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샌델의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고
내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 세 가지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열심히'라는 단어를 정말 많이 들었다. '노력'도 열심히 와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아무래도 내가 굉장히 게으르고 공부를 좋아하지 않아서 많이 들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중학교 1학년 때까진 노력을 하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렇게 배우기도 했다. 그런데 2학년 때부터 의문이 생겼다. '나와 친구는 공부량이 같은데 어떻게 다른 성적을 받았는가?'였다. 그다음엔 재수학원을 다니면서 확신이 생겼다. 노력의 정도와 성적은 연관성이 적다는 것이다. 16시간을 공부하고도 성적이 낮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공부를 조금만 하고도 높은 습득력으로 오히려 더 높은 성적을 가져가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재능이 있다고 노력을 통해 갈고닦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투자한 시간은 정말 객관적으로 봐도 다르다. 그렇다면 '하면 된다'는 어떤가. 역시 노력을 강조하는 것과 비슷한 논의다. 정말 하면 되는 것인가? 누군가는 하면 되고, 누군가는 했는데 안된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우리는 이러한 차이를 노력의 차이로 몰아간다. '공부를 더 했어야지!'와 같은 말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천부적 재능과 공부를 접하는 환경이 달랐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노력을 했지만 재능이 부족했으며, 누군가는 재능이 있었지만 공부를 할 경제적 여건이 부족했을 수도 있다. 이런 '운'적 요소가 정말 중요시되는데도 왜 우리는 노력에 집착하는 것일까?
이런 질문에 관한 해답을 쓴 유명한 정치학자가 있다. 마이클 샌델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우리나라에서 유명세를 탄 적이 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놀랐다. 나와 마이클 샌델이 많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샌델은 나의 질문에 대해 더 깊이 있는 고민을 소개한다.
대다수가 보여줄 태도라고 생각한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우리는 능력주의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능력주의는 인류가 탄생하면서부터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인류가 사냥, 채집을 할 때에도 달리기가 빠르거나 투창을 잘하는 사람이 더 대접받았을 것이다. 이처럼 '공동선에 기여한 만큼 대가를 받는다.'라는 생각은 인류의 탄생부터 함께 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우리는 "야! 능력주의는 인간의 본능이며, 자연스러운 역사의 과정이야."라고 말하기도 한다. 맞는 말이다. 난 이 자체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계속해서 역사를 살펴보자. 문명이 태동하고 나서도 인류는 능력주의에 기반했다. 플라톤과 공자 역시 능력주의를 말했다. 특히 플라톤의 철인 통치는 철학자, 즉 능력 있는 사람이 대중을 통솔해야 한다고 말한다. 심지어는 대중에게 선의의 거짓말을 해서라도 말이다. 공자 역시 덕이 있고 선망 높은 사람이 지도자를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전부 능력 있는 사람이 다수를 지배하여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는 점이다. 다만 이 능력은 현재 말하는 능력과는 조금 다르다. 이들이 말하는 능력은 공동선을 추구하고자 하는 도덕적 개념이 내포돼있음을 알 수 있다.
능력이라는 단어는 현재 조금 다르게 쓰인다. 결혼 조건을 따질 때 '그 사람 능력 있어?'를 물어본다. 이는 곧 그 사람이 돈을 얼마나 벌 수 있는가를 물어보는 관용구이다. 언제부턴가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을 능력이 좋다고 여기게 되었다. 능력과 가치(돈)가 연결된 것이다. 동시에 공동선에 관한 이야기는 멀어졌다.
