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간 함께 여행한 친구와 시안역에서 새벽같이 작별을 했다. 그 친구는 남서쪽으로, 나는 북서쪽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작별의 시간은 짧았지만 진심으로 서로의 건투를 빌었다. 꼭 살아서 한국에서 만나자는 농담스러운 작별 인사가 꼭 농담처럼만 들리지는 않은 까닭은, 서로의 여정이 그리 녹록지 많은 않을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물론 결과적으로 우리는 아무 탈 없이 한국에서 재회했지만, 그날의 그 비장한 작별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 한 장면으로 남아있다.
황하의 이름 모를 지류
황토고원
내가 탄 란저우(蘭州)행 열차는 2시간이나 늦게 시안역에 도착했다. 시안에서 란저우까지는 8시간 반. 누가 타고 내렸는지 침대칸 내 자리에는 모래가 한가득이고, 마침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도 황량한 황토 산과 누런 황톳빛 강, 드디어 황토고원(黃土高原)의 영역에 들어선 것이다.
황토고원은 황하 상류에 걸쳐 넓게 펼쳐진 황토 지대를 말한다. 고비 사막에서 날라 온 모래가 수 십만 년 동안 쌓여 만들어진 황토고원. 칭하이성(靑海省)에서 발원한 황하(黃河)는 이곳 황토고원지대를 지나면서 누런빛 황톳물로 변한다. 여기서 실어 날린 황토가 황하 중류에서 범람해 중원의 토지를 비옥하게 만들고 찬란한 황하문명을 태동케 했으니, 이곳 황토고원을 '중화문명(中華文明)의 요람(搖籃)'이라고 부르는 것도 과한 표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란저우 역
느릿느릿 황토고원지대를 달려온 기차는 오후 5시가 넘어서야 란저우역에 도착했다. 내릴 때쯤엔 멀미가 났다. 하긴, 따져보니 역에서 3시간을 넘게 기다렸고, 기차는 8시간 반을 타고 왔다. 3일 내내 밤바다 독한 술을 마셔댔고, 모기 때문에 전날 잠도 설친 상태에서 총 12시간이 넘는 이동을 했으니 멀미가 날 수밖에. 역 근처 호스텔에 짐을 풀고 오늘은 그냥 쉴까도 생각했으나, 그래도 그나마 시안보다는 시원한 란저우의 날씨와, 왔으면 황하는 봐야 한다는 내 의지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난생처음 마주한 황하는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황하와 중산교
중산교에서 바라본 황하
중산교
이곳 란저우 황하변에 위치한 중산교(中山橋)는 1907년에 지어진 철교(鐵橋)로, 황하에 최초로 지어진 다리라 '황하제일교(黃河第一橋)'라고도 불린다. 지금은 더 이상 철교로 쓰이지는 않고 보행자 다리로 바꾸어놓았다. 강에서 불어오는 꽤나 세찬 바람이 긴 노정(路程)으로 지친 몸을 상쾌하게 해 주었다.
란산에서 내려다본 란저우의 모습
란산에서 내려다본 란저우의 모습
다음날은 란저우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란산(蘭山)에 올랐다. 명성대로 황토고원 안에 자리 잡은 란저우 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건, 산 정상에만 겨우 자리를 잡은 낮은 관목들의 미약한 녹색 빛만 빼면 모두가 짖은 모래 빛인 황토고원뿐. 산 정상 부근에 모여 있는 찻집에서 삼포차를 한 잔 마시고 내려왔다.
란저우 우육면
산을 내려와 늦은 점심으로 그 유명한 란저우 우육면(蘭州牛肉麵)을 먹었다. 정말 맛있었다. 내가 우한에서 자주 먹었던 그 란저우라면 하고는 정말 맛이 달랐다. 일단 고기 베이스의 국물이 아닌 시원한 뭇국에, 고기는 많이 들어가 있지가 않았다. 면발도 엄청 탱탱해서 내가 지금껏 먹어 온 란저우 라면의, 조금은 퍼진 느낌의 식감과는 달랐다.
황하변에 전시된 서유기의 주인공들
황하의 수력을 이용해 물레방아를 돌리는 수차(水車)
예부터 황하의 주요 교통수단으로 이용된 양가죽 뗏목
시내에 있는, 란저우에서 가장 크다는 모스크를 잠시 둘러보고 다시 중산교 근처 황하변으로 향했다. 어제에 이어 다시 보는 중산교의 모습도 멋있었지만, 다음날 다시 황하변을 찾은 이유는 '황하 모친상(黃河母親像)'을 보기 위해서였다. 한족(漢族)들은 황하를 어머니 강이라고 부른다. 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황하문명이 바로 이 황하를 토대로 이룩된 것이니 어머니 강이라는 칭호는 마땅했다. 황하는 비단 한족의 어머니 강에 국한되지 않고, 장족(藏族), 회족(回族), 몽골족(蒙古族) 등 황하변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수많은 민족들의 어머니 강이기도 하다.
동시에 황하는 무서운 존재였다. 수시로 강바닥에 토사가 쌓이며 뻑하면 홍수를 일으켰고, 높은 토사 함량으로 인한 유역의 변동과 유량의 증감이 심해 치수가 매우 힘들었다. 역대로 모든 중국 왕조에서 치수(治水)는 가장 중요한 국가사업이었고, 중국은 아직까지도 황하를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황하 모친상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황하의 험악한 조건이 황하 문명의 탄생을 가능케했다. 황하의 범람은 강 주변의 농토를 비옥하게 만들어주었고, 치수를 위해서는 많은 인원이 필요하므로 자연스럽게 비옥한 토지에 대규모의 사람들이 살고 이를 체계적으로 묶을 정치제도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또, 홍수가 난 후에는 다시 토지 구획을 정리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므로 문서기록과 측량 등 각종 기술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황하에서 태동한 문명은 상대적으로 더 나은 자연환경인 장강(長江)에서 발생한 문명보다 더 빠르게 발전하여 주변을 정복하고, 결국 장강에서 발생한 문명까지 흡수해 중국 문명의 기초가 될 수 있었다. 한자문화권에 속해 있는 우리 한국인도 황하 문명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자애로운 미소로 아이를 바라보는 저 황하 여신의 돌상이 내게도 보다 큰 의미로 다가왔다.
백탑사에서 내려다본 황하와 중산교
마지막으로 백탑사에 올라 황하와 중산교를 내려다보며 일정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이러한 역사의 부침(浮沈)을 아는지 모르는지 황하는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시원한 저녁 강바람이 하루의 더위를 상쾌하게 씻어주었다.
번외). 란저우 미식
란저우 우육면
양자탕(羊杂湯), 양머리 고기와 내장을 넣고 끓인 탕인데, 양평해장국과 맛이 아주 유사하다. 밥이 아닌 빵과 함께 먹는 게 특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