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를 마치며

저자의 변(辯): 1부에 숨겨둔 2부의 지도

by 피디아

독자 여러분,


1부의 여정은 어떠셨습니까? 식당의 진상 이야기, 게으름에 대한 저의 구질구질한 변명, 야구장에서 외쳤던 응원가까지. 어쩌면 그저 살아가는 이야기처럼 느껴지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제, 제가 1부의 모든 글 아래에 숨겨두었던 주춧돌과 개념들을 공개하려 합니다. 1부의 모든 이야기는 사실, 2부의 세계를 쌓기 위해 제가 독자 여러분의 무의식 속에 깔아둔 철학의 영토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미 철학자들의 치열한 전쟁터를 가로질러 오셨습니다.


자, 이제 여러분들이 지나오며 정복한 터를 되돌아볼 시간입니다.



제1장: 인간, 너무나도 인간적인


「T는 기계적이라고...」: 제 MBTI 푸념에 공감하셨나요? 여러분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데카르트의 영혼과 마주하셨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성적 동물' 개념과 데카르트의 합리주의가 지배했던 시대의 인간관이, 현대에 이르러 어떻게 감정과 실존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는지, '인간다움'의 기준이 '이성'에서 '감정'으로 옮겨온 2,500년의 서양 철학사처럼, 여러분은 지금도 MBTI라는 가장 일상적인 틀을 통해 21세기의 인간성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착한 사람에게 가혹한 사회」: 식당에서 받은 스트레스의 경험을 통해, 여러분은 권력의 작동 방식에 분노하셨습니다. 미셸 푸코 역시 권력의 작동방식에 분노하고 선악을 따지지 않고, 시스템의 안정을 위해 가장 관리하기 편한 대상(착한 사람, 혹은 약자)을 희생시키는 권력의 속성을 낱낱히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라인홀드 니부어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개인(관리자, 교사)의 도덕이 집단(직장, 교실)의 논리 앞에 어떻게 무너지는지에 대해 여러분과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연구하였습니다.


「같은 경험, 다른 사람」: 여러분들은 이상한 사람들을 보고, '쟤는 도대체 왜 저럴까?'하고 의아해하면서, 태어나면서 이상한건지, 아니면 성장환경 때문에 이상한건지 나름의 추리를 하실겁니다. 철학은 이를 좀 더 있어보는 표현으로 '인간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본성인가? 양육인가?(Nature versus Nurture)' 라고 표현합니다. 사실 이에 대한 완벽한 대답은 없지만, 저는 여기서 '기질'이라는 본성이 경험이라는 양육을 해석하는 '필터'라고 표현함으로써, 본성이나 양육보다는 그 드러나는 과정을 중시하는 현상학(Phenomenology)의 관점에서 접근을 해보았습니다.


「빡친 사람들이 세상을 움직였다」: 제가 화가 많다고 생각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 '빡침'은 니체의 '힘에의 의지(Will to Power)'를 가장 날것으로 표현한 단어였습니다. 여러분은 회사에서 열받게하는 상사에게 복종하거나 질투심에 욕하는 대신, 보고서를 통해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스스로의 가치를 창조함으로써, 니체의 철학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사람을 무엇으로 평가하는가」: 나름 냉소적이고 합리적이고 자부하는 저에게도, 무의식적인 사회적 규범의 내면화는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규범에 길들여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미셸 푸코가 말한 '정상화(Normalization: 행동이나 규범이 정상이 되는 과정)'라는 개념과 함께, 구조주의가 어떻게 개인의 판단을 형성하는지의 무서움을 체감하셨을 겁니다.


「똑똑하고 게으른 사람?」: 돈까스 먹고싶다는 저의 자기 고백을 읽으며, 웃으신 분도 공감하신 분도 있었을겁니다. 사실 그 글은 장 폴 사르트르의 '자기기만(Bad Faith)'을 녹여낸 고백이었습니다. 자기 기만은 우리를 현기증과 구토, 감당하기 어려운 책임감으로부터 지켜주는 고마운 방패이지만, 그 방패가 주는 안전함에 중독되지 않고 극복하고자 노력해야하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실패의 불안 앞에서 '게으름'이라는 핑계 뒤로 숨어버리는 것, 책임 앞에서 비겁한 자유인이라는 실존주의 철학의 가장 깊은 고뇌는 바로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제2장: 사회라는 거대한 집


「구조주의가 지우는 것들」: 이 글은 20세기 대륙철학의 가장 큰 전쟁터로 여러분을 초대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거대한 구조로 설명하려는 구조주의와, 그에 맞서서 고뇌하는 한 사람의 개인을 옹호했던 실존주의자들의 투쟁이 이 글의 진짜 목소리였습니다.