이는 능력주의와 자본주의가 연결됐음을 알 수 있다. 막스 베버의 저서 <프로테스탄트와 자본주의 윤리>에 따르면 이 연결의 첫 출발은 청교도(프로테스탄트)이다. 마틴 루터와 장 칼뱅으로부터 시작된 종교인 청교도는 구원 예정설을 따랐다. 구원받을 사람이 정해져 있으니, 구교(가톨릭)가 말하는 것처럼 성당에 자주 나간다거나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이 구원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역설했다. 많은 사람들은 동의하면서도 동요했다. 자신이 구원받은 사람인지 아닌지 굉장히 불안해했기 때문이다. 장 칼뱅은 근면 성실한 노동과 그를 통한 사회적 성공이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징표(증명)이라는 말을 한다. 여기서 청교도들의 자본주의가 시작된다. 근면 성실한 노동은 부를 가지고 오고, 부가 곧 자신의 성공이며, 구원의 징표라는 것이다. '자신이 성공한 것은 신의 섭리이며, 자신이 구원받은 징표이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신의 버림을 받은 자들이다.'라는 논리가 시작된다. 능력과 부의 연결 그리고 부와 선함의 연결이 여기서 이루어진다. 청교도가 근면 성실함을 강조한 만큼, 성공을 하지 못하는 이유에 근면 성실함의 부족이 들어가게 된다. 바로 '노력'의 부족이다. 이는 어쩔 수 없이 능력주의로 흐른다. 능력에 부의 창출이 포함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돈이 능력이라는 단어로 환원되기 시작한다. 또 종교적 특유의 권선징악론이 합쳐지면서, 성공한 사람은 '선'으로 실패한 사람은 '악'으로 판단하게 된다.
심지어는 능력이 있으니 부가 창출된다는 논리가 역으로 작용한다. 치과의사의 실력과 치과병원의 매출은 큰 연관이 없음에도 우리는 매출이 높은 병원이 더 높은 실력을 가질 것이라 지레 짐작한다. 상권이나 치과의사 개인의 사업수완은 치과의사의 실력보다 매출에는 더 큰 영향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크게 고려되지 않는다. 이에 우리는 '능력이 있으니 부가 있다.'와 함께 '부가 있으니 능력이 있을 것이다.'라는 논리도 가지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라는 가치는 인간의 욕구만을 드러냄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가치를 침해할 정당한 권리를 가지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위에 '능력 있는 사람'의 예시로 설명하였듯, 능력주의가 자본주의와 함께하게 되면서 능력은 곧 '돈을 많이 창출할 수 있는 능력'으로 환원됐다. 능력은 이제 더 이상 선하지 않다. 청교도들의 사상이 온 세상에 뿌려지면서 이제는 선함이라는 요소가 부의 창출 능력으로 환원됐다. 현재는 능력 있는 사람이 더 많은 돈을 가져가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능력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효율성을 창출했고, 그 효율성이 사회 전체에 효익이 됐다고 생각한다. 능력주의는 '공동선에 내가 기여한 만큼 대가를 받는다.'라는 헛된 이야기를 믿는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에서는 화학교사가 자신의 화학적 지식을 이용해 마약의 일종인 순도 높은 매스 암페타민을 만든다. 이 마약은 주인공이 화학 교사로서 벌 수 있는 돈보다 훨씬 많은 돈을 안긴다. 우리 사회는 그가 마약 제조업자로서의 능력이 교사로서의 능력보다 더 크다고 말한다. 이는 능력이라는 단어에 가치만 존재하며, 도덕적 판단이 결여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매스 암페타민의 제조가 사회적 기여라는 것에 동의할 사람은 많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버는 돈이 우리의 사회적 기여도를 반영한다.'라는 사회 깊숙이 박혀있는 개념이 산산조각 나는 대목이다.
세상은 노력을 강조한다. 우리는 노력에 의해 보상받는 사회를 꿈꾼다. 노력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노력은 절대적 열쇠가 되지는 않는다. 메시는 현재 전 세계에서 축구를 가장 잘 하는 선수 중 한 명일 것이다. 메시가 아무리 재능이 넘쳐도 노력으로 재능을 갈고닦지 않았다면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메시와 같은 실력은 메시와 같은 노력을 한다고 보장되지 않는다. 능력주의자들도 이를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성공을 남의 덕으로 돌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결국 이것은 왜곡적으로 드러난다. 능력주의 사회는 노력이 가치(돈)을 창출한다는 환상에 빠지게 만든다. 과연 그런가? 적어도 능력주의는 그렇게 믿고 싶어 한다.
능력주의자들은 비겁하다. 자신의 성공 요인을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서 찾는 오만함과 함께 상대방의 실패는 상대방에서 찾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 자신은 노력을 해서 여기까지 올라왔고, 다른 사람들은 노력이 부족해."라고 말할 수 있는 원동력이 바로 능력주의다. 이렇게 직접 말을 안 하다 뿐, 우리나라 사회 기저에는 이런 시선이 깔려있다. 공부를 못하는 사람들에게 노력하라는 말을 무책임하게 던지는 모습이 가장 대표적이다. 많은 전문 직종은 자신이 "공정한" 경쟁을 통해 선별됐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은 "난 노력을 열심히 해서 공부를 잘했고, 결국 하버드에 입학했어!" 등의 사고를 가진다. 자신이 받은 수많은 혜택은 무시한다.
