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책임을 묻기 전에
"그 아이도 뭔가 문제가 있었던 거 아냐?"
왕따를 목격했을 때 자주 나오는 말이다.
그리고, 실무적으로도 이런 접근과 분석이 먼저 이뤄진다. 당장 나도 그렇다.
이 말은 무언가 객관적인 분석처럼 들리지만, 동시에 따돌림이라는 현상의 책임을 개인에게 묻는 말이다.
'피해자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말은 얼핏보면 사실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한 사실의 진술이 아니다. 현실을 직시하는 듯 하고, 중립적인 분석인 듯 하지만, 실상은 폭력을 정당화하는 말이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현실이 단지 폭력의 정당화를 위한 사실의 왜곡만은 아니다.
한번 그들처럼 솔직해져 보자.
왕따를 당하는 사람은 어떤 특징을 가진 경우가 많다. 지나치게 조용하거나, 눈치를 잘 못 보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잘해서 시샘을 받거나, 혹은 개별 사안에 따라서 때로는 실제로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도 있다. 자칭 현실적인 이들이 보기에는, '왕따 피해자에게 잘못은 없다'라는 말은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인 말로 들릴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결론짓는다.
"두드러지면 배척당한다. 그러니 덜 튀어야 한다."
이 말이 도덕적으로 옳은지는 차치하더라도, 현실적으로는 일리 있다. 실제로 피해자가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를 배제하더라도, 따돌림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무언가 '눈에 띄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개인의 단위에서는 생존을 위해 자신을 조율하고 통제해야 할 때가 있다
그렇게, 두드러지는 성향을 조율하면 개인은 왕따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그렇게 한다. 튀지 않기, 침묵하기, 눈치 보기.
그래서 미시적으로는 현실주의자의 말들이 옳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들의 통찰에 박수를 쳐줄까 잠시 고민을 하게 된다.
하지만 박수를 치기 전에, 되물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따돌림이라는 현상이 사라지는가?"
개인적인 조율은 탈출의 해결책은 될 수 있다. 그러나 따돌림의 해결책은 될 수 없다.
개인은 괴로움에서 벗어날수 있지만 집단의 폭력은 정당화되고, 지속되게 만든다.
집단은 항상 희생양을 만든다
중요한 건 이것이다.
왕따는 특정 개인의 '절대적 이상함'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항상, 상대적으로 가장 두드러지는 사람이 타겟이 된다. 즉, 어떤 개인이 이상해서 생기는 게 아니라, 집단이 누군가를 이상하게 간주하려고 하는 속성에서 생긴다.
가장 조용한 사람이 조롱당하고,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이 따돌림당하며, 가장 눈치 없는 사람이 공격받는다.
그런데 그 '가장'은 언제나 '상대적'이다. 따라서 어떤 집단 내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사람은 '절대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이 말은 무서운 사실을 드러낸다.
왕따는 어떤 특정 인물이 사라졌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집단은 다음 타겟을 찾아낸다. 아니, 드러난다. 항상. 예외 없이.
피해자의 대체 가능성, 구조의 악순환
그들이 놓치고 있는 건 이것이다.
왕따를 당하는 사람은 대체 불가능한 '인물'이 아니라, 대체 가능한 '역할'이라는 점이다.
이 잔혹한 구조는 다음과 같은 악순환을 만든다:
1. 두드러지는 사람을 타겟으로 삼는다
2. 타겟이 사라지거나, 조율되거나, 도태된다
3. 그 자리를 대체할 다른 사람이 자동으로 부각된다
4. 왕따는 유지된다
즉, 희생양이 바뀔 뿐 양상은 그대로다.
그러니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틀렸다:
"그 아이는 좀 이상했잖아. 그래도 괜히 그런 건 아니겠지."
아니다. 괜히 그런 거다. 그리고, 괜히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가장 이상한 사람이 사라지면, 그 다음으로 이상한 사람이 타겟이자 역할이 된다. 진정한 스코틀랜드인은 존재하지 않듯이, 진정으로 평범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모든 집단에서 모든 구성원은 잠재적으로 따돌림의 타겟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동조자나 방관자들 역시, 다음 타겟이 본인이 되는것을 피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따돌림에 동참하거나, 그 현상을 보고도 보지 못한 척 한다. 왜냐하면 그들 스스로도 알거나 막연히라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저 자리는 대체 가능한 자리이다.'