「악은 무지로부터...」: 여기서는 명료하게 제시되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파헤치는 것과 함께, 저의 생각을 풀어놓은 것입니다. 거대한 악은 괴물이 아니라, 시스템 속에서 생각하기를 멈춘 평범한 사람에게서 태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진실을 여러분은 마주했습니다.


「정체성 정치의 의의와 모순」,「무적 LG, 그리고 주적 미라클 두산」: 야구장의 뜨거운 열기와 정체성 정치의 경계짓기는 사실,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대답입니다. 정치철학자 칼 슈미트는 정치의 본질을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행위, 즉 '친구'와 '적'을 설정하는 행위로 규정했습니다. 정치주체가 스스로의 목적을 위해 반대 항을 설정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합과 모순을 낳는 현상은 헤겔의 변증법의 구조를 담고 있습니다. 정치란 그라운드에서도, 현실 정치에서도, 어쩌면 인간이 셋 이상 모이는 순간 시작되는 역학 그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기득권 포기의 불가능성」: '지배계급이 법과 제도를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유지한다' 사실 진부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는 익숙한 이 이야기는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마르크스 주의(Marxism)의 계급 분석에 기반한 이야기였습니다. 다시 보니, 제목부터 뭔가 마르크스 주의의 색체가 짙게 느껴지지 않나요? 당신의 정치성향을 떠나서, 이 이야기에 공감하거나 분노하셨다면, 어쩌면 당신은 마르크스 주의자와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신 걸지도 모릅니다.


「덧씌운 권력, 사라지지 않는 권위」: 다른 국가들보다 유독 상징적 권위와 실질적 권력의 분리가 강하게 드러나는 일본의 역사와 현대 정치 구조를 통해, 상징과 실질이 정치에서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관찰해 보았습니다. 이는 상징이나 기호의 의미를 연구하는 학문인 '기호학'의 관점에 푸코의 권력이론을 결합하여 시도해본 역사 분석입니다.



제3장: 앎과 믿음의 경계에서


「철학과 과학...」: 철학과 과학의 관계를 탐구하고 규정하는 것은, 뉴턴과 갈릴레오 이후 과학이 철학의 분과(과학철학)가 아니라 과학으로 분리되면서 끊임없이 이어진 논쟁입니다. 칼 포퍼, 토머스 쿤 등, 현대 과학철학자들의 이야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정도로 단순화되었지만, 나름 제가 생각한 철학과 과학의 관계를 스타크래프트로 풀어보았습니다.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이 글에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철학적 개념이 숨어있습니다. 과학적 '사실(is)'이 윤리적 '당위(ought)'를 정당화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은, 근대 윤리학을 모두 뿌리부터 재검토하게 만든, 경험주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이 말한 '흄의 단두대'입니다.


「나는 증거 없이...」: 악의 문제 앞에서 이성적 증명을 포기하고 믿음을 선택한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는, 쇠렌 키르케고르가 신을 향해 던졌던 '믿음의 도약'을 재현한 것입니다. 어떤 게임에서는 이를 '신뢰의 도약'이라고 번역했는데, '높은 곳에서 안전하리라는 믿음을 갖고 뛰어내리는 기술'로 등장합니다. 여러분은 앎의 불완전함에 떠밀려 불가지의 벼랑 끝에 마주선 인간이, 어떻게 절대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갖고 뛰어내릴 수 있는지를 함께 관찰하셨습니다.


「열매 없는 나무와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변명」: 예수님이 무화과나무에 화를 내신, 이상하게만 보이는 이 이야기는 사실 제가 해석의 제 1원칙으로 여기는 '철저히 저자나 화자를 믿어보는 해석(Principle of charity)'의 결과물입니다. 저는 마가복음을 쓴 마르코가 '굳이 그렇게 쓴 것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라는 믿음을 통해, '때가 아님이라'는 모순에 숨겨진 '체제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신비'와 '사실'의 반전」: 성경과 헤로도토스의 이름표를 뒤집어 본 것은, 우리가 얼마나 이름의 권위에 의존해서 텍스트를, 정확히는 두 텍스트의 이미지를 인식하는지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이는 모든 경계를 의심하고, 해체하고, 진정으로 담고있는 의미에 집중하고자 했던 탈구조주의 철학의 정신입니다.


「유일신의 그림자」: 저도 미처 몰랐습니다만, 유일신 종교가 가진 배타적인 구조를 분석하는 것이 현대 종교철학의 주요 논의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우리 신은 진짜고, 너희 신은 가짜"라는 타자 부정의 구조가 내포되어 있다는 분석은, 유일신교가 '참/거짓'이라는 새로운 구별을 도입하면서 종교적 폭력의 가능성을 낳았다고 주장한 이집트학자(주의: 독일인입니다) 얀 아스만(Jan Assmann)의 '모세 구별' 이론과 깊은 연관을 가진다고 합니다.