어느 날 로또를 맞은 사람에게 아무도 너의 노력에 로또가 보답했다고 하지 않는다. 또 아무도 자신이 이뤄낸 성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능력주의자들 중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성공이 순수히 자신의 노력이라고 본다. 그들은 자신이 공부를 할 수 있었던 부모님의 경제적 환경이나, 천부적 재능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는다. 운 좋은 사람들은 운이 좋다는 사실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를 넘어서, 그들은 자신이 그런 행운을 가질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납득할 필요가 있다. 다른 이들에 비해 '난 그럴 자격이 있다.'라고 확신할 수 있는 무언가를 바란다. 더불어 다른 운 나쁜 사람들도 자신의 업보일 뿐이라고 믿길 바란다. 샌델은 여기에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시대적 운을 설명한다. 농구스타 르브론 제임스가 르네상스 이탈리아에 태어난 경우를 설명하며, 그 시대상에 어울리는 재능을 지닌 사람이 돈을 벌 행운을 누릴 수 있다고 설명한다. 물론 그가 농구가 유행 중인 현재 살고 있음은 그가 노력한 결과가 아니다. 더 큰 문제점은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도 이런 약육강식의 세계를 받아들여 버린다는 것이다. 패배감에 젖어드는 것이다. 자신의 실패에는 자신의 잘못이라는 자업자득의 개념을 장착한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무력감을 짊어진다. 자신이 운 없다고 생각하기보단 자신의 노력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성공한 사람이 오만함을 가지는 것만큼 분노를 가지게 된다.
계급사회에서는 아무도 자신의 계층을 자신의 탓이나 덕으로 돌리지 않았다. 공부한 귀족들은 자신이 혜택받았음을 대부분 인지했으며, 가난한 사람이나 노예, 평민들은 자신의 계급을 사회의 부조리함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능력주의 사회가 오고서는 조금 다른 양상이 펼쳐졌다. 능력주의 사회는 '하면 된다.'라는 생각을 깔고 간다. 실제로 그런 사회인지에 대한 의심은 없다. 자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남들보다 자신이 노력을 많이 해서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성과를 자신 덕과 탓으로 돌린다는 점이다. 계급사회와 달리 현재 능력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갖는다. 능력주의자들은 자신이 굉장히 공정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이 세상은 모두에게 열려있는 사회이며, 너의 노력 여하에 따라 네가 성공할 수 있는 정도가 달라진다고 역설한다. 정말 합리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재능과 돈이 있는 사람은 학업적 성취를 이루기 쉽고, 그 후 학업적 성취를 이용해 다시 돈을 창출하는데도 유리하다. 반대로 경제력과 재능이 없는 사람들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취를 이루기 어렵다. 현실적으로 사회 계층 이동이 어렵다는 증거는 수많은 연구가 뒷받침한다. 능력주의가 지배한 현재, 공정한 사회라는 착각은 성공한 자들에게는 오만함을, 실패한 자들에겐 굴욕감을 안긴다. 더불어 이런 착각은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생각 또한 지워버린다. 능력주의자는 성공한 사람들만 따르는 신념이 아니다. 모든 사회에 찌들어있는 생각이다.
