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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랭 Sep 18. 2022

에밀과 제이버의 이야기는 픽션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괜찮지 않습니다.

에밀과 제이버, 비극적인 사랑이야기.  


시작은 2018년에 발행된 스페인어 트윗 타래입니다. 저는 영어로 번역된 타래를 먼저 접했고, 흥미롭게 읽으면서 제 타임라인에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해당 타래는 루마니아의 한 마을에 있는 묘비에 얽힌 이야기를 다룹니다. 성이 다른 남성 둘이 한 묘비 아래에 함께 묻힌 것을 흥미롭게 여긴 트윗 작성자가 혼자서 마을 기록들을 뒤져가며 세계 1차 대전 한가운데 벌어진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발굴해냅니다. 두 남자는 서로 적대하는 가문의 청년으로 태어나 사랑에 빠졌지만, 세계대전중에 서로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사후에야 사랑을 인정받고 한 무덤에 묻혔을거라는 결말입니다.



제가 타임라인에 공유하던 타래를 인상깊게 읽으신 D님께서 영문 타래를 번역하셨습니다. 이 타래가 상당히 빠른 속도로 한국 타임라인에 공유된 것으로 기억합니다. (D님은 영문 타래가 원문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되어 원작자에게 양해를 구하셨습니다. 원작자는 흔쾌히 허락한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처음 공유될 때만 해도 모두 이것이 실제 역사를 다룬 르포 에세이라고 여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수 일에 걸쳐 연재되던 타래는 일인칭으로 작성되어있었으며, 새롭게 발견되는 사실들에 놀라워하고 감동하는 화자의 감정들이 생생하게 서술되어있었습니다. 이 글을 작성하면서 재차 확인해봤지만 이 타래만 봐서는 이것이 ‘픽션’임을 알 수 없습니다.  오래된 사진, 박물관 사진, 편지, 공문서, 지도 등을 함께 첨부하며 적극적으로 진실임을 호소할 뿐입니다. 타래의 마지막 트윗은 이렇게 끝납니다.


나는 마침내 이 두 군인들에게 얼굴을 찾아주었다. 나는 그 둘의 사진들을 서로의 옆에 두었다. 둘의 시선이 나의 시선과 공명하였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넘어 두 사람의 내면으로부터 전해오는 간청을 볼 수 있다. "우리의 이야기를 전해줘.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을테니까."


픽션이지만 사기는 아닌?



진실은 이렇습니다 : 타래의 작성자는 영화 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 Guillem Clua,  남자가  자리에 묻힌 묘비를 보고 이야기를 지어냈습니다.  묘비 하나와  묘비에 적힌  이름 (에밀, 제이버) 제외하면 모두 픽션입니다. 감독은 타래가 바이럴이 되고 나서야 잠깐 자신의 계정 바이오에 ‘에밀과 자베어의 이야기는 픽션입니다 스페인어로 추가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이제는 지워졌습니다.)


그사이 유명세를 얻은 에밀과 제이버의 작성자 Clua 최소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자신의 이야기를 설명했습니다. 스페인 퀴어 매체들에서도 이것을 다루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타래를 소재로한 팬아트,,영상물등이 쏟아졌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픽션인지, 에밀과 제이버의 사진처럼 제시되었던 사진들은 어디서 구한 것인지, 원래는 누구의 사진인지, 설명이 없습니다. 왜 이런식으로 작성했는지, 의도를 적어놓은 해명글은 찾을 수 있습니다. 그 해명글은 감독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스페인어로 작성된 게시글을 찾아내야합니다.


Comunicado sobre el hilo de Twitter #EmilyXaver - Guillem Clua

에밀과 제이버는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나눈  이야기에서만 그렇게 열렬한 사랑을 나누었을 뿐입니다. 나는 단지 망각속에 잊혀질 운명에 처한 수많은 LGBT 사랑 이야기들에 조명을 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수많은 에밀과 제이버들이 존재해왔지만 누구도 그들에게 소설, 시구, 노래 하나 바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들 모두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허구의 요소,인물과 플롯들을 이용해야했습니다. 모든 것은 픽션입니다.’


저도 위 포스트의 캡쳐이미지가 영어로 번역되어 공유되는것을 보고서야 제가 읽고있던 영문 타래가 픽션임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래서 D님에게 해당 타래가 픽션임을 알려드렸고, D님께서도 타래에 이것이 픽션이라는 언급을 추가하셨습니다. 당시에는 그것으로 상황이 일단락 된것이라 여겼습니다. 한국에 픽션이라는 사실이 바로 알려진 셈이고, 관련 정보가 더 퍼지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따로 더 검증을 안하고 타임라인에 보이는대로 가져온 제 부주의가 만든 해프닝 정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언급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D님께서 당시 번역 배포에 사용하셨던 계정이 정지되어 내용이 더 확산되지 않고있기도 합니다.)


기만은 아름다울 수 있을까?



