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바르셀로나 여행: 지로나 유대 지구

지로나의 골목에서 누리는 밤

by 꿈 공작소

우리 나이에 여행은 일주일 정도가 딱 제격인 것 같다.


아침 댓바람에 여행길에 나서 달리의 고향인 피게레스에서 극장 미술관을 돌아보고, 포르트야트있는 달리 하우스 뮤지엄까지 방문한 후 호텔로 돌아왔더니 거의 파김치 수준이 되어 버렸다. 나이가 먹는 데다 금년에 이사도 하고, 운동을 소홀히 한 결과다.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매일 2만 보 이상의 강행군은 슬슬 몸에 부담을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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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아이랑 깨톡으로 대화한다는 부모들이 있더니 아이 손을 잡을 때도 와이파이가 필요한 시대가 왔을까?


호텔로 들어서며 동네 가게에서 아이스크림까지 하나 사 먹으며 당을 보충했음에도 샤워를 하고 나니 녹초가 되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수가 없다. 게다가 시차 때문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피곤의 누적이 육신과 정신을 내려 누른다. 그렇다고 내가 여기서 자빠지면 짱구언니는 시마이(しまい)를 외치며 빛의 속도로 잠옷으로 갈아입고 하루를 마무리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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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갈 채비를 한 후 다시 밖으로 나섰다. 오늘은 전 세계에서 가장 잘 보존이 되어있는 유대 지구를 돌아보기로 한다. 어둠이 슬슬 내리기 시작할 무렵에 시작된 오늘의 마지막 여행. 유대인들의 거주지 특성상 유대 지구는 복잡한 미로와도 같은 골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름 운치 있는 골목길을 음미하며 걷고 있는데 짱구언니가 길거리 공연을 시작했다.


"오늘 밤은 너무 깜깜해


별도 달도 모두 숨어 버렸어


니가 오는 길목에 나 혼자 서 있네


혼자 있는 이길이 난 정말 싫어


골목길 골목길..."


골목에 관한 낭만이 넘치는 노래도 많을 텐데, 이재민이 부른 조금은 이상한 '골목길'을 연신 부르며 걷는 짱구언니. 예상할 수 없는 양파 같은 매력을 가진 여인이다. 불과 몇 분 전까지는 나가기 싫다며 투정을 부리던 사람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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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십분 후 우리는 예약한 식당에 도착했다. 식당 바로 앞에 광장에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여 그곳에도 잠시 관심이 가기는 했지만 우리에게는 이 식당을 찾은 이유가 있다. 바로 Las gambas a la brasa (새우구이)를 먹기 위해서였다. 지로나에 있는 식당 메뉴를 샅샅이 뒤졌는데 새우구이를 파는 집은 이집 하나였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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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맥주와 짱구언니가 바르셀로나에 와 맛을 알게 된 샹그리아를 시키고 전식을 몇 개 시켰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어딜 가나 영어를 하는 사람이 있어서 의사소통에 큰 지장이 없었는데, 불과 한 시간 조금 넘게 떨어진 지로나는 영어 소통이 안되는 변두리와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 웨이트리스도 영어를 전혀 못하는 사람이라 손짓 발짓을 해서 설명을 하면 스페인어로 대답을 해준다. 다행히 많은 멕형들이랑 살고 있는 엘에이 출신이라 어떻게든 조금씩 알아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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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 식당은 매달 메뉴를 바꾸기 때문에 새우구이를 더 이상 팔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싱싱한 식재료를 손님에게 제공하기 위해서라고 하니 따질 수도 없었다. 또 없는 새우를 구워오라고 주문을 할 수도 없고... 그래서 차선책인 음식들을 시켜서 먹어야만 했다. 구운 연어는 불쑈도 함께 보여주었고 다른 음식의 맛도 수준급이라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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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여 놓았더니 에너지가 넘치는 짱구언니. 골목길에서 포즈를 취해 달라고 했더니 저러고 있다. 끼만으로 모델을 뽑는다면 일류 모델 감인데, 모델은 일단 어느 정도의 기럭지가 받혀줘야 하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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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유태인 역사 박물관은 벌써 문을 닫은 상황. 이제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골목길을 따라 하염없이 걷는 것밖에 없었다.


El Call이라 불리는 유대 지구에 유태인이 정착을 한 것은 9-10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이러니하게 이들은 기독교 박해를 피해 자신들에게 상대적으로 관용을 베푸는 이슬람 통치 하에 있던 이베리아반도에 거주를 한 것이다. 그들은 상업, 의학, 학문, 번역 등에 두각을 나타내며 자리를 잡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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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로나의 유대 지구 근처에는 로마시대 때 지어지고 중세 시대까지 개보수 공사와 증축을 거듭한 성벽이 있다. 성벽을 걷는 것도 지로나 여행 하나의 재미인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짱구씨에게 혹시 성벽을 걸을 의향이 있나 물어봤다. 돌아오는 대답은 '힘 들어서 싫어'였지만, 갑자기 장난기 충만한 표정을 지으며 '나 잡아라 봐라'를 연신 외치며 언덕에 있는 골목길 저 멀리 사라졌다. 된장. 저렇게 뛰어오를 힘이 남아 있다면 성벽을 열 번도 돌고도 힘이 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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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지구 골목 언덕을 오르고 또 올랐다.