현실은 노력에 의한 보상을 하지 않는다. 능력에 의한 보상을 하지도 않는다. 공동선에 기여한 만큼 보상이 주어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거장 하이에크는 가치(돈)와 능력을 연결 짓지 말라고 경고한다. 롤스 역시 부의 창출을 능력과 연관 짓지 말라고 한다. 현재 사회에서 터져 나오는 불만은 '내가 이만큼 노력했는데 왜 보상을 주지 않는가?'라거나 '다른 사람은 나만큼 노력하지 않았는데 왜 저 사람에게는 보상이 주어지는가?'와 같은 종류다. 노력이라는 단어에 사회가 매몰돼 있다. 심지어 기득권이 아닌 사회적 약자에 분노가 터져 나온다. '다른 사람은 나만큼 노력하지 않았는데 왜 저 사람에게는 보상이 주어지는가?'라는 질문은 기존 기득권에게 하는 질문이 아니다. 기득권이 가진 부는 능력에서 기인했다는 인식이 크다. 기득권이 가진 부는 능력의 상징으로 변모했다. '능력이 있으니, 부를 가질 자격이 있다.'라는 생각에서 '부가 있으니 능력이 있을 것이다.'라는 논리(위에서 살펴본 논리다.)로까지 이어진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분노는 약자를 향해 분출된다. '약자는 우리만큼 노력을 안 했는데 왜 보상을 받지?'라는 생각이 팽배해진다. '약자는 노력을 안 해서 약자다.'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개천에서 용이 난 사람들을 보여주며 이런 사람들이 능력주의의 좋은 케이스며, 당신이 말하는 능력주의의 폐해는 노력하지 않은 사람이 하는 변명이라고 하기도 한다. 과연 그런가. 우리는 그런 사람이 성취를 얻어야만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사회를 비판해야 하는 것이다. 능력주의를 통한 사회, 기회의 평등을 추종하는 사회는 교정적 원칙일 뿐 좋은 사회를 만드는 이상은 아니다.
학력주의는 능력주의 사회의 시작이다. 샌델은 SAT를 예시로 능력주의를 비판하는데, 놀랍도록 한국의 수능과 비슷하다. 수능으로 인한 선발은 언뜻 보기엔 정말 공정하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하지만 수능과 소득수준의 연관을 연구한 결과들은 모두 하나같이 소득이 높을수록, 수능 성적이 높다고 알려준다. 수능 제도 외에도 소득에 따른 학업 성취도는 눈에 띄게 드러난다. 인 서울 대학교의 절반 이상은 9,10분위이며 SKY라고 부르는 학교들은 10명 중 7명이 9분위 10분위이다. 하지만 입시제도는 네가 노력한 만큼 성취를 준다는 달콤한 말을 한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선생님은 단 한 분도 없었다.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학원에 다니면서 이를 너무나도 당연한 권리로 인식하고, 학원에서 배운 많은 수험적 스킬을 자신의 '노력'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고 착각한다.
재미있는 것은 미국에서 일어난 대형 입시 스캔들에서 부모들은 자신의 자식이 이 부정행위를 몰랐으면 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아이들이 자신의 노력으로 성취한 것이라고 믿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아이러니한 모습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노력이라는 것에 매몰되어 사는지 보여준다. 자신의 성과와 성취를 이루지 못한 자들에 대한 업신여김은 이 모든 게 운이라는 겸손함을 가지지 못해서 나타난다. 내 친구들에게 당신이 얻은 성과는 많은 운적 요소가 포함돼 있다는 말을 해도, 친구들은 쉽게 동의하지 않는다. 자신이 그동안 한 공부라는 노력이 부정당하고, 카지노의 홀짝에서 성공해서 이 자리에 올라왔다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이런 운적 요소의 배제는 모든 학생들에게 스트레스를 준다. 성적이 노력의 측정요소라는 생각은 상대방을 경쟁적으로 생각하게 한다. '내가 쟤보다 더 노력하면 쟬 이길 수 있을 거야!'와 같은 생각과 함께, 승리를 얻지 못했을 때 패배 또한 자신의 능력 부족으로 이해하고 만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위치를 꾸준히 노력하기 위해 온갖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런 스트레스는 또 결국에 자신이 보상을 받아야 하는 정당한 이유로 생각하게 된다. 어린 나이부터 경쟁과 노력을 배우며 살았던 우리의 모습은 저 학력자들에 대한 당연한 차별과 저 학력자들의 당연한 패배감으로 나타난다. 어릴 때부터 능력주의의 늪에 빠진 우리는 이후로도 계속되는 능력주의의 항연에 동의하게 된다.
재미있는 점은 객관적으로 봐도 학력이 낮지 않은 사람들도 패배감에 젖어있다는 점이다. 인 서울 대학교까지 들어가는 사람은 굉장히 소수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SKY에 가지 못한 바보로 취급한다. 게다가 스스로의 학력을 깎아 내리고, 자신보다 서열(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이 높은 대학교를 다닌 사람이 더 높은 임금과 더 나은 직장을 손쉽게 얻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자신들 역시 무궁한 가능성을 가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다니는 학교의 서열에 따라 자신의 능력을 한계 짓고 좌절한다. 놀라운 점은 그 자신 역시 능력주의 사회에서 말하는 '능력'을 갖춘, 굉장히 소수 안에 든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최상위에 있는 사람은 행복할까? 뭐 한두 명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한두 명 역시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 끊임없는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것이다.