다만 그로부터 4년이 지나고, 당시 상황을 돌이켜 보았을때 이 이야기를 ‘그래도 아름다운 이야기’로 묻어두는 것이 옳은 일이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가 듭니다. 무엇보다 그것이 ‘실화가 아닌 픽션’이라는 정정이 얼마나 제대로 퍼졌는지도 확신이 들지 않았습니다. 정보들이 조각조각 나뉘어서 쉽게 바이럴되는 트위터 특성상 이것이 ‘언젠가 본 아름다운 이야기’정도로 남을 가능성이 높았죠. 당시에 공유되던 D님의 번역 타래를 애타게 찾는 트윗을 오늘 보고 이 생각이 다시 들었습니다.

모든 픽션은 허구이지만, 모든 허구가 기만이지는 않습니다. 명백한 기만도 존재합니다. 감독은 지금도 공유되고있는 문제의 타래에 자신의 해명을 추가하지 않았습니다. 스페인 원어 타래를 영문으로 번역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타래만 봐서는 여전히 지역 역사를 탐사하다 퀴어 역사 잭폿을 찾은 탐사가의 이야기같습니다.

 22년에 추가되는 반응들을 보면 ‘픽션이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대체로 호의적인 반응들이 먼저 보입니다. 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정말 사실인줄로만 알고 펑펑 우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리고 울고 난다음에야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배신감을 느끼는 사람도 보입니다.


에밀과 제이버의 이야기가 거짓이라는 언급을 찾으려면 인용 타래들을 뒤지다 화를 내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포스트 링크를 ‘우연히찾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면 구글에 에밀과 제이버를 검색해서, 뒤늦게 픽션이라는 것을 알게   분노하는 사람들이 발행한 글들을 찾아야합니다.   

 

감독은 분명 해명을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트윗이 수십만번 알티되고난 후 실제 퀴어 역사가들이 해당 타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후에 작성한 글입니다. 비난이 오가고 따로 작성한 ‘해명 타래’는 겨우 136번정도만 rt되었습니다. 그리고 해명문의 내용을 보면, 앞으로도 이 타래가 거짓임을 적극적으로 알릴 의도가 없어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것을 퇴색시킵니까? …픽션은 우리를 구원합니다. 나는 그것을 믿습니다. 우리를 압도하고 고통받게하는 현실 앞에서 픽션은 우리를 치유합니다. … 우리가  이야기를 진실로 만든다면 아름다울것입니다.  묘가 서로를 사랑할  없었고  나은 결말을 가져야 했을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상징이 된다면 말입니다. 누구든 [타래속에언급된루마니아마을지명] 방문한다면, 말해지지 못한 수많은 사랑이야기들을 위해 꽃을 놓아주십시오. … (에밀과 제이버가)다시 죽는지는 여러분에게 달려있습니다.


감독은 픽션임을 알리는 대신 사람들이 우연히 속아주기를 바라며, 이 해명문을 본다면 적극적으로 그 속임수에 동참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이름을 차용한 두 군인들이 ‘다시 죽는지’는 독자가 얼마나 협조해주느냐에 달려있다는 말을 합니다.


실제로 퀴어 연구는 자료 부족에 시달리는 영역이 맞습니다. 가시화되기 어려운 영역들, 불법으로 여겨지는 영역들일수록 제3자가 작성하는 기록들은 왜곡된 시선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당사자들끼리 서로 편지를 주고받더라도 본인이나 상대가 죽기전에 전부 처분해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 퀴어 역사가들은 이러한 ‘자료 부족’을 핑계로 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이었던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것을, 퀴어가 현대-포스트모더니즘-리버럴-서구화의 음모가 아니라 실존하는 사람들의 생애 경험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감독의 ‘픽션’은 기만적일 뿐만 아니라, 퀴어 연구자들에게도 상당히 상처가 되는 행위입니다. 감독 자신뿐만 아니라, 앞으로 발굴될 퀴어 역사들도 신뢰성을 의심받게되었으니까요.


Clua의 기가막히게 유명해진 이야기는 우리가 두 눈으로 퀴어 유물들을 보아도 의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런식의 트위터 이야기때문에 LGBT역사는 진지하게 여겨지기 어려워지게 됩니다. 실제 역사가 만들어지고있는 퀴어사 배경을 참칭하는 식이면요. 이미 수십년동안 거짓으로 여겨지고, 퇴폐적이고 자의적인 판타지정도로나 여겨져온 바로 그 배경을 말입니다.  _ Jonah Coman. 퀴어 중세사 연구가.   


정말로 퀴어 가시화는 픽션에서만 가능할까?


세계 2차대전 게이 병사 둘이서 주고받은 오백개의 편지를 다룬 기사입니다. 길버트 브래들리는 고든 보우셔를 G로만 표기해 편지를 보냈기 때문에 G의 정체가 고든, 즉 남자였다는 것은 후에야 밝혀진 것으로 보입니다. 기사는 2017년에 발행되었습니다.


