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여정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시안까지 함께하기로 한 친구는 전날 과음한 탓에 예정 출발시간이 다 되어서야 일어났고, 나 역시 함께하는 마지막 밤이 아쉬워 과음한 데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다른 친구를 배웅한 탓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택시를 잡아타고서야 겨우 기차 시간에 맞춰 우한역에 도착했고, 기차역 화장실에서 전날의 흔적을 다 게워내는 것으로 긴 여정의 서막을 올렸다.
기차에서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다섯 시간 만에 도착한 시안. 중국 역사상 한나라, 당나라를 비롯한 수많은 왕조의 도읍이었고, 장안(長安)으로 불리던 당나라 시절에는 인구가 100만에 이르던 국제도시. 고대 실크로드의 시종착지이고, 중국 현대사의 전환점인 '시안사건'의 배경이며, 현재는 내외국인 불문 수많은 여행자를 불러 모으는 도시. 시안에 도착하자마자 우한보다는 쾌적한(?) 날씨와 도시의 깨끗한 외관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시안 성벽의 남문인 영령문(永寧門) 근처 굉장히 허름한 여관에 방을 잡고 본격적으로 시안 탐방을 시작했다.
시안성 해자
시안성 성문
시안 성벽
시안의 랜드마크는 누가 뭐래도 성벽이다. 비록 성벽 자체는 80년대에 복원된 것이지만, 사실 나는 복원 문화재에 대해서는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지만, 성벽의 존재는 분명 시안의 품격을 한 층 높여주고 있었다. 성벽이나 성문 그 자체만으로도 웅장했지만, 성벽 밖으로 깊이 파인 해자와, 성벽을 고려해 낮게 지어진 성벽 안쪽의 건물들이 성벽을 더욱 웅장하게 보이게 했다. 이는 근본 없이 난개발 되어 고층건물들이 고궁과 성문을 가려버린 서울과 비교되는 대목이자, 문화재 복원을 기존의 도시계획과 어떤 식으로 접목시키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 내게 깊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종루 아니면 고루
회족 거리
회족 거리
우리의 발걸음은 옛날 종을 걸어두었던 누각인 종루(鐘樓)와 북을 걸어두었던 누각인 고루(鼓樓)를 지나 회족 거리(回民街)로 이어졌다. 사실 회족 거리는 내가 시안에서 가장 보고 싶은 곳이었다. 한때는 육상 교역의 시종점이자 국제도시로 번영을 구가했지만 지금은 쇠락해버린 도시, 국제도시로서의 옛 영화를 보여주는 증거라곤 박물관의 박제품들과 복원된 유적들밖에 없는 이 도시에서 아직까지 산증인으로서 기능을 하는 곳은 회족 거리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뿐만 아니라 20년 전, 10년 전 선배 배낭족들의 글에서도 값싸고 맛있는 회족 음식으로 푸짐한 끼니를 때울 수 있고, 회족들의 삶의 모습을 보다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이곳을 이야기했다. 결과적으로 그 말은 반만 맞은 게 되었지만.
회족 거리의 음식 1 : 파오모(泡馍)
위 사진의 밀가루 빵을 손으로 작게 뜯어 그 위에 고기 국물을 부어 먹는 음식이다.
회족 거리의 음식 2: 로우지아모(肉夹馍)
밀가루 빵 사이에 고기 다진 걸 넣어 먹는 음식이다.
회족 거리의 음식 3 : 양꼬치와 맥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조합
그곳은 내가 기대했던 회족 거리도, 20년, 10년 전의 회족 거리도 분명 아니었다. 다른 지역 웬만큼 유명한 여느 관광지들과 마찬가지로 정비 사업이라는 미명 아래, 깔끔하게 포장된 대로변에 깔끔하게 단장한 점포들이 늘어서 있었다. 같은 회족들이 아닌 이곳에 놀러 온 한족이나 외국 관광객들을 상대로. 마치 종업원들의 흰 빵모자만 은색 장신구로 바꾸고, 파는 품목만 양꼬치에서 돼지고기 훈제로 바꾸면 여느 묘족 마을 관광지로 바뀔 법한 풍경이었다. 물론 음식값도 결코 싸지 않았고 말이다. 같이 간 친구와 가게의 저 종업원들도 회족 빵모자만 쓴 한족일 거라고 농담 아닌 농담을 주고받으며 10원짜리 양꼬치를 뜯었다(물론 맛은 있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 사원인 시안 대청진사
대청진사 성심루
그곳만 보고 회족 거리 탐방을 끝냈다면 실망 만이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회족 거리에서 가 볼 곳이 한 군데 더 있었다. 바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 사원인 시안 대청진사(大淸眞寺). 중국에서는 이슬람 사원을 '청진사'라고 부르고 이슬람의 할랄(halal) 음식도 '청진'이라고 부르니, '청진(淸眞)'은 이슬람을 대표하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모스크의 모습은 가운데 커다란 돔 건물이 있고, 그 주위를 네 개의 높은기둥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이다. 중국 다른 지역에 있는 모스크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란저우에 있는 모스크
하지만 시안의 대청진사는 기와지붕의 형태가 꽤 인상적이었다. 당나라 때인 8세기에 지어졌다고 하니, 중국에 아직 이슬람식 건축 기법이 전해지기 전에 중국식 건축 기술로 지은 것이었다. 우리가 사원 경내에 들어섰을 때가 마침 예배가 끝나는 시간이었는지 많은 무슬림들이 예배 대전에서 쏟아져 나왔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무슬림들
대청진사 예배대전
잠시 중국 회족(回族)에 대해 설명하자면, 중국 회족은 한족화 된 무슬림과 이슬람을 믿는 한족(漢回)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본디 중국의 민족 개념이라는 것이 혈통적 개념보다는 문화 공동체의 개념이 더 크고, 회족은 이러한 민족 개념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같은 무슬림인 위구르족(維吾爾族)과 다른 민족으로 구분하는 것은, 회족은 이미 한족과 혼혈의 역사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이슬람교를 믿는다는 것 외에는 생김새나 언어(회족들은 이제 고유의 모어(母語)가 없이 중국어를 모어로 쓴다) 상 한족과 거의 차이가 없는 반면, 위구르족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바깥쪽의 큰길은 관광객들에게 그 자리를 내주었지만, 그들의 삶은 대로 뒤 작은 골목들과 청진사에 아직 남아있었다. 많은 부분 이미 한족에 동화(同化) 되었지만, 그들은 흰색 빵모자를 쓰고 함께 청진사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서역(西域)의 초입에서 그들과 조우하며 내가 비로소 서역행정(西域行程)의 출발점에 섰음을 실감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함께 간 친구와 그들의 빵모자를 기념으로 하나씩 사 쓰고 청진사를 나왔다. 우리가 그날 일정의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성벽이었다.
시안 성벽. 입장료를 내고 올라가면 성벽을 따라 산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탈 수 있다.
시안 성벽의 일몰
시안 성벽은 성벽 위에 올라가서 보니 그 규모가 훨씬 더 웅장했다. 중국의 성(城)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성은 성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산채(山寨)라고 부르는 게 더 옳은 표현일 거 같다고 친구는 얘기했다. 우리가 성벽에 오를 무렵 마침 서쪽으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실크로드 개척 이래 수많은 상인들과 구도자들이 각자의 목적을 갖고 해가 지는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나는 무엇을 좇아 서쪽으로 나아가는 것일까.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나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고, 또 어떤 이야기들을 만들어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