학력주의는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고 공정하다는 착각을 불러오며, 사교육 등으로 불필요한 경제적 유출 또한 유도한다.
일의 존엄성은 정치 신념 좌우를 막론하고 모두가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치일 것이다. 하지만 학력주의의 강화는 능력주의의 강화를 낳았고, 적은 임금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자신이 패배했다고 생각하도록 유도했다. 여기에 더불어 AI의 급속한 성장과 노동력 대체는 이 저임금 노동자들을 더욱 불안에 떨게 했다. 이제 그들의 고통은 봉급의 수준에 대한 걱정과 더불어 자신의 기술이 더 이상 쓸모 없어지는 시대가 오고 있다는 두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오직 GDP라는 파이를 키우는 게 최선이라는 말만 반복해 왔고, 좌파들은 일단 GDP를 높이고 세금을 통한 재분배를 노린다는 말만 허망히 되풀이했다.
AI와 로봇이 일자리를 직접적으로 대체하는 지금, 정치인들과 엘리트들은 엄청 기운 나는 말을 해준다. "공부를 하세요! 코딩을 배우세요! 시대에 맞는 기술을 새로 익히세요! 모든 것은 당신이 하기 나름이랍니다! 하면 된다!" 너무나도 무책임한 외침이다. 나 역시 학교에서 AI 시대에 사라질 직업과, 공부해야 할 분야 등을 배웠다. 이것 역시 능력주의적 생각이다. AI 시대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당신을 당신의 능력 부족으로 치부하고 만다.
경제의 금융화는 노동가치의 하락을 더 빠르게 불러왔다. 금융의 사행성 증진과 과도한 금리 인하는 노동자들의 사기 저하에도 큰 역할을 했다. 노동자들의 사기가 저하되는 만큼 금융이 생산성을 띤다면, 이 논의는 크게 의미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금융 그 자체로는 생산적일 수 없다. 금융은 자본을 사회적 목적에 따라 배분하는 역할을 맡을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융은 점점 실물경제와 괴리를 보이면서 사행성이 짙어진다. 점차 금융은 복잡한 파생상품 개발로 실물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는 금융공학자들의 과도한 금융신뢰에서 왔다. 하지만 그 타격은 금융이 아닌 실물경제에 왔다. 계속해서 노동자의 가치는 낮아지고 있다.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소비만을 위한 행위로 인식되어 있다. 자신의 직업적 소명이나, 직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자아성취감은 뒷전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이 아닌, 자신이 잠시 참아야 하는 일로만 인식한다. 그럴수록 일에 대한 존엄성은 낮아지고, 자본의 가치는 높아져만 간다.
우선 대안을 제시하기 전에 샌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능력주의 자체를 반대하는 것보다는, 능력주의에 의심을 갖지 않는 사회를 비판하고 성공한 자들의 오만함과 실패한 사람들의 패배감을 경계하자는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런 인식은 능력주의에서 패자라고 인식하는 이들에 대한 배려를 불러올 것이며, 굴욕감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재기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연한 비판으로 대안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들어올 수 있다. 성공한 사람이 오만을 갖지 않고, 패배한 사람이 굴욕감을 가지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회가 평등한 사회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샌델도 그런 사회가 평등한 사회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안이 없다고 해서 샌델이 말하는 사회적 비판이 정당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안 없는 비판은 공허한 논쟁일 수 있음은 분명하다. 샌델은 이 책에서 파격적 제안을 한다(스스로도 인터뷰에서 도발적이라고 했다.). 샌델은 그동안 책에서 자신의 대안을 설명한 적이 없기 때문에 나는 그 자체만으로 충격을 받았다.
