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모두가 이해되는 걸까?
나는 화를 내 본 적이 없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가족 사이에서도 갈등이 있을 때 언제나 나는 중간에 서서 그들의 마음을 전달하는 메신저였다. 이 사람 말을 들어도, 저 사람 말을 들어도 각자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겠어서 왜 서로를 이토록 이해해 주지 못할까를 고민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바로 나의 문제였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너무나 민감하게 알아챈다는 것.
친구들도 가족들도 나에게 그들의 모든 힘든 일을 솔직하게 다 털어놓았다. 나는 최선을 다해 그들의 힘듦을 들어주었고 진심으로 안아주었다. 점점 그들에게는 내가 소중한 존재가 되어가는 느낌이 들었고, 그 속에서 나는 내 존재의 이유를 찾았었다. 그렇게 해서 내 주위를 둘러싼 관계들이 대부분 내가 챙겨주어야 하고 들어주어야 하는 사람들로 차곡차곡 채워져 나갔다.
아버지는 다재다능한 분이셨고 눈이 반짝이던 분이셨다. 대부분의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셨다 들었지만 딱 한 가지. 돈과 관련해서는 투철한 윤리의식으로 배척하는 삶을 살고자 하셨다.(고등학교 2학년 때 스님이 되고자 뜻을 세우기도 하셨다) 어머니는 공주가 되고 싶은, 말만 시키면 얼굴이 벌게지는 수줍은 아가씨였는데 첫눈에 바둑 하는 7살 많은 아저씨에게 마음을 빼앗겨 평생 이 고생을 시작하셨단다. 결혼해서 3년만 고생하면 될 줄 아셨는데 여태 그 하찮게 생각했던 돈이 발목을 잡을 줄 모르셨다 했다.
23살에 시집온 엄마에게 시누이 6명에 완고한 시아버지에 카리스마 있는 시어머니는 분명히 쉽지 않았으리라. 그래도 참 의젓하고 어른스럽게 그 역할을 수행하던 엄마도 여자문제 빼고 다 일으키던 남편이 얼마나 실망스럽고 원망스러웠을까. 그렇다고 모두의 반대에 우겨서 결혼한 엄마가 친정에 얘기할 수도 없었을 테고.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나는 정말 알아서 완벽하게 잘하는 어린이 었다. 2살 어린 남동생을 엄마처럼 돌보고 내 할 일 야무치게 해내고 4학년 땐 부모님 오시기 전에 밥도 해놓고 이부자리도 깔아 뒀던 기억이 난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나는 그렇게 해야 엄마가 떠나지 않을 거라 본능적으로 느꼈던 거 같다. 나라도 잘해야 엄마가 산다고. 6살 때부터는 애어른처럼 행동했다고 말하시곤 했다. 나는 항상 알아서 잘했고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드리고 슬픔을 들어드렸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부모님 곁을 떠나 대학을 갔을 때도 나는 챙김을 받는 쪽보다는 챙겨주는 사람이었다. 대학원에 가서도 엄마 대신에 동생을 그렇게 챙겼다. 동생은 누구보다 나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 편이었기에 한번 전화를 시작하면 한 시간은 기본이었다. 힘들었지만 그래도 내가 누군가에게 이토록 도움이 된다는 느낌이 좋았다.
사랑하는 남자친구를 만나 결혼을 했고 멀쩡하게 직장을 잘 다니던 그는 돌연히 새로 수능을 보겠다고 하고 수험생 생활을 시작했다. 나의 기나긴 수험생 학부모 역할이 시작되었다. 얼마 되지 않는 내 월급으로 방세와 식비와 남편의 독서실비와 강의비를 충당했다. 그래도 행복한 신혼생활이었다 말하고 싶다.
중간중간 의견이 맞지 않아 싸울 때도 있었지만 항상 잘못을 제공한 건 신랑 쪽이었기에 나는 그때까지도 항상 신랑의 잘못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소중한 새 생명이 찾아왔고 우리는 주말부부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이와 있을 때 간혹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내 마음이 이전과 다르게 잘 컨트롤이 되지 않았다. 왜지? 왜 이렇게 분노가 올라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