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우리는 눈 대신 손가락으로 읽었을까

스크롤의 미로에서 길을 잃은 시선

by 피디아

어릴적, 나는 책벌레였다


비록 소설은 많이 보지 않았지만, 항상 무언가 책을 읽고 있었고, 심지어 밥상머리에서도 책을 본다고 등짝을 맞기 일쑤였다. 별로 좋은 습관은 아니었고, 일종의 활자중독에 가까운 모습이었지만, 어쨌든 나는 책벌레였다.


그런데 그 벌레가 결국엔 나방이 된 것일까? 요즘 나는 종이책을 거의 읽지 않는다. 조금만 문장이 길어져도 눈에 들어오는 것 같지 않고,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 다시 올려읽고, 글을 읽는 흐름은 흐트러지고, 그러다 결국 몇페이지 넘기다 말고 다시 스마트폰을 들고 있다.

어린 시절의 책벌레는 어째서 나비가 되지 못하고 나방이 되어버린 것일까.


얼마 전, 정말 오랜만에 배경지식을 위해서 종이책을 펼쳤다.

한동안 인터넷과 스마트폰 기사만 보던 내게는 오랜만의 감각이었다.

책장을 넘기며 읽던 중,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방금까지 다른 얘기였는데, 갑자기 왜 이 방향으로 흘러가지?'


주제가 툭 튀는 느낌. 맥락이 뚝 끊긴 것 같았다.

다시 앞으로 되돌아가 몇 줄을 읽어보니,

당황스럽게도 중간에 한 문단 전체를 건너뛴 채 읽고 있었던 거였다.


그건 집중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책을 읽으며 단어와 문장, 의미를 짚어내려간 것이 아니라,

그냥 눈으로 줄과 줄 사이를 뛰어넘다가 미끄러진 것이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읽고 있었던 게 아니라, 그냥 내려가고 있었구나.'




시선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읽는 글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에서의 독서는 '스크롤 기반'이다.

우리는 책장을 넘기지 않고, 화면을 밀어내며 글을 본다.

그리고 그 속도와 간격은 시선이 아니라 손가락이 정한다.

결국 우리는 문장의 흐름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움직이는 글을 따라잡고 있는 셈이다.


스크롤 방식은 본질적으로 페이지 구분이 없다. 줄과 단락은 '계속 아래로' 이어진다.

손가락은 계속해서 글을 밀어낸다. 그러면 문장은 계속해서 윗쪽 방향으로 흐르고, 눈은 그 흐름을 따라가기에 급급하다. 결국 흘러간 문장은 의미와 맥락에서 사라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기' 자체는 계속된다.

이게 반복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중심 내용이 삭제된 채로 글을 이해하려 들고,

결국 전체 구조를 오독하거나, 이상하게 흐름이 어색하다고 느끼게 된다.

특히 주제 전환이 글 중간에 들어가는 다층적인 의미를 가진 글일수록, 핵심을 날려버리는 독서가 된다.




갈 곳을 잃은 나의 시선, 안구운동의 경직


그리고 종이책은 눈이 윗줄 끝에서 아랫줄 첫 단어로 자연스럽게 이동한다. 독서교육 분야에서는 이를 '안구운동'이라고 한다. 실제로 독해력에 있어서 윗 줄의 마지막 단어에서 아랫 줄의 첫 단어를 단번에 찾아내는 능력을 함양하는 것독서능력발달의 중요한 단계로 여겨진다.


그런데 스마트폰에선 시선보다 손이 먼저 움직이고, 글은 따라온다.

이 구조 속에선 눈이 다음 줄을 '찾는 능력'이 무뎌지기 시작한다


실제로 몇 줄을 건너뛰는 '읽기 실수'가 자주 발생하고,

→ 그 실수는 다시 뒤로 돌아가 읽게 만들며, 독서의 흐름을 분절시킨다.


이 흐름은 다시 종이책을 읽는 순간 더 명확히 드러난다.

글의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고 난잡하게 둘러싸인듯 느껴지는 것.

결국 '읽는 행위' 자체가 점점 피로해진다.

눈이 '글의 위치를 기억하지 못하고 헤매는' 느낌이 든다면,

그건 단지 집중력의 문제가 아니라, '계속 내려가는 글'에 시선이 글을 놓치게 되는

스크롤 기반 독서의 구조 자체에서 비롯된 문제일 수 있다.


게다가 스마트폰의 글을 내려보는 방식 자체가 '정보를 스캐닝'하게 만든다.

독서교육 현장에서는 안구운동이 Z형으로 이루어져야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시선은 F자형으로 움직인다. 상단만 읽고, 하단은 대충 훑는 검색 중심의 시선 구조.

눈은 전체를 읽기보다 필요한 키워드만 찾는 데 익숙해진다. 마치 Ctrl+F로 필요한 키워드만 찾는 식의 독서. 어느정도 문해력이 완성이 된 이후라면 어쩌면 속독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문해력이 미성숙한 상황에서는 속독이 아닌 글의 맥락 삭제로 이어진다.




다시 독자로 돌아가는 과정


이건 스마트폰만의 문제는 아니다.

스크롤 기반의 수많은 텍스트 환경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뉴스, SNS, 웹소설, 기사.

그 안에서 우리는 점점 '시선으로 읽는 법'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조작하는 법'에 익숙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스마트폰으로 글을 읽는다.

검색도 하고 뉴스도 보고, 글도 저장한다.

하지만 가끔은 일부러 책장을 넘긴다.

글을 읽기 위해서라기보다, '읽는 내가 회복되기 위해' 종이책을 읽는다.

손가락이 아닌 눈으로 읽는, 스크롤러가 아닌 독자가 되기 위한 일종의 재활훈련이다.

천천히 읽고, 넘기고, 놓친 줄을 다시 짚는 그 느림의 행위가

내 눈과 마음을 다시 '읽는 존재'로 되돌려놓는다.


손가락은 빠르지만, 맥락은 느리다.

디지털은 편리하지만, 눈은 아직 페이지를 원한다.


한번쯤 되물어봐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책장을 넘긴 그 감각,

당신은 여전히 기억하고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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