샌델은 책에서 하버드 추첨제를 이야기한다. 우선 하버드가 요구하는 수업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선발하고, 그 사람 중에서 추첨을 하자는 것이다. 샌델은 이 방식이 능력주의의 주장과 자신의 주장을 모두 반영할 수 있다고 보았다. 샌델은 하버드의 입학하지 못한 학생들이 하버드에 들어올 능력이 안돼서 못 들어 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줄 세우기에 당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더불어 샌델은 추첨할 공의 개수를 다양성을 위해 조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적 약자층은 공 두 개를 집어넣고 추첨한다는 식이다. 혹자는 그렇게 추점제를 하면 하버드의 가치와 명예가 추락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샌델은 동의한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된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대학 간 명예를 건 인재 재선별은 교육 수준을 개선하지도 않았고, 불평등을 심화했다고 바라본다. 샌델은 명예 추구 관행의 삭제는 추첨제의 결함이 아니라 미덕이라고 주장한다. 나도 샌델의 생각에 동의한다. 우리나라에서 그 대학에 탈락하는 수많은 학생들은 그 대학이 요구하는 실력을 갖추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저 줄 세우기에서 잘렸을 뿐이다. 이는 대학이 인재 선별기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대학의 서열화를 가속화하는 인재 선별기로서의 역할을 차단할 수 있다면, 능력주의는 완화될 것이다. 또한 입학하는 학생들이 자신의 능력이 아닌, 운적 요소가 존재함을 깨닫고 겸손한 태도를 가질 수 있을 것이며, 대학교에서 탈락한 학생 역시 운적 요소가 존재함을 알고 좌절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많은 대안은 존재한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이를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단 하나다. 능력주의에 너무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대안을 묻기 전 그들은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을 먼저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다. 능력주의 자체를 신봉하기 때문에, 능력주의의 대안 또한 능력주의에 맞지 않는다고 쳐낸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능력은 부의 창출 능력 그 이상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 자체의 큰 결함을 보여준다. 능력주의를 비판하며 나오는 수많은 대안들을 능력주의에 맞지 않는다고 쳐낸다면 변화가 없는 사회에 고착화될 것임은 분명하다.
다행인 점은 우리나라는 많은 사람들이 사회 이동 가능성이 낮다고 이미 인식한다. 나쁜 결과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이미 사회 이동이 정체되어 있는데, 사회 이동 가능성이 높다는 헛된 희망을 가지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그런데 위에서도 한번 언급했듯 이런 사회 이동의 불가능에 대한 분노가 기득권층에 대해 방출되는 것이 아니다. 왜곡된 방향의 분노 분출이 나타난다. 자신의 노력이 이 사회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를 사회적 약자와 외국인에게서 찾는다. 바람직한 사회 변화의 신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일 년 전 인천국제공항 청소부 및 경비원 대규모 정규직 전환 사태 때 대학교 커뮤니티들 그리고 2030이 주를 이루는 커뮤니티에서 본 글들이다.
"그들(청소부 및 경비원)은 노력을 안 했으니까 정규직을 받을 자격이 없다."
"내가 더 능력 있는 사람이니까 내가 정규직이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가 공산주의냐?"
사실 요즘 터져 나오는 여러 비슷한 사건들에 대한 반응도 저 주장과 비슷하다. 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를 간과한다. 첫 번째는 '자신이 한 공부만 정말 노력인 것인가?'이다. 과연 그들은 노력하지 않아서 저부가가치를 생산하는 경제활동을 하는 것일까? 수많은 대학생이 오해하는 점은 공부만이 노력이라는 점이다. 치열한 입시와 학력주의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가정 형편이 어려워 매일 16시간씩 일하며 틈틈이 공부를 해서 학점은행제로 학위를 땄다면 그 사람을 노력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 이야기를 들으면 모두가 그 사람도 노력을 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단편적으로 그들이 '노력을 안 해서' 저임금 노동을 하고 있다고만 생각한다. 능력주의에, 그것도 학력에 의한 능력주의에 매몰된 결과다. 위에서 인 서울 대학교의 학생들이 좌절감에 빠져있다는 말을 했다. 