 것’ 때문에 이미 얼마나 상처 받았는가. 그래서 이제 우리는 무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건 누구나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혹은 때문에, 그건 저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닌 것 같은데요. 저에게는 당신의 말을 듣지 않을 권리도, 이유도 충분히 있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무기를, 그 근거를.      


  나의 선택은 이미 프로그램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욕망도, 그런 식으로 이미 프로그램 되어 있는가. 거기에 대한 대답도 지금은, 적어도, 그렇다. 적어도 어떤 단계들에 대한 고찰 없이 욕망이란 단순히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겨우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말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질문 없이, 모르는 것을 그냥 넘어간다면 그것이 프로그램이 원하는 바이다. 어쩌면 이것은 하나의 명제가 될 수 있다. 프로그램은 당신이 복잡하게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아니, 차라리, 그렇다면 프로그램의 지배자는 당신이 그저 단순히 프로그래밍 된 채로 살기를 원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도대체 누가, 왜 원하는 것인가. 누가 지배자인가. 보다 단순히 살아가기 위함. 이것이 프로그램 된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는 방식인 것인가. 개미가 유전된 정보와 그것을 통한 무의식적인 프로그램을 통해 선택한 그대로만 평생을 살아가는 것과 같다는 말인가.     

  결국 우리는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고 싶은 것뿐이다. 이 글은 기존의 인간의 행위를 설명하는 다양한 이론들 중에 가장 기본적이고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들, 즉 생물학과 유전학의 명제들, 정신질환에 관련된 유전적인 소인과 환경에 관한 것들, 그리고 심리학에서 말하는 증상-행위와 대상 선택의 메커니즘을 철학의 지점들과 방법들로 알고리즘을 만들고 인간의 행위를 하나의 프로그래밍으로 설명할 것이다. 모든 이론들이 그렇듯이 프로그램 자체는 단순한 과정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유전적인 것, 즉 선천적인 부분과 이후 환경에 대한 요소들, 그리고 그것들을 어떻게 종합해서 하나의 행위라는 결과로 만들어 내는지에 대한 설명은 보다 복잡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의 끝에서 우리가 이미 프로그램 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프로그램을 통해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왜 우리는 잘못된 혹은 잘못된 것을 알지만 그토록 과거에 얽매여 있으며, 또 왜 그런 반복들을 계속 경험하는지, 왜 그런 선택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지에 대한 구조를 밝힐 것이다. 때문에 이 글은 단순히 글을 ‘읽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이 글은 프로그램을 수정하는, 그래서 무언가 바꾸고자하는 그 시작의 지점에서 말했던 그 역할을 다 할 것이다. 즉 우리는 파블로프의 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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