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는 낭만적인 데이트는 이렇다.
연인이 하얀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아 있다. 테이블 위에는 촛대가 있고 장미 한 송이가 꽂혀 있으며 맛있는 코스 요리와 붉은색 와인잔이 빛난다. 그들은 음식을 먹다가 눈길을 교환하고 서빙하는 웨이터가 오지 않을 때 가끔 손을 맞잡기도 한다.
여기서 눈길이 중요하다. 그들은 눈을 마주칠 때마다 웃는다. 서로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그들의 대화 소리는 조용하고 감미롭다. 사랑스러운 그녀는 남자의 몇 마디 말에 행복에 겨워 가끔 소리 내어 웃는다. 그 웃음소리는 우아하고 그녀를 웃긴 남자는 그녀의 웃음소리에 전염된 듯 같이 웃는다. 식사를 다 마친 그들은 손을 잡고 식당을 나간다.
이런 낭만적인 데이트를 나도 어젯밤에 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하지만 현실 남녀는 쉽지 않다.
일단 가는 길에 풍경이다. 퇴근하고 호텔 식당으로 가는 길에 저녁노을이 펼쳐졌다. 내가 좋아하는 풍경이다. 우리의 데이트를 축복하는 듯한 아름다운 풍경에 들뜨고 좋았다. 이런 나의 마음을 파악했는지 남편이 음악을 틀어준다고 했다. 여기서부터가 문제다. 그 음악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최근에 알게 된 거라고 하면서 아주 낯선 음악을 틀었다. 어떻게든 남편의 마음을 이해해 보려고 들어보았는데 가사도 음악도 난해했다. 그런 와중에 남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특별한 내용도 아닌데 길게 이어지는 통화. 그렇게 어수선하게 식당에 도착했다.
식당의 분위기는 완벽했다. 내가 꿈꾸던 공간이 거기 있었다. 조용한 음악, 다정해 보이는 연인들, 세련된 태도로 서비스하는 웨이터들. 그래 이제부터는 잘해보자. 마음을 가라앉히고 낭만적인 연인이 되도록 해보자. 이렇게 비싼 곳에 이렇게 멀리까지 왔는데 망칠 수는 없다. 잘해보자. 남편이 아무리 재미없는 얘길 해도 웃으면서 들어주자.
프레이팅도 예쁘고 맛도 좋은 식사가 나오기 시작한다. 남편은 코를 박고 먹는 데에 집중한다. 나를 쳐다보지도 다정하게 속삭이지도 않는다. 참다못하고 난 하나하나 지시를 내리기 시작한다. 음식만 먹지 말고 나를 보며 웃어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자. 등등.
하지만 남편과 나누는 대화는 이어지지 않고 내가 화제를 내놓으면 듣기만 하다가 불쑥 딴 얘기를 한다. 내 말의 의도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대화가 잘 풀리지 않자 입을 다물고 듣기만 하는 남편, 우리는 왜 여기까지 왔는가. 배가 고파서 밥 먹으러 온 건가. 결국 우리는 각자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조용히 식사를 한다.
많은 음식과 함께 화도 가득 채운 나는 돌아오는 길에 분위기를 띄워보고자 이런저런 얘기를 꺼내는 남편에게 듣기 싫다고 조용히 가자고 말한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한다. 듣기 좋은 말은 뭐지? 나에 대한 얘기, 우리의 미래에 대한 얘기, 주말여행에 대한 얘기. 아마 무슨 말을 해도 나는 탐탁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책에서 본 글이 생각난다. 남편을 친절하고 상냥한 옆집 아저씨 정도로 생각하면 싸울 일도 없고 잘 지낼 수 있다고. 맞다. 내가 너무 기대가 많은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을 설정하고 남편이 그 멋진 장면의 배우처럼 하지 않는 것이 화가 나는 것이다. 일단 외모부터 멋진 배우와는 다른 남편이 행동까지도 안되니 마뜩지 않은 것이다. 이쯤 해서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이 나올 수도 있지만 일단 나는 잘나도 못나도 사랑을 받고 사는 비련의 여주인공이니까.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말만 걸면 화를 낼 분위기의 아내가 무서워진 남편은 조용히 씻고 조용히 잠을 자러 방에 들어간다. 와인을 두 잔이나 마시고도 기분이 별로인 나는 거실에서 핸드폰을 들고 이것저것 보면서 쓸데없는 시간을 보내다가 자러 들어간다. 하루 종일 일하고 아내와의 힘든 데이트까지 견딘 남편은 낮게 코를 골며 자고 있다. 이불을 감싸 안고 모로 누워 잠든 남편을 보니 안쓰러운 느낌이 솟아난다.
자고 있는 남편에게 묻는다.
“자기야, 나 사랑해?” “응.”
“얼마큼?”“많이”
“내가 화내면 보기 싫지?”“아니, 예뻐.”
잠결에 분명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남편을 보며 드디어 나는 미소 짓는다.
자면서 하면 말은 진심일 거라 믿으면서.
물론 내일 아침 남편은 자기는 그렇게 말한 적 없다고 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