Forbidden love: The WW2 letters between two men

전쟁 발발전 사랑에 빠진 둘은 서로 다른 부대에 배치되었기때문에 전쟁 내내 서로 편지로만 소통했습니다. 편지들에는 간결하면서도 간절하고 아름다운 사랑 고백들이 담겨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소년. 널 언제나 내 곁에 두는 것말고는 내 삶에 더 원하는 것이 없어. … 난 네 어머니나 아버지가 보일 반응이 눈에 선해… 세상 누구도 우리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생각조차 할 수 없을거야 - 그들은 사랑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해.

G는 후에 자신이 보낸 편지들을 모두 파괴해달라고 했습니다. ‘진심으로 간절히 청하건데 날 위해 하나만 해줘. 내 모든 편지들을 파괴해줘. 제발 자기야 날 위해 그것 하나만 해줘. 그때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난 너를 숭배해.’ 하지만 브래들리는 그 편지들을 죽을때까지 보관했습니다. 편지들은 그가 2008년에 죽은 후에야 발견되었습니다.


기사에서 게이 인권운동가 Peter Roscoe는 말합니다.

게이 역사는 실존합니다. 언제나 부정적이고 슬픈것만도 아닙니다.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체포들에 대한 것입니다. 오스카 와일드와 리딩 감옥같은 그런 끔찍하고 끔찍한 이야기들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끔찍한 경우들에도 불구하고, 게이와 레즈비언들은 그 상황들을 넘어 흥미롭고 좋은 삶들을 영위해냈습니다.

‘퀴어 픽션의 비극이 지겹다’라는 이야기들이 한번씩 나옵니다. ‘실제 현실이 힘드니 그런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많은 것이 아니냐’라는 반박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퀴어들은, 위 기사가 말하듯, 비극적인 환경속에서도 살아가고 사랑하는 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흔적들도 존재합니다. Clua가 자신의 픽션이 현실을 대체해야하는 근거로 ‘그런 기록들이 없기때문에’라고 내세우는것과 달리 말입니다. 비극에는 그 나름의 기능과 카타르시스가 있지만, 그것이 ‘유일한 옵션’이라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더 자주 부각되어왔고, 그렇기에 제3자에게는 더 신빙성을 확보할만한 주제에 가깝습니다. Clua는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분명 많은 공을 들였겠지만, 결국 소재 선정의 과정에서 쉬운 길을 택한것입니다.


   

이야기의 역할


Clua가 차라리 처음부터 픽션임을 이야기하고 연재를 시작했다면, 흥미로운 시도로 여기며 충분한 감동을 느꼈을 것입니다. 물론 파급력은 훨씬 덜했을 것입니다. 실화의 힘이라는게 그렇습니다. 하지만 좋은 이야기는 나름의 힘이 있습니다. 감독이 작성한 허구의 이야기가 ‘아주 허구가 아니라는것’, 그와 비슷한 생애경험을 가졌던 사람들이 있었을거라는 것, 그것은 이야기가 이야기로만 존재해도 알릴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중에서도 에밀과 제이버의 묘비에 정말 그런 이야기가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에밀과 제이버와 같은 게이 군인들의 기록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보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었겠죠. 꼭 죽은 사람의 이름을 빌려야만 죽은 사람들과 감정적인 연결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에밀과 제이버는 그래서 왜 한 묘비아래 묻혔나? 이에 대해서는 대중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작은 마을 크기에 비해 너무 많은 청년들이 한순간에 죽었기 때문에, 묘지가 부족해 부득이하게 여러 사람을 묻고 묘비를 함께 세우는 일들이 흔했습니다. 에밀과 제이버의 경우도 그와 같은 것이라 보는 것이 더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그들이 정말 놀라운 사랑을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망각이 제공하는 공백과, 그 공백이 주는 여지를 이용하기로 한다면 상상을 더 해볼 수도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깔끔하게 떨어지는 완성된 이야기를 만들고자 하는 유혹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퀴어들의 실제 경험을 대변할 수는 없습니다.


잊혀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되살리고자 하는 욕망은 충분히 존재할 수 있지만, 그 욕망에 앞서 실존했던 사람들의 자리를 대신하려들면 안됩니다. 이야기를 하는 방법에는 ‘거짓’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1] https://mxcoman.medium.com/emil-and-xaver-or-lgbtq-history-as-fiction-ea93caf85eab

[2] https://www.gaystarnews.com/article/angry-gay-history-soldiers-emil-xaver/

[3] https://twitter.com/guillemclua/status/1072793347029389312?s=20&t=kpKEjQznV4VFrbX980NOow  감독의 해명 타래. 본인 홈페이지 포스트 내용의 반복이며, 레딧 스레에서 링크를 발견했습니다.


*브래들리와 고든의 이야기는 2022년에 The Letter Men 이라는 이름의 단편 영화로 개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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