유대 지구 역사로 다시 돌아가자면 12-13세기에 이곳은 유태인 학문의 중흥을 이루게 된다. 이 시기 유대 지구는 좁은 골목과 석조 건물이 촘촘히 모여 있는 형태의 전형적인 중세 유대 거주지를 이루었다.


그렇게 아름답게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유태인들이 사라지고 바람이 부는 골목만 남게 된 이유는 역시나 종교와 관련이 있다. 14-15세기에 들어서 스페인은 천주교를 믿는 국가가 되었다. 예수님을 신이라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와 충돌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1391년 아라곤, 카스티야 전역에서 일어난 반유대 폭동으로 지로나에 사는 많은 유태인이 학살을 당하거나 강제로 개종을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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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 대한 박해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1492년 천주교 군주였던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가 알람브라 칙령을 발표하며 유태인들이 스페인을 떠날 것을 명령한다. 그렇게 지로나의 유대 지구 공동체는 소멸되어 갔는데, 20세기 들어서 다시 유대 지구 복원 작업의 바람이 불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렇게 유럽에서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중세 유대인 지구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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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구언니의 성벽 걷기의 거부로 길을 잃은 내 여행. 그냥 그렇게 골목길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을 따라 걷다 보니 지로나에서 가장 유명한 에펠 다리와 맞먹는 건축물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지로나 대성당 (The Cathedral of Saint Mary)이다. 로마 카톨릭 성당으로 300년에 걸쳐 건물이 지어졌기에 구역마다 다른 건축 방식으로 지어진 특별한 건물이다. 날은 밝지만 저녁 9시가 되었기에 내부 입장은 할 수 없었다. 이 성당은 전 세계에서 가장 넓은 22미터에 달하는 신도석을 보유하고 있는 성당으로도 유명하기까지 한데... 나는 그 속살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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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앞으로는 90개의 계단이 있고 광장이 눈에 띈다. 커피 한 잔만 손에 있다면 계단에 앉아 멍 때리기 참 좋은 장소이다. 아르메니아 예레반의 Cascade Complex가 생각났다. 그곳에서도 젊은 청춘들이 낭만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봤는데. 어딜 가나 이런 멋있는 계단이 있는 곳이면 그런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만들어 주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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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5672.jpg?type=w966 출처: 구글 이미지

이 계단이 유명한 또 다른 이유는 이곳이 미국 드라마 시리즈 왕좌의 게임 (Game of Thrones) 시즌 6의 주요 촬영지여서 그렇다. 왕좌의 게임 팬이라면 꼭 둘러봐야 하는 성지 같은 곳이란다. 그런데 왜 나는 이곳에서 홍콩 누아르 영화 장면들이 생각이 났을까? 윤발이 형이 검은 롱 코트에 하얀 머플러를 매고 성냥을 씹고 걸어오면, 성당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빨간 드레스를 입은 초홍이 누님이 등장하는 순간 총성이 울리며 하얀 비둘기들이 날아오르는 장면... 스페인 지로나에서 홍콩 영화를 생각하다니... 영화를 너무 많이 본 모양이다.


90개 계단을 다 내려와 광장에 다다를 무렵 정말로 성당에서 종이 울려 퍼졌다. 뒤를 돌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계단의 끝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봤으나 윤발이 형은 커녕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냥 나 혼자 머릿속에서 한 장면의 영화를 찍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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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어둠이 완전히 내리기 전에 호텔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왔다. 골목을 거닐던 관광객들도 어느새 숙소로 돌아간 시간. 돌아가는 길에 철문이 무거워 문을 열지 못하는 소년도 도와주며 하루를 채운다. 아이가 들어간 건물은 광장에 유대인 별이 그려져 있는 나름 유명한 곳이었다. 이럴 때는 E성향이 부럽다. 아이에게 문을 열어주었으니 사진만 찍고 가도 되냐며고 물으며 은근 슬쩍 묻어 들어갈 수도 있는데. ㅎㅎ 두 I성향의 사람은 좋은 밤 되라는 인사만 남기고 문을 닫았다.


다시 길을 걷는다. 우리가 걷고 있는 지로나 골목길은 확실히 바르셀로나 고딕 지구의 골목길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고딕 지구 골목길은 많은 관광객들의 살짝 휘청이는 흥이 느껴졌다면 지로나 골목길은 조용하고 적막하며 낭만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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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한 헛헛한 마음이 들어 그 마음은 커다란 젤라토로 눌어주어야만 했다. 오늘도 젤라토는 제 구실을 제대로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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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일부러 에펠 다리를 건너 돌아갔다. 지로나의 명소라고 하는데 한 번이라도 더 눈에 담아두고 싶어서. 그렇게 지로나의 밤이 깊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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