그 좌절감에 대한 분노는 사회가 아닌 자신보다 더 저학력 또는 더 낮은 서열의 대학교를 다니고 있는 사람들에게 분출된다. 두 번째는 자본주의는 단 한 번도 능력에 따른 분배를 진행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위에서도 말했듯 신자유주의의 거장인 하이에크는 절대 자본주의가 능력에 따른 분배를 진행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받은 수많은 혜택이 운에 의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은 능력이 있고, 다른 사람들은 능력이 없기에 자신이 정규직을 차지하고, 저 사람들은 비정규직이어야 맞다.'라는 주장을 펼친다. 슬픈 것은 능력주의 사회가 바라보는 시선에서 봤을 때 패배한 사람 역시 이러한 승자독식 논리에 동의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저 분노는 이해가 가지 않는 면이 많다. 청소부와 경비원을 하고 싶은 사람은 정규직 전환이 되었으니 더욱 안정적 환경의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고, 사무직을 하고 싶은 사람은 기존에 있던 시험을 꾸준히 준비하면 된다. 하지만 대부분 분노하는 포인트가 자신은 시험을 준비하는데, 저 사람들은 무임승차했다는 것이다. 그 글을 쓴 사람 중에서 청소부나 경비직이 되고 싶어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사무직을 원할 뿐이었다. 정규직이 벼슬이 된 우리 사회를 비판해 보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이렇게 정규직 흡수는 비난하면서 대학교 커뮤니티들과 2030으로 대표되는 커뮤니티에서는 얼마 전 벌어진 광주 건물 붕괴 역시 비난한다. 광주 건물 붕괴는 아웃소싱(하청)의 아웃소싱의 연속으로 마지막 기업이 받는 임금은 쥐꼬리만하다는 글이 많이 올라왔으며, 아웃소싱을 줄여야 한다는 글이 2030의 지지를 받았다. 아이러니하다. 하청을 줄이고 싶어 하면서, 하청을 줄이기 위한 인력 흡수는 반대한다.
무엇이 우리 사회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능력주의에 의한 과도한 승자의 논리와 약육강식의 논리는 개개인을 피로하게 만들었고, 서로에 대한 배려와 사랑보단 혐오와 승부욕만 불렀다. 더 강력한 능력주의의 탄생이 정치권을 휩쓸은 지금, 우리나라는 능력주의 사회에 대해 고민해 보고 건전한 논의를 지속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가구 중위소득과 기준 중위 소득이다. 이 금액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지는 보는 사람의 경제적 수준에 따라 다를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너무 낮음에 놀랐다. 나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현실을 잘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부모님께서는 우리가 잘 사는 것은 아니고 못 살지 않는 정도라는 말을 꾸준히 하셨다. 내 주변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주변에 물어보니 자신은 중산층이라고 한다. 그리고 강남에 집 5개 있는 친구도 자기가 세금 내고 나면 서민이라는 망언도 한다. 하지만 그 친구들은 이 중위 소득 값을 보면 놀란다. 자신의 위치가 한참 위쪽이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중산층만 있는 분배가 잘 이루어진 나라인 것인가? 어쨌거나 개개인의 판단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조금은 통계적 시선에서 보았을 때 자신의 객관적인 위치를 파악하고, 잘 사는 축이라면 노력에 의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 운에 의한 것임을, 자신이 못 사는 축이라면 자신의 노력 결여가 아닌, 불운에 의한 일임을 인지하셨으면 한다.
내가 좋아하는 말이 있다. "평균 이하가 있어야 평균 이상이 있다."라는 말이다. 우리나라는 지긋지긋한 1인분 문화가 있다. "1인분은 해야지"라는 생각은 어딜 가서든 따라다닌다. 아무도 우리나라 1인당 중위소득인 180만 원을 보고 "너는 우리나라 중간만큼 버는구나."라고 하지 않는다. 못 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어딘가 잔인한 면을 내포하고 있다. 180만 원을 못 버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한국인들은 어딜 가서든 평균 이상을 하려고 한다. 반 평균을 물어보고, 전교 등수를 물어본다. 자신의 등수가 가운데 이상임을 확인 받고 싶어한다. 그리고는 국민 평균 5등급(국평오)을 외친다. 국민 평균 5등급도 진짜 사실이 국민의 평균이 5등급이라는 사실인데, 대다수는 비난의 의미로 사용한다.
1인분을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가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 사회는 평균 이하를 포용하고, 평균 이상인 사람들은 겸손함을 갖추어야 한다. 자본주의에 따른 욕망 그리고 능력주의에 따른 혐오에 얼룩진 우리 사회가 이런 논의로 조금 더 나아졌으면 한다.
내 주장을 듣고 이 책을 소개해 준 내 친구에게 감사하다.
만화 하나를 소개하겠다. 정말 유명하고 내 글을 잘 표현하는 것 같아 첨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