'저 사람이 아니면 다음 타겟은 내가 될지도 모른다.'
이것이 따돌림을 정당화하는 메커니즘의 완성이다.
"문제가 있다"는 말, 그러나 본질이 될 수 없는 이유
"왕따 당하는 사람도 문제가 있다."
이 말은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말은 실제로는 폭력을 설명하는 척하며 정당화한다.
'문제'를 언급하는 순간, 사람들은 책임의 무게를 피해자가 감당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더 나쁘게는, 이 말이 가해자와 방관자의 죄책감을 씻어주는 효과까지 가져온다.
"우린 그냥 반응했을 뿐이야. 쟤가 좀 이상하긴 했지."
이 말 속엔 단 한 줌의 반성도 통찰도 없다.
물론 현실의 모든 따돌림이 이렇게 단순한 구조만으로 설명되진 않는다.
때로는 한 개인의 악의가, 혹은 도저히 옹호할 수 없는 잘못이 갈등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내가 분석한 구조는, 그런 개별성과 '인간'을 모두 포괄하여 설명할 수는 없다. 그것은 현실의 사례이니까.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러한 개인적 요소와 전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도,
'희생양을 통해 안정을 찾으려는' 집단의 역학을 통해 어떻게든 따돌림의 대상은 선출되고 있다는 사실이며
선출의 과정에서 개인적 요소(개인의 악의, 도덕적 잘못, 성품의 문제 등)와 결합하여
다소 '모나보이는' 사람이 지정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 번제물은 단지 '남들보다 모났다'는 이유로 지목되어 '스스로 책임져야할 모난 정도' 이상의 굴레를 짊어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바꿔야 할 건 사람의 개성이 아니라, 집단의 태도
왕따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개인의 문제는 개인의 속죄 혹은 책임으로써 해결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따돌림'이라는 처분은 개인이 해결해야할 문제에 대한 '속죄' 혹은 '책임'의 범주를 넘어서는 굴레로 작동한다. 개인의 단위에서 힘듦을 벗어나기 위해 부모나 교사가 조언과 걱정을 건네는 것, 스스로가 행동을 조율하는 것은 미시적, 단기적 문제 해결을 위해서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따돌림을 당해도 될 당위나 근본적인 원인으로 귀결시키는 것은 절대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이를 따돌림의 원인으로 보는 것은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근본을 보지 못하는 편협한 시야로 인한 것이다.
왕따라는 현상의 근본적 작동 기제는 개인의 독특함에서 비롯된 현상이라기보다는 집단이 차이를 견디지 않기 위해 만들어내는 일종의 ‘정서적 배설 현상'이다. 누군가를 내치고 나면, 그 내부는 더 단단해진다. 개인에게 이유를 찾아내려는 순간, 그 구조는 정당화된다. 그리고 또 다른 희생양을 만든다. 즉, 따돌림은 구조에 의한 개인의 말살이다.
그러니 진지한 고민이나 걱정, 성찰없이 개인에게 가볍게 함부로 이렇게 말해선 안된다.
"너 이래서 따돌림당하는거야."
대신, 집단에게 말해야 한다.
"왜 너희는 항상 누군가를 내쳐야만 안정되는가?"
만약 당신이 부모라면, 교사라면, 주변인이라면, 당사자라면
따돌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개인적으로 노력하거나 조언하는 것은, 다시 강조하지만 그럴 수 있다.
'개인', '사례', '사건', '인간(설령 그것이 피해자 뿐만 아니라 가해자나 방관자라도)'을 부정하고 오로지 집단과 구조만을 탓하는 것은, 근본에 경도되어 현실적 괴로움을 직시하고 공감하지 않는 무책임이거나, 현실의 복잡성과 인간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포기하고 오로지 구조만을 탓하는, 면책을 위한 도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따돌림이라는 매커니즘의 근본적 원인이 개인과 집단 가운데 어디에 있느냐는, 전혀 다른 층위의 문제이다. '따돌림'이라는 현상 자체는 어떤 개인이 선출되었는지와는 별개로, 개인의 특성과는 무관하게 일어나는 일종의 현상에 가깝다. 지금까지 따돌림의 원인을 개인에게 돌려왔다면, 그리고 정당화해왔다면, 그 생각을 바꾸길 바란다.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나보다 두드러진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순간, 그 빈 자리를 채울 사람이 당신이 될 수도 있다.
개인의 '두드러짐'이 아니라, 집단의 '기제'가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