「언어 회의주의」: '음란'과 '음탕'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으셨나요? 아니면 혹시 진짜인지 확인해보려고 검색해보셨나요? 여러분은 그 안에서 '완벽한 소통이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던 콰인과, 그럼에도 언어는 '사용'을 통해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던 후기 비트겐슈타인 사이에서 벌어진 20세기 언어철학의 가장 중요한 논쟁에 참여하셨습니다. 21세기 답게 초록창에 검색해보는 방법으로요.



제4장: 아주 가벼운 철학 산책


갑자기 글의 톤이 달라져서 당황스러우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비밀이 아닙니다. 저는 본격적으로 철학에 대해 이야기하며, 철학사의 거인들(데카르트, 칸트, 흄, 헤겔, 니체, 하이데거)이 세상과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규정하였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존재론이란 무엇인가」: 철학의 가장 난해한 영역을 소개하는 이 글의 진짜 목적은, 고대 그리스-데카르트-칸트-하이데거로 이어지는 논쟁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 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인 "존재"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이 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하신 순간부터, 하이데거 이전의 철학자들보다 한 단계 더 나간 사유를 하실 수 있습니다. 아, 물론 하이데거의 어깨 위에서요.


「윤리를 어디에 세울 것인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는 철학의 가장 중요한 질문이고, 가장 중요한 분과 가운데 하나(윤리학) 입니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내놓기 위해 흄(감정)과 칸트(이성)가 얼마나 치열하게 대결하고 사유하였는지를 보시면서, 여러분들은 "윤리"라는 단어가 가진 무게를 실감하셨을 겁니다.


「헤겔과 니체, 너무나도 인간적인」: 사실, 철학자들의 사상을 철학자라는 인간을 통해 분석하는 것은, 금기...까지는 아니지만 사실 그다지 권장되는 방법은 아닙니다. 위대한 '철학'이나 '사상'은 인물이 아닌 '철학' 그 자체로 평가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는 모든 철학은 '인간'이라는 재료를 '고뇌'라는 불꽃으로 연소시켜서 불타오른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불의 원천인 철학자들을 잠시 바라보았습니다. 가장 추상적인 사유, 모순되어보이는 설명도 어쩌면, 결국 한 인간의 삶과 시대, 생각과 맥락이라는 현실로부터 피어난 결과물은 아닐까요?


「지금, 여기, 영원을 긍정하라」: 니체라는 철학자는 모순과 파열의 상징입니다. 그렇다보니 수많은 후대의 해석과 위대한 창조를 낳았습니다. 현대 철학계에서도 니체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3분의 1은 될 겁니다. 절대적 진리는 없다는 포스트모더니즘, 인간의 실존적 결단을 중시하는 실존주의, 그 실존적 개인을 억압하는 구조를 연구하는 구조주의 등, 사실상 21세기 철학의 절반인 대륙철학은 니체의 철학 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나머지 절반은 러셀과 비트겐슈타인, 조금 더 올라가면 칸트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저의 해석은, 니체에 대한 전통적 해석이라기보다는, 저 스스로 발굴해본 니체가 전달하고자 하는 진짜 메세지의 복원 시도였습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그러나 그 자유는 형벌이다」: 실존주의는 낭만적인 철학으로 많이 오해받습니다. 인터넷에 검색해서 실존주의에 대해 이해하려고 해도, 콜라병이 어쩌고, 병의 용도가 어쩌고, 본질이니, 관계니, 하는 설명이 많이 나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그런 비유가 오히려 이해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실존주의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본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르트르가 여러분께 말하고 싶었던건, 콜라병의 제조 공정이 아니라, 답이 보이지 않는 시험지라는 인생에서 설령 연필을 굴린 결과더라도 그 결과를 긍정하고 책임질 수 있는 자세였습니다.


「존재는 사실이지만, 그게 곧 중요한 건 아니다」: 저는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있지, 형이상학적인 이상세계에는 그다지 관심이 별로 없는 편입니다. 존재론을 싫어한다는 저의 투정은, 부끄럽게도 진심이면서, 동시에 자기방어적인 비명입니다. 그러나, 결국 현실 세계의 이야기를 다루고 그 근원을 찾아가다보면, 마지막에 닿게 되는 것은 돌고 돌아 존재론이었습니다.



1부의 모든 여정은 바로 이 지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1부에서 '나'라는 개인의 성격과 감정, 판단하는 방식을 들여다보고, 사회라는 구조의 모순을 포착하고, 우리가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인식했는지 고찰한 뒤, 이 모든 것을 설명하기 위한 철학자들의 논리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르트르같이, 니체같이, 데카르트같이, 토머스 쿤 같이 생각하고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하셨을 것입니다.


철학에 관한 글을 읽은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하는 생각들, 당신이 살아가는 삶 자체가 철학적인 것이고, 철학자들이 다루고자 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더이상 독자가 아닙니다. 2부에서 저와 함께 당신의 새로운 철학적 세계관을 창조할 준비가 